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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을 가다] 작가와 떠나는 경남 산책 (39) 배한봉 시인이 찾은 거제 14번 국도 동백꽃길

너무 붉어 가슴 저린 봄

  • 기사입력 : 2013-03-21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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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학동동백군락지와 팔색조 서식지. 동백과 팔색조 보호를 위해 동백 숲으로 들어가는 길은 모두 철망으로 막아놓았다.
     
    도로 옆으로 효자 전설이 있는 윤돌섬이 보인다.
    구조라 삼정마을 입구 동백꽃 너머로 호수처럼 열린 바다 건너 내도와 외도가 보인다.
    학동그물개 오솔길. 동백꽃들이 산책로에 떨어져 있다.
    봄기운 만끽하려는 상춘객들이 학동몽돌해변에 삼삼오오 모여 있다.
    학동그물개 바닷가 풍경.


    봄날은 왔다. 새빨간 불을 일으키며 왔다. 거제도 동남쪽 14번 국도에 그 봄날이 활활 불타고 있다. 이른 봄 빈번하게 일어나는 산불이 아니다. 불의 진원지는 동백꽃. 밀려온 봄기운에 꽃봉오리 마구 터트린 동백꽃이 해안 국도를 따라 쪽빛 하늘과 쪽빛 바다마저 선홍색으로 물들이고 있다.

    거제 동백꽃길은 장승포동 옥림삼거리에서 시작해 거제의 남쪽 끝 홍포 해안도로까지 이어진다. 길 중간중간에 구조라해수욕장, 망치몽돌해변, 학동흑진주몽돌해변, 천연기념물 제233호 학동동백나무군락지, 명승 제2호 거제해금강 등 볼거리도 수두룩하다.

    봄이 되면 동백은 꼭 만나야 하는 숙제 같은 것. 꼭 한 번은 만나고 싶은, 만나면 가슴속 어떤 이야기라도 다 들어줄 것 같은 꽃. 그래서 그런 것일까. 동백, 하고 이름 부르면 가슴이 애틋해지고 무연히 서러워진다. 아, 너무 붉어서 가슴 저리는 꽃 동백.

    나와 동백의 첫 만남은 가수 이미자의 노랫말에서였다. 어릴 때 어머니가 자주 흥얼거리던 노래 ‘동백아가씨’를 들으며 나는 동백꽃이란 참 아픈 꽃이라는 생각을 했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아파하면서 울던 동백아가씨의 그리움 때문에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다는 서러운 사연이, 뜻도 모르는 어린 아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삼켜버리곤 했던 것이다.

    구조라마을 입구 국도변에서 나는 ‘동백아가씨’ 한 소절을 입에 물고 가만히 동백꽃잎을 어루만져 본다. 햇볕을 받아 따뜻하다. 반쯤 핀 동백꽃은 갓 시집온 색시처럼 수줍은 듯 잎 뒤에서 빼꼼히 나를 보고 있다. 나는 봄을 품은 채 뚝 떨어진 붉은 동백꽃 한 송이를 손바닥 위에 올려 가만히 감싸본다.

    동백꽃 너머로 수정마을 상동마을로 이어지는 구조라마을길이 쭉 이어져 있고, 바로 코앞에 거제의 명품 섬으로 불리는 내도 외도가 보인다. 완연한 봄기운 때문일까. 구조라마을 입구 동백들은 이미자 노랫말 속 동백아가씨의 서러움보다 한창 물이 올라 마구 타오르는 꽃의 찬연함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 송찬호가 동백을 보고 “마침내 사자가 솟구쳐 올라/ 꽃을 활짝 피웠다./ 허공으로의 네 발/ 허공에서의 붉은 갈기”(‘동백이 활짝’에서)라 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수정마을 쪽에서 구조라해수욕장 방향으로 가는 길에는 동백 가로수 아래 노란 수선화가 지천으로 피어 있다. 연못 속에 비친 자기 얼굴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물속에 빠져 죽은 미소년 나르시스의 전설도 생각나고,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수선화에게’에서)고 했던 시인 정호승의 시도 가슴에서 피어난다.

    수선화 노란 빛깔이 붉은 동백과 어우러져 도로 건너 윤돌섬 숲(경상남도 기념물 제239호)을 비추고 있다. 3400평 되는 윤돌섬 이름은 윤씨 성을 가진 아들 3형제가 홀어머니가 편안하게 바다 건너 마을로 다닐 수 있도록 큰 돌로 징검다리를 놓아주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 효자 전설 앞에서 나는 자꾸 가슴이 먹먹해진다.

    학동몽돌밭은 흑진주몽돌이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작고 새까만 몽돌로 이뤄진 해변으로 물이 깨끗해 관광객들로부터 해수욕장으로 인기가 높다. 이곳은 해돋이 명소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거제에는 이곳 외에도 몽돌로 이루어진 해수욕장이 여러 곳 있다. 망치몽돌해수욕장, 여차몽돌해수욕장, 해금강 근처의 한목몽돌해수욕장 등이다.

