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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4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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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의 마을 아, 본향! (7) 밀양시 교동 고택마을

처마 맞댄 한옥 지붕 아래 수백년 시간이 멈춘 곳

  • 기사입력 : 2013-02-19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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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밀양손씨 집성촌인 밀양시 교동 고택마을 전경. 수백년을 이어온 전통 한옥이 많아 고택의 아름다움을 물씬 느끼게 한다.
    한정식을 운영하고 있는 밀양 교동 손씨고가.
    마을 뒤편에 자리 잡은 밀양향교.
    이순공 밀양시 문화해설사가 돌담길을 걷고 있다.



    문화재자료 고택 많은 밀양손씨 집성촌

    조선~근대~현대 전통한옥 변천사 한눈에

     
    밀양향교·독립운동기념관·삼양사 등

    돌아오는 길에 둘러볼 만한 곳도 많아


    자연환경이 아름다운 밀양에는 한옥의 아름다움도 한껏 즐길 수 있는 마을이 있다. 밀성(밀양)손씨 집성촌인 밀양시 교동 고택(古宅)마을. 이곳은 밀양의 토속문화를 발전시키고, 명문사족(名門士族)으로 번성을 누려온 밀양(밀성)손씨 가문의 1번지 동네이다.

    교동 고택마을에는 99칸의 한옥을 비롯,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한옥이 6가옥이나 있다. 이들 한옥은 각기 독특한 형태와 예스러움을 뿜어내며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수백 년을 이어오고 있다.

    무심코 이곳을 찾아도 정겨운 고향마을에 온 듯 마음이 푸근해진다. 수백 년 손때가 묻은 대청마루에 한번 앉아보면 이내 눕고 싶을 정도로 친근감이 간다. 고택마을 아낙네가 건네주는 냉수 한 잔을 마시면 도시생활의 찌든 심신이 금방 싸하게 정제되는 느낌을 받는다.

    마을 위쪽에는 유학의 산실인 향교(鄕校)가 있어 수준 높은 정신세계를 구가하고 있는 곳이 바로 교동 고택마을이다.

    이곳 고택마을에서 가장 큰 집은 ‘밀양 교동 손씨고가’이다. 이곳은 ‘만석꾼의 집’으로 불리며 99칸의 저택으로 택지가 3300㎡가 넘는다.

    조선 숙종시대에 인묵재 손성증이 지은 것으로 전해지기 때문에 대략 3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건물의 배치 형식도 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 등 내외생활의 공간구분이 완전하게 이뤄지고 있다.

    마을 뒤편에 밀양향교가 자리 잡고 있으며, 전방으로는 아동산을 바라보고 있는 남향집이어서 예부터 ‘장자의 명당’으로 불리고 있다.

    지금은 밀양손씨 교동파 손영배 씨 소유이고, 손씨의 증조할아버지인 만석꾼 손영돈 옹이 집을 키웠다. 예전에는 대문이 12개나 됐는데, 지금은 9개가 보존되고 있다.

    이 고택에서는 ‘열두대문 한정식’을 운영하고 있다. 한정식은 손영배 씨의 동생 손중배 씨가 맡아 운영하고 있다. 고택에 들어서면 귀엽게 생긴 강아지가 명랑하게 짖어대지만 성격이 까칠해 손님들을 곧잘 문다니 조심해야 한다.

    열두대문 한정식에서는 다양한 가격대의 상차림을 제공한다. 옛날 잔칫집에서 먹던 전통음식을 위주로 상을 차려내 손님들의 반응이 좋단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1주일 전에, 평일은 하루 전에 예약해야 자리를 잡을 수 있단다.

    99칸 한옥을 구경하고 밖으로 나와 아늑한 골목을 걸어 내려오면 지난해 지은 밀양유림회관을 볼 수 있다.

    회관을 조금 지나면 ‘밀양 교동 밀양손씨 고가’에 닿는다. 교동마을 동편 중앙부에 자리 잡고 있는 근대 한옥이며, 밀양손씨 교동파 종택이다. 이곳은 대문채, 중사랑채, 안채, 아래채 등 4동으로 이뤄져 있으며, 지붕은 좌우측의 형태가 다른데, 좌측은 팔작지봉, 우측은 맞배지붕으로 돼 있다.

    이곳은 근대한옥으로 아래채와 사랑채의 병렬적인 배치, 진퇴가 발달한 평면구성, 창호의 의장성 구조와 의장의 불일치 등 근대기에 건축한 한옥의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종손 손백식(88) 옹은 “종손으로서 종택을 지키기 위해 다소 불편하지만 고택에서 살려고 준비하고 있다”며 “만약 내가 세상을 떠나면 아들이 서울에서 내려와 살 것”이라고 말했다.

