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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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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비경 100선] (6) 의령 봉황대와 일붕사

켜켜이 붓질한 듯 선명한 기암절벽
신라 군사 요충지였던 봉황대
장쾌한 기암괴석이 줄줄이 펼쳐진다

  • 기사입력 : 2013-02-14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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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령 궁류면의 봉황대는 병풍처럼 펼쳐진 기암절벽이다. 봉황대 아래에 보이는 사찰이 일붕사이다. 일붕사의 서경보 존자 사리탑 옆 계단을 오르면 오른쪽이 동양 최대 동굴법당인 대웅전이고 왼쪽은 무량수전이다.
    봉황대의 봉황루로 올라가는 곳곳에서 석굴을 볼 수 있다.
    동양 최대 동굴법당인 일붕사 대웅전.


    “고립무원의 처지가 된 대야성을 구하기 위해 법민은 김유신을 찾아가 철기병 지원을 요청한다. 하지만 이를 알아챈 비담에 의해 김유신은 역모를 꾀한다는 누명을 쓰게 되고, 김유신의 발이 묶인 사이 대야성은 한층 더 위급해지는데….”

    요즘 KBS 1TV 대하드라마 ‘대왕의 꿈’에서 신라와 백제는 대야성 전투를 치르고 있다. 대야성은 지금의 합천이다.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로 군사적 요충지였다. 합천으로 가는 길목인 의령군 궁류면 봉황대(鳳凰臺). 신라군의 선봉장 김춘추의 아들 법민(후에 문무왕)이 봉황대에 진을 치고 백제의 동태를 살폈다고 한다. 벽계저수지 밑 들판은 신라군의 야영지였다. 봉황대는 맞은편 깃대봉으로, 깃대봉은 봉수면으로, 창녕 화왕산을 거쳐 경주 남산으로, 신라 조정까지 봉화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대야성은 신라 장군 이사부가 562년(진흥왕 23) 정벌해 도독부(都督府)를 뒀다. 그러나 642년(선덕여왕 11) 백제 장군 윤충의 침공으로 함락된다. 이때 대야성의 도독은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이었다. 김품석과 그의 아내가 백제군에 죽임을 당하자 큰 타격을 입은 신라는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한다.

    이후 김춘추는 당나라와 손을 잡고 삼국통일을 이룬다. 삼국통일의 염원이 담긴 그 역사의 현장을 소개한다.

    의령읍에서 동북쪽 약 20㎞ 지점, 벽계저수지를 향해 꺾어드는 길 어귀 왼쪽에 기암괴석이 장관을 펼친다. 생김새가 봉황을 닮았다 해 봉황대라 부른다. 눈대중으로 높이가 얼추 40~50m는 돼 보인다. 금강산 절경의 축소판이라 한다. 겨울에 찾은 봉황대는 기암절벽의 속살을 그대로 보여준다. 낙엽으로 덥인 좁은 돌계단을 따라 절벽으로 올라간다. 오랜 세월 풍화를 받은 절벽은 파편이라도 떨어질 듯하다.

    조금 오르면 암벽 사이로 자연 동굴이 하나 있고 이 동굴을 지나면 좁은 돌문이 가로막는다. 돌문을 빠져나가면 왼편으로 약수터가 나오고 좀 더 올라가면 봉황대 중턱 평평한 곳을 만난다. 절벽 중간쯤에 널따란 곳이 나온다.

    절경이 있는 곳이면 빠지지 않는 것이 누각이다. 봉황루(鳳凰樓)가 버티고 섰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바위 끝에 서면 주변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래를 보니 오금이 저릴 정도로 아찔하다.

    잠시 신라장군 법민이 되어, 칼을 높이 들고 “용맹한 신라의 군사들이여, 나를 따르라” 군사들을 독려한다. 저 멀리 백제군 진지가 보이는 듯하다.

    3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봉황루에서는 옛날 인근 유생들이 시화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봉황루는 인적 뜸한 빈 들판을 처연하게 내려다보고 있다.

