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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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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척번정 마을의 피에타- 조예린(시인)

  • 기사입력 : 2013-03-22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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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건이는 열여덟 살이다. 키 141㎝. 몸무게 29㎏. 어린이용 두 발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고 지나가는 뒷목덜미에 아직 솜털이 까맣다. 배냇솜털을 다 밀어내지 못할 만큼 체세포의 성장이 거세당한 탓일 게다.

    쩌르릉 쩌르릉- 경적을 울려가며 동건이가 앞서가는 길 끝머리에 연꽃공원의 척번정이 보인다. 척번정. 번뇌를 씻는 정자라…. 기대 반 의심 반으로 좁은 대에 오르니 눈앞에 보이는 것은 절반이 하늘이요 절반이 텅 빈 들이다. 봄비나 와서 연못이 차오르고 또 연잎이 새로 벋고 행여 수련들이 하얗게 주먹을 펼쳐 보이기까지 정자는 제 행색을 차리기에 겹다.

    새까맣게 연밥의 뿌리가 말라 있는 연못의 한복판으로 큼지막한 징검다리가 놓여 있다. 다듬지 않은 돌을 떠다 놓은 다리다. 동건이가 가리키는 진흙바닥 위에 민물 고둥이 한 마리. 걸음을 멈추고 들여다본다. 남은 돌다리를 마저 건너오다가 문득, 뒤를 돌아본다. 번뇌의 태반은 기실 ‘욕심’일진대, 욕심의 거죽을 벗겨내고 맑은 근심만 남은 근골로 성모의 얼굴을 닮아가는 한 어머니가 보인다. 척번정이 우르르, 내 곁으로 내려와 선다.

    어머니는 하루 네 번 손으로 복막투석을 한다. 기계투석을 하기에는 동건이가 너무 약하고 또 노폐물이 잘 제거되지 않기 때문이다. 노폐물이 충분히 걸러지도록 손동작으로 천천히 삼투압을 일으키며 시간을 조절하는 것이다. 큰언니의 친구인 동건이 어머니를 그렇게 30여 년 만에 나는 다시 만났다. 열여섯 소녀 적 모습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던 나에게 이가 다 빠져버린 현재의 초상은 그저 ‘먹먹함’이었다. 더구나 방 하나를 차지한 한 달치 스무 박스의 투석액을 보자 그만 가슴이 뻐근해졌다. 그러나 그것은 섣부른 인습의 잣대였다. 동건이의 새까만 눈동자가 그것을 지적해 주었다. 그 눈동자 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은 태산 같은 평화였다.

    ‘아, 동건이는 천사구나!’

    나는 동건이 어머니가 동건이로 인해 세상에서 가장 죄 안 짓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동건이라는 ‘커리큘럼’이 아니고서는 인생이라는 ‘광야학교’를 건널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 많은 현자들이 지식과 지혜의 접경에서 왜 사막과 광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는가? 지식보다 높고 지혜보다 승한 무엇이 분명히 광야에는 있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직장을 버리고 서툰 농사꾼이 된 부부는 이제 제법 자급자족이 가능할 만큼 이력이 붙은 농부가 되었다. 토종닭이 병아리는 까는지 보려고 유정란을 그대로 닭장에 방치한 지 오래인 어느 날 동건이를 찾아갔다. 동건이가 일러주는 대로 닭장 앞에 쪼그리고 앉으니 수탉이 텃세를 하느라고 대낮인데도 쉬지 않고 목청을 뽑아댄다. 죽지를 털고 흙바닥을 파는 바람에 더 이상 염탐이 불가하다. 웃고 돌아 나온다.

    “이건 할미꽃인데….”

    동건이가 가리키는 곳에 정말로 할미꽃이 피어 있다. 너무도 오래 잊혔던 풀꽃이다.

    “저기 비닐하우스 있는데….”

    올봄에 새로 만든 비닐하우스를 자랑한다. 이번 봄부터 블루베리를 심을 거란다. 블루베리 묘목을 보여준다. 처음 보는 보랏빛 묘목에 내가 감탄한다. 흐뭇한 표정을 짓는다, 동건이 말이다.

    동건이는 확실히 천사다. 동건이를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든다. 불평하는 마음이 생기다가도 감사로 역전한다. 그리고 저절로 기도하게 된다, 한낱 ‘행인’인 내가 말이다…. 죄를 모르는 새까만 눈동자가 생각나 오금이 저리게 기도하고 싶어질 때, 그때, 문득 나는 본다. 피에타! 내가 죽고 너를 살릴 수 있다면! 자신의 신장을 떼어주려고 온갖 방법을 찾아보았으나 수술 자체를 받아들일 체력이 안 되는 아들을 부둥켜안고 있는 어머니, 번뇌도 탄식도 다 씻겨 나가고 이제는 오롯이 그 생명을 수종들 근심만 남은 맑은 고뇌를….!

    조예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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