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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9월 18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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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을 가다] 작가와 떠나는 경남 산책 (38) 송창우 시인이 찾은 진해 용원

아직도 이곳엔 머물러 있다
오랜 기다림의 시간들이…

  • 기사입력 : 2013-03-14 01:00:00
  •   
  • 수협 공판장 옆 어시장.
    가덕도로 가는 도선장이 있던 부두. 어릴 적 집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며 오래오래 쪼그려 앉아 있던 곳이다.
    바다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큰 거북의 모습을 닮은 망산도(望山島). 수로왕이 이곳에 신하들을 보내 횃불을 밝히고 바다 건너 인도 아유타국에서 온 허황옥을 맞았다고 전해진다.
    망산도의 바위들은 모두 거북의 등처럼 쩍쩍 갈라져 있다.
    유주암(維舟岩). 허황옥이 타고 왔다는 돌배가 뒤집힌 것이라 전해진다.
    망산도에 있는 큰 알 모양의 바위. 반쪽으로 갈라져 알에서 태어난 수로왕의 신화를 떠올리게 한다.
    글·사진=송창우


    세상에는 수많은 장소가 있고, 그중에 어느 한 곳은 오랜 기다림의 시간이 깃든 장소가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내 삶에 머물렀던 수많은 기다림들이 그대로 쪼그리고 앉아 있을 것 같고, 그래서 살아 있음을, 살아갈 이유를 다시 깨닫게 될 것 같은 곳. 문득 이 봄날 내 인생의 기다림이 가장 많이 머물러 있을 것 같은 곳에 가서 하염없이 기다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진해 용원입니다.

    용원 뱃머리. 가덕도로 가는 도선장이 있던 부두엔 이제 물고기와 해물을 파는 사람들만이 손님들을 기다리며 줄지어 앉았습니다. 그들의 기다림이 쪼그리고 앉아 있는 자리 아래에 내 청춘의 긴긴 기다림들도 앉아 있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 나는 자주 배를 놓치고 다음 배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보통은 한 시간을 기다리면 배가 다시 오곤 했지만, 몇 시간을 쪼그리고 앉아도 배가 오지 않는 날들이 또한 있었습니다. 그런 날들의 막막한 기다림. 그렇다고 자리를 박차며 돌아설 수도 없었던 날들의 간절한 기다림.

    때론 물위를 걸어가는 사람을 꿈꾸기도 하고, 때론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햇살에 졸기나 하면서, 괜히 갈매기들이나 쫓으면서 기다리던 곳이 용원 뱃머리입니다. 부산진해신항만 공사로 바닷길이 모두 메워지고 이곳에서 도선이 사라진 지도 어느덧 열 해가 지났건만, 용원뱃머리에만 오면 나는 여전히 집으로 가는 도선을 기다리며 오래오래 쪼그려 앉아 있고 싶어집니다.

    수협 공판장 옆 어시장엔, 붉은 대야 속엔 죽음을 기다리며 납작 엎드린 도다리도 있고, 물 밖으로 푸른 대가리를 내밀며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 숭어도 있습니다. 죽음을 기다리는 물고기들의 운명이야 서글프기 짝이 없지만, 눈 지그시 감고 이번엔 횟집에 앉아 한 접시의 숭어회가 오기를 기다립니다. 나는 봄날의 회 중에 핏빛이 감도는 숭어회를 가장 좋아합니다.

    숭어회는 동백꽃 피는 철이 제철입니다. 이 무렵에 숭어 떼는 오륙도를 돌아 다대포를 돌아 가덕도 등대 밑을 지나갑니다. 용원 어시장에 있는 숭어는 대부분 가덕도에서 잡은 것입니다. 가덕도에선 숭어잡이를 ‘숭어들이’라고 부르는데, 육수장망이라는 오래된 전통어로법을 씁니다.

    숭어들이의 핵심은 기다림입니다. 숭어 떼가 오는 바다의 길목에는 여섯 척의 배가 그물을 펼쳐놓고 하염없이 기다립니다. 어로장이라 불리는 이는 바다가 훤히 보이는 산 먼당 망대에 서서 또 하염없이 숭어 떼를 기다립니다. 이틀이고 사흘이고 그렇게 숭어 떼를 기다리고 있다가, 숭어 떼가 나타나면 어로장이 호령을 하고 일시에 그물을 건져 올리는데, 예전엔 한번 그물에 수천, 때론 수만 마리의 숭어 떼가 들었습니다. 그것은 파도에 일렁거리며 오랜 기다림을 견딘 이들에게만 주는 바다의 축복 같은 것입니다.



