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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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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의 마을 아, 본향! (9) 의령군 가례면 갑을리 양성마을

수해의 슬픔·약탈의 아픔…
숱한 상처 이겨낸 산골마을

  • 기사입력 : 2013-03-12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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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령군 가례면 갑을리 양성마을 전경.
    양성마을 돌담길.
    태풍 매미 수해 복구를 하면서 넓힌 도로와 하천.
    당시 금광이 있던 자리.
    마을주민 주삼규 씨가 장작을 패고 있다.


    의령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마을 몇 곳이 있다.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 생가가 있는 유곡면 세간리 1구마을.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 선생 생가가 있는 부림면 입산리 설뫼마을. 삼성그룹 창업주 호암 이병철 생가가 있는 정곡면 중교리 장내마을. 장학재단 설립으로 유명한 이종환 삼영화학그룹 회장의 생가가 있는 용덕면 정동리 정동마을이다. 하지만 이곳들을 뒤로하고 기자가 찾은 곳은 가례면 갑을리 양성마을이다. 젊은이들은 먹고살기 위해 도시로 떠났고 나이 많으신 어르신들만 조상들이 물려준 땅에 농사를 지으며 마을을 지키고 있다. 세월이 지나면 우리들 기억 속에서 사라질지도 모르는 마을이다. 하지만 이곳은 우리들이 잘 알지 못하는 슬픈 사연과 역사적 상처가 있는 곳이다. 주민들에게 마을의 숨은 이야기를 들어본다.


    ◆ 10년 전 태풍 매미 상처 ‘치유’

    지난 2003년 9월 태풍 매미가 이곳을 휩쓸고 지나갔다. 양성마을 뒤 정삼재(한우산 옆 마을 뒷산) 계곡물이 불어 산사태가 일어나 주성추 씨 등 일가족 5명이 토사에 매몰돼 숨졌다. 추석을 맞아 10여 년 만에 고향집을 찾은 큰딸 가족과 만난 지 30여 분 만에 일가족은 참변을 당했다. 마을사람들은 그날에 몰아쳤던 폭우만큼 ‘마음의 눈물’을 흘리며 그들의 혼을 달랬다. 당시 기자도 아수라장이었던 마을을 현장 취재하기 위해 갑을저수지에서 길이 끊겨 1시간가량 걸어갔었다. 수해 후 마을이 안정을 찾기까지는 5~6년이 더 걸렸다. 주민들은 지역사회의 도움을 받아 마을을 재건했다. 10년 후 양성마을을 다시 찾았다. 마을주민들을 동네를 가로질러 흐르던 하천을 넓히고 석축도 견고히 쌓았고, 리어카가 간신히 지날 수 있던 골목도 차량이 쉽게 지나다닐 수 있도록 넓혔다. 집도 개보수되거나 새로 지어져 말끔했다. 10년 전 수해의 상처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을은 평온함을 되찾은 것 같았다. 할머니들은 마을회관에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마을 어귀에서 장작을 패던 주삼규(74) 씨를 만났다. 그는 대대로 고향을 지키고 있다. 그도 10년전 수해 때 집을 반쯤 잃었다. 그는 “당시 태풍 매미의 피해가 컸지만 마을 주민들이 합심해 이겨냈다”며 “대부분 주민들이 마을을 지키며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와 헤어진 후 일가족 5명이 참변을 당했던 그 집으로 향했다. 집 형체를 알아볼 수 없던 그 자리에는 깨끗한 건물이 서 있었다. 집주인을 잃은 집터에 누가 살고 있는지 궁금했고, 대문 앞에서 인기척을 보내지만 집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다시 마을로 내려와 주삼규 씨를 만나 사연을 들었다. 그는 “수도권에 살고 있는 주성추 씨의 큰아들이 건축가인데 6~7년 전 집을 새롭게 지었다”며 “거주는 하지 않고 가끔씩 내려와 집을 돌본다”고 말했다.

    마을 끝자락에 있는 그 집을 다시 쳐다보니 가족을 갑자기 잃은 사람의 슬픔이 그대로 배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가족이 보고 싶을 때 오지 않을까 싶다.