    학동흑진주몽돌해변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바닷가 길을 걸으면 그물개오솔길에 닿는다. 그물개는 학동해변이 그물을 펼쳐놓은 형상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나무로 만든 산책로에 몇 송이 뚝뚝 떨어진 동백꽃이 다시 붉게 피고 있다. 떨어져 다시 땅에서 핀 꽃이 되는 동백의 마술. 자연의 힘이 아니고서는 보여줄 수 없는 전율이요 신비로움이다. 숲은 아름답게 이어지고, 소나무와 동백나무가 짙푸르게 어우러진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잔잔한 바다가 마음 가득 싱그러움을 안겨준다. 이 오솔길은 바다와 맞닿아 있다.

    그물개오솔길에서 조금 더 걸어가면 만나는, 학동마을 서쪽에 있는 노자산에서 다대리에 이르는 능선 남쪽 비탈면 숲이 학동동백나무군락지(천연기념물 제233호)이다. 학동몽돌해변에서 걸어서 20분 정도면 가 닿는다. 학동동백나무군락지는 팔색조 서식지로도 유명하다. 동백숲으로 들어가는 길은 모두 철망으로 막혀 있다. 동백과 팔색조 보호를 위해 여행객들이 출입할 수 없도록 해놓았다.

    철망 너머 동백나무숲은 초록이 짙다 못해 검은빛을 띠고 있다. 꽃들이 새빨갛게 만개했으나 큰 바람이 없어서 그런지 숲에는 떨어진 꽃들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검은 머리에 붉은 꽃을 피운 여인들이 웅성웅성 무리지어 서 있는 것 같다. 나는 가까이서 동백을 들여다본다. 잎은 고무나무잎처럼 두꺼우면서 광택이 나는 진초록이지만 뒷면은 노란빛이 나는 초록이다. 선홍색 꽃잎에 짙노란 꽃술을 가진 꽃의 원색 대비가 강렬하게 눈을 찌른다.

    14번 국도는 인도가 없는 편도 1차선 도로여서 나는 그물개 방향으로 조금 되돌아가 바닷가로 내려간다. 바닷가는 굵은 몽돌과 거대한 바위들이 뒤엉켜 색다른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바닷가에서 본 비탈언덕은 경사가 심하고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동백나무들이 빽빽하게 서 있다. 숲은 어두컴컴하다. 어두컴컴한 속에서 동백꽃은 더 선연하게 붉은 빛을 자랑한다. 그 동백꽃을 가끔씩 시퍼런 바다가 때리고 간다. 그러니까 학동의 동백나무들을 키운 것은 거제의 푸른 바다와 바람과 햇빛, 그리고 울퉁불퉁한 바위 드러난 험준한 비탈언덕이 꽉 움켜쥐고 있는 저 검은 흙이다.

    나는 귀를 기울인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안 보이는 팔색조의 모습 대신 팔색조 소리라도 듣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숲에서는 동박새 울음이 먼저 여행객을 맞이한다. 툭! 툭! 동박새 푸르륵 날아오를 때마다 동백꽃송이 땅에서 다시 피는 소리도 같이 여행객을 맞이한다. 뭍에서 온 발길에 그 동백꽃 밟힐까 신경이 쓰이는지 동박새는 직박구리까지 데려와 동백숲을 울음으로 뒤흔든다.

    학동 동백숲은 바람의 언덕과 해금강이 보이는 지점에서 끝이 난다. 그러나 해금강에도 홍포해안도로에도 동백은 숲을 이루고 있다. 몽돌들과 부딪치는 파도소리를 친구 삼아 걸으며 선홍색 동백꽃이 쓴 편지를 읽는 시간은 마치 나를 위해 세상 모든 것이 존재하는 듯하다.

    추운 겨울에 핀다고 동백(冬柏)이라 불리는 꽃. 하지만 봄은 이렇게 동백과 함께 왔다가 얼마 있지 않아 또 그렇게 동백과 함께 지나가리라. 가장 아름답게 피었을 때 송이째 떨어져 화려한 색깔과 자태를 그대로 간직하는 동백꽃. 동백꽃은 쪽빛 바다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동백꽃길에서 고요한 파도소리를 들으며 멀리 바다로 배를 떠나보내는 항구를 보고도 눈시울 붉어지지 않을 사람 어디 있겠는가.

    거제 14번 국도 동백꽃길은 한국의 아름다운 도로 100선에 선정될 만큼 어디든 빼어난 풍광을 보여준다. 어디부터 볼지 망설일 필요 없다. 그냥 천천히 산책하듯 편안히 둘러보면 된다. 볕 좋은 3월 중순, 동백꽃 활짝 피어 14번 국도 전체가 불길에 휩싸인 것과도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당신이 이곳을 방문한다면 추운 겨울을 이겨낸 동백이 매혹적인 얼굴로 반겨줄 것이다.

    글·사진= 배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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