    백 년도 넘게

    낮에는 오얏꽃을

    밤에는 동백꽃을 피우고 앉은

    동두말 등대 아래에



    이백 년도 넘게

    숭어 떼를 기다리고 앉은

    여섯 척의 배가 있다.



    그곳에 가서

    나도 한 오백 년

    그대를 기다리고 싶다

    - 졸시 <가덕도 등대>



    흔히 우리는 기다림이 가장 오래 머물러 있는 곳으로 등대를 꼽습니다. 등대는 먼 바다를 건너오는 배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등불을 켜고 기다리는 곳입니다. 용원에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먼저 배가 오기를 기다리며 불을 밝힌 망산도(望山島)가 있습니다. 수로왕이 알에서 태어나 가락국을 세운 지 7년 되던 해인, 서기 48년의 일입니다.

    수로왕은 운명적인 사랑이 바다를 건너 자신을 찾아오고 있음을 미리 알고 망산도에 신하들을 보내 횃불을 밝히고 그녀를 맞이하게 합니다. 붉은 돛에 붉은 기를 휘날리며 나타난 배는 마침내 망산도에 닿았고, 비단 옷자락을 날리며 먼 나라의 여인이 이 땅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하늘이 점지해준 인연으로 수로왕을 찾아온 여인. 파사석탑으로 풍랑을 잠재우며 아득히 먼 바닷길을 건너온 열여섯 살의 여인. 그녀는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입니다.

    허황옥이 역사적인 첫발을 내디뎠던 망산도는 예전엔 뭍으로부터 몇 백미터 떨어진 용원 바다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바다가 대부분 매립되었고 망산도는 매립지 한쪽 끝자락에 닿을 듯 말 듯 붙었습니다. 그리고 망산도 너머로 잠길 듯 말 듯 보이는 바위섬은 그녀가 타고 왔다는 돌배의 흔적인 유주암(維舟岩)입니다.

    망산도는 이름에서부터 이미 아득한 기다림을 품고 있는 섬입니다. 불과 100여 평 남짓한 작은 섬이지만 망산도에는 사랑의 신화가 깃들 만한 신비로움이 있습니다. 망산도에서 가장 신비로운 것은 바위들입니다. 이 섬의 바위들은 주위에선 쉬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습들을 하고 있는데, 바위들이 모두 거북이의 등처럼 쩍쩍 갈라져 있습니다. 그런 바위들이 모여 이루어진 섬의 전체적인 모양새도 흡사 바다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한 마리 큰 거북이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망산도가 가락국의 국혼 신화를 품은 성소가 되었던 것은 아마도 이 거북 바위들 때문이라 짐작합니다. 바위들 가운데는 엄청나게 큰 알 모양의 바위도 있습니다. 바위는 반쪽으로 갈라져 있는데, 그 모습은 알에서 태어난 수로왕의 신화를 떠올리게 합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놓아라

    만약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아시다시피 수로왕을 맞이하며 부르는 구지가(龜旨歌)는 거북이 노래입니다.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아무튼 거북이는 가장 신성한 존재이자, 사람들의 간절한 염원에 응답하는 존재입니다. 또 달리 바닷가 사람들에겐 바다와 뭍의 경계를 넘으며 용왕님과 사람을 이어주던 고마운 존재기도 했습니다. 거북이 얘기를 하다 보니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

    어릴 적 나는 바다에서 큰 거북이 한 마리가 마을로 걸어올라 오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다. 그날 마을 어른들은 큰 대야에 가득 막걸리를 부어주었는데, 거북이는 그 술을 다 마시고 천천히 바닷속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문득 망산도에 앉아서 그날 바다로 돌아간 거북이 한 마리를 기다려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 인생에 더 이상 거북이가 오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내가 어느 날부터 거북이에 대한 기다림을 까마득히 잊고 살았던 때문일 것입니다. 하여 나는 저물녘까지 거북이를 기다리며 망산도에 앉아 있었습니다. 거북이는 오지 않았지만, 나는 앞으로도 계속 기다려 보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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