    봉황대는 콧대바위, 콧대듬이라고도 부른다. ‘듬’은 낭떠러지의 험하고 가파른 언덕, 벼랑을 뜻하는 방언이다. 정말 사람의 코 형상이 거꾸로 선 듯하다.

    봉황루에서 내려오면 일붕사(一鵬寺) 사천왕문이 나온다. 2층 구조로 아래층은 사천왕문, 위층은 범종각이다. 일붕사는 대한불교 일붕선교종 총본산이다.

    이곳에 절이 만들어진 것은 727년 신라 성덕왕 26년이라 한다. ‘왕오천축국전’을 쓴 혜초 스님이 중국과 인도 성지를 순례하던 중 꿈에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절벽에서 지장보살이 환하게 웃으며 이곳에 호국영령들을 위로해 줄 불사를 하면 훗날 큰 보배가 될 것이라 했다. 이를 성덕왕께 아뢰고 전국의 명산을 찾아 헤매다 꿈에 본 기암절벽과 모습이 흡사한 이곳에 절을 세우고, 성덕왕의 이름을 따 성덕사라고 하던 것이 일붕사의 전신이다.

    범민의 아버지 김춘추는 나중에 태종무열왕이 되었고, 왕자가 있었던 봉황대에 후대에 사찰을 지어 비로자나불을 안치시킨 것이다. 성덕왕이 봉황대의 빼어난 산세와 조상의 얼이 배인 곳을 천추만대에 기념하자는 뜻에서 자신의 왕호를 내려 성덕사라는 사찰을 지었으니 그 명성을 짐작할 수 있다. 전쟁으로 쓰러져 간 이 지역의 수많은 영령을 위로했으리라. 1300여 년 전 이름 없는 신라군과 백제군, 멀리 당나라에서 건너와 이국 땅에서 숨진 병사들이 스쳐간다.

    세월은 흘러 화재로 사찰은 몇 차례 소실되고 복원을 못하고 있던 터에 1987년 지금의 주지 혜운 스님이 불사의 염원을 세운다.

    산의 정기가 너무 강해 화기를 빼야 한다는 큰스님들의 조언에 따라 대웅전의 위치를 바꾸고, 불에 타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거대한 바위를 이용해 동굴법당을 만든다.

    일붕 서경보 존자(尊者) 사리탑을 지나 올라가면 대웅전과 무량수전이 들어온다. 서경보 존자는 ‘남북통일 세계평화’ 기원 시비를 전국 758곳에 세웠다. 국내외 박사학위 126개를 취득하고 세계 최다 선필 휘호를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1동굴법당인 대웅전은 높이 8.5m, 폭 12.7m, 길이 27.5m로 그 넓이가 1260㎡다. 동양 최대의 동굴법당으로 영국 기네스북에 등재돼 있다. 통로로 된 입구를 지나면 넓은 내실이 나온다. 비로자나불과 노사나불, 석가모니불을 모셨다. 천장은 돔 형식으로 다듬었다. 소원 성취를 염원하는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바로 옆 제2동굴법당인 무량수전도 300㎡에 이른다. 아미타불을 비롯 3000여 불상을 모셨다.

    일붕사 뒤쪽으로 약 1㎞ 봉황산 정상을 향해 가파른 길을 오른다. 산속 골짜기에 연못을 조성하고 그 한가운데 법당을 만들었다. 외벽 전체를 금단청으로 마감한 독특한 분위기의 극락보전이 눈길을 끈다.

    1300년 전 신라가 삼국통일을 염원하며 각축을 벌였던 곳, 남북통일과 세계평화를 염원한 일붕 존자. 호국과 통일의 의미를 되새겨볼 만한 장소다. 의령 9경 중 3경이다.

    글= 이학수 기자 사진= 김승권 기자


    ☞찾아가는 길

    △창원 방면에서= 남해고속도로 함안 IC → 법수 → 정곡 → 지방도 1011번 이용 → 궁류(평촌) → 일붕사.

    △진주 방면에서= 남해고속도로 의령 군북 IC → 의령 → 국도 20번 이용 → 정곡 → 지방도 1011번 이용 → 궁류(평촌) → 일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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