    ◆ 시대적 상처들

    1935년 일제시대 때 양성마을 뒤 장삼재 중턱에 금광이 있었다. 일본인들이 우리의 지하자원을 약탈하기 위해 이 깊은 산골마을까지 발을 디뎠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일본인들은 금속탐지기를 들고 다니며 이곳에서 금맥을 찾은 것으로 여겨진다.

    금광의 실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양성마을 뒤 중삼재에 올랐다. 산을 올라가면서 버려진 화전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예전에는 농사를 지은 땅이지만 지금은 노인들만 남아 있어 대부분 그대로 방치되고 있었다. 40분가량 산속을 헤매다 사전에 입수한 정보로 위치를 도저히 찾을 수 없어 지인에게 도움을 요청해 겨우 찾았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금광의 흔적을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웠다. 입구는 세월이 흘러 매몰됐고, 당시 채광작업을 하면서 생긴 수많은 돌 조각들이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돌 조각은 자연적으로 풍화된 둥근 모양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깨어진 불규칙 사각형이었다.

    금광을 찾기 위해 동행했던 마을주민은 “50여 년 전 젊었을 때 마을에 있는 집에서 금광의 위치를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로 돌 무더기가 컸었다”며 “당시 일본인들이 채광작업을 하기 위해 의령읍에도 거의 없었던 전기를 여기까지 끌어와 사용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일제시대 때 금광에서 일한 인부가 수백 명에 달할 정도로 마을이 북적거렸다는 말을 선친으로부터 들었고, 마을 주민 일부는 이곳에서 일을 하면서 일본인들로부터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으로 안다”며 “여인숙과 같은 숙박시설이 없어 인부들은 재실이나 민가 아래채에서 잤고, 주막들이 번성했다”고 말했다.

    산에서 내려와 다시 마을을 찾았다. 골목길에 앉아 있던 주재근(76) 씨를 만났다. 마을의 또다른 사연을 들었고, 이야기는 이러했다.

    6·25전쟁 당시 북한군이 얼마 동안 마을에 머물렀고, 지리산 쪽으로 이동했다. 누런 군복을 입은 북한군이 마을 곳곳에서 볼 수 있을 정도로 많았다. 주민들을 해치지는 않았지만 굶주림에 허덕인 북한군은 가축이나 짐승을 눈에 보이는 대로 다 잡아먹었다. 주민들은 가축을 살리려 밤에 몰래 산속으로 숨겼지만 대부분 물거품이었다. 북한군은 이곳에서 요양(?)을 하고 여기를 떠났다. 그는 “겉으론 조용한 산골마을이지만 세월의 상처가 많은 곳”이라고 말했다.


    ◆ 풍광 좋아 별장·전원주택 많아

    지난해 12월 말 기준으로 76가구 165명이 살고 있는 양성마을에는 현재 신안주씨가 20여 가구로 가장 많이 살고 있다. 도시인들이 자굴산, 한우산 등 자연 풍광에 반해 이 마을로 들어와 별장, 전원주택을 지어 살고 있다. 마을주민 중 65세 이상이 80%를 넘는다. 마을 출신으로 사법고시와 행정고시에 합격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농촌 마을마다 대부분 있는 당산나무가 지금은 없고 흔적만 남아 있다. 그루터기를 재어 보니 어른 두 명이 팔을 벌려 잡아야 안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둘레였다. 마을주민들에게 사연을 물어봤다.

    50년 전 수령이 600년 넘은 당산나무를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베었는데, 벌목작업을 했던 한 사람은 며칠 후 시름시름 앓다 죽었으며 또 한 사람은 정신이 이상해져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고 한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서는 길에 마을을 다시 한번 둘러봤다. 처음과는 달리 들판은 북한군이 여기저기 모여 가축을 잡아 구워 먹는 것 같고, 숲이 우거진 산속에서는 금을 캐기 위해 돌 깨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글=주재현 기자·사진= 성승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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