    종택을 지키려는 종손의 결연한 의지를 전해들은 뒤 또다른 고택을 구경하기 위해 발길을 옮긴다.

    고택을 찾아다니는 내내 만나는 겨울 텃밭의 녹색 생명력, 집을 지키는 개들의 짖는 소리, 골목을 오가는 노인네들의 행렬이 영락없이 따뜻한 시골마을의 운치 그대로다.

    5분 정도를 걸었을까? ‘교동 손대식씨 고가’에 도착했다.

    밀양 교동에 있는 고가들은 남부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웅장한 멋과 건물 구조, 배치에 한껏 여유를 부린 전통한옥의 형식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1903년부터 1945년까지 경부선 철도 부설과 저수지 축조사업 등 대규모 사업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당시 중국과 러시아, 일본 등지에서 건너온 토목, 건축 등 각 분야의 기술자들이 대거 투입되면서 밀양지역 건축양식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당시 기술자들이 조선시대 남부지방의 대표적인 건축양식을 잘 간직해온 밀양지방의 건축물에 일본식 가옥의 실용적인 내부구조와 적벽돌과 화강석을 이용한 중국식의 견실함을 융화시켜 ‘교동 손대식씨 고가’를 만들었다. 따라서 이 고가는 조선시대와 근대, 현대에 이르는 전통한옥의 변천과정을 조명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교동 손병준씨 고가’는 고가도 멋있지만 돌담길이 운치가 있다. 20m에 달하는 돌담길이 길게 뻗어 있어 연인들이 손을 맞잡고 걸으면 사랑하는 기운이 저절로 전달될 것 같다.

    ‘교동 손병순씨 고가’와 ‘교동 손정식씨 고가’도 웅장한 멋과 건축물의 구조, 배치에 여유를 부린 전통한옥의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교동마을을 자랑할 때 ‘밀양향교’를 빼고 말할 수는 없다.

    밀양향교는 서기 1100년경에 창건됐다고 전하고 있는데, 교동 고택마을 뒤편에 위치하고 있다. 이 향교는 선조 25년(1602년) 현재의 위치에 부사 최기가 중건했고, 특히 대성전은 순조 21년(1821년) 부사 이현시가 중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의 구성은 대성전, 동무, 서무, 내삼문, 명륜당, 동재, 서재, 풍화루 등이 있다. 문묘부의 중심축과 교당의 중심축이 완전하게 평행하지는 않지만 대성전과 내삼문을 잇는 중심축의 양무가 대칭으로 배치돼 있고, 명륜당과 풍화루를 잇는 중심축에 양재가 대칭으로 배치돼 있다.

    향교에 우뚝 서 있는 노송과 은행나무가 향교의 세월을 가늠하게 하는데, 서 있었던 만큼의 세월 그 이상을 더 서 있겠다는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특히 교동에는 밀성손씨 중시조인 광리군 손긍훈 대장군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손긍훈은 고려 개국공신으로, 태조 왕건을 도와 후백제를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좌명공신에 선록되고, 삼중대광사도광리군에 봉해진 인물이다.

    교동에는 손긍훈의 묘소가 잘 정비돼 있으며, 손긍훈의 목상(木像)도 밀양시립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이 목상은 삼한벽공도대장군 박욱의 목상과 함께 밀양 추화산성에 있는 성황사에서 성황신으로 받들어 왔다.

    밀양시립박물관과 같은 건물을 사용하고 있는 밀양독립운동기념관 옆 광장에는 선열의 불꽃이라는 기념탑이 조성돼 있는데, 이 선열의 불꽃 주변을 빙 둘러서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 중 건국훈장 애족장 이상 추서된 36위의 브론즈 흉상이 제작돼 있어 엄숙한 시간을 갖게 만든다.

    이제 마지막으로 고택마을과 밀양시청 중간에 있는 대한불교 천태종 ‘삼양사’에 들러 화려한 단층무늬 사찰을 감상하고, 아래쪽으로 보이는 시가지를 조망하는 즐거움도 챙겨 봐야 한다.

    밀양 교동 고택마을의 한옥들은 보수가 필요하거나, 빛이 바래 가는 집이 많아 관리당국과 지자체 등의 손길이 절실해 보였다. 고택의 소유자나 관리인들이 고령이어서 넓은 고택의 체계적인 관리가 되지 않는 문제 등이 발생하기 때문에 위대한 문화유산을 후대에도 전승하기 위해서는 밀양시 등 행정의 전폭적인 지원이 불가피하다.

    글=조윤제 기자 cho@knnews.co.kr

    사진=전강용 기자 jky@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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