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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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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의 마을 아, 본향! (11) 창원시 진해구 대장동

“마을사람들 성은 달라도 단합 잘되고 우애 돈독”

  • 기사입력 : 2013-04-02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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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원시 진해구 대장동 전경, 마을 뒤편과 좌우로 산이 감싸고 있다.
    대장동 계곡은 여름철에 피서객들로 붐빈다.
    마을 입구에 위치한 주정원 효자비.
    성흥사 전경.



    좌우 산 감싸고 물 좋아 농사짓기 ‘안성맞춤’

    꽃밭등·득우대·대장천 등 주변 볼거리 풍부

    배명인 전 법무장관·배명국 국회의원 출신지

     
    마을입구 대규모 도로공사로 주변환경 변화

    아름다운 풍광 따라온 외지인 집 하나둘 늘어



    마을 입구에 도로 공사가 한창이다. 산허리와 맞추고, 본래 없던 길을 내는 공사라 규모가 엄청나다. 지반을 돋우기 위해 쌓아올린 흙더미와 굵직하고 높다란 교각이 위압적이다. 진해구 석동~신항, 김해 장유~웅동 등지를 잇는 국도라고 한다. 큰 길 두 개가 가로막은 형국이다 보니, 마을이나 이곳에 사는 주민들이 얼마나 숨이 막힐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잠깐만에 마을에 들어섰다. 둘러볼 것도 없이 한눈에 쏘옥 들어왔다. 불모산이 뒤를 막고, 좌우에도 산이 있어 마을은 두 손에 모은 물처럼 오목하다. 마을 사람들은 왼편 산을 짜구리골, 오른편 산을 양산이라는 정겨운 이름을 붙여 부르고 있었다. 논과 밭은 기름져 보였지만, 반듯하게 정리돼 있지는 않았다. 일괄 경지정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층이 진 들판에는 파릇한 파가 봄볕을 즐기며 촘촘히 서있다. 양옥이 몇몇 보이기는 했지만, 슬레이트 지붕을 인 오래된 집들이 태반이다. 집들은 평범한 모양새로 자리 잡고 있지만, 까맣게 변한 오래된 돌담들이 지나온 세월을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창원 진해구 대장동(大壯洞). 이곳은 과거와 현재, 또 불안한 미래가 혼재하고 있었다.

    마을 앞 큰길이 완성되고 나면 과거와 현재는 서서히 퇴색돼 갈 것이다. 불현듯 누군가의 고향이자, 생활의 터전, 또 삶이 녹아 있는 이곳의 모습을 대충이라도 남겨야 되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과거와 현재를 더듬어 보기 위해 마을 중간에 자리한 노인회관을 찾았다. 오랜 친구였고 또 이웃인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둘러앉아 마늘을 까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을 유래에 관해 귀동냥을 해야 했다. 희미한 추억을 더듬어 지나가듯 한마디씩 보탰기 때문이다.

    노인들은 대장동에 사람들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달성서씨, 신안주씨, 전주이씨들이 한 무리씩 모여 살면서 마을을 이뤘다고 한다.

    뒤로 또 좌우로 산이 감싸고 있지만, 골도 깊고 들판이 널찍해 농사 짓기 좋은 환경이었단다. 또 가까이에 바다(영길만)가 있어 먹거리 구하기도 수월했다고 한다.

    구순을 막 넘겼다는 한 할머니는 “물이 좋은 데다 골이 깊어 도랑이 마르지 않아 농사 짓기에 좋았지. 인근 바닷가 마을과는 달리 조용하고 예의범절을 중시했다”고 회상했다.

    옆 할머니는 “성씨가 다른 사람들이 한데 모여 살았지만 단합도 잘되고 우애가 돈독했지. 한 집에 경사가 나면 동네 전체가 잔치를 벌이는 훈훈함이 전통처럼 내려왔지”라고 말을 보탰다.

    주 씨 후손인 한 할아버지는 ”효자 효부도 많이 있어 나라에서 효자비도 세웠다. 또 본래 토박이는 아니지만 배 씨 집안에서 인물이 많이 났다”고 말했다.

    효자비는 주정원(1871~1939) 효자비를 가리키는 것으로, 부친에게 효행한 주 씨를 웅천읍 유림들이 추천해 비를 건립하게 됐단다.

    또 배 씨 집안 인물은 배명인 전 법무장관과 배명국 국회의원 등을 일컫는 것이다.

    김대근 이곳 노인회장에게 대장동의 정확한 근대 이력을 들을 수 있었다.

    대장동은 원래 웅천군 동면에 속한 지역이다. 1908년(융희 2) 창원군 웅동면에 편입됐다가 1910년 마산부에 편입됐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의창군 웅동면 대장리가 됐고, 1983년 의창군 웅동면이 진해시에 편입돼 진해시 웅동면 대장리가 됐다. 1984년 진해시 웅동출장소에 편입되면서 진해시 웅동출장소 대장동이 됐으며, 1997년 웅동출장소가 폐지됨에 따라 진해시 대장동이 됐다. 이어 2010년 진해시가 창원시에 편입되면서 지금의 창원시 진해구 대장동으로 지칭되고 있다.

    이곳은 꽃밭등·범방산 등의 야산과 득우대·베리바우 등의 큰 바위, 골짜기인 소막골, 옛 마을인 대대목(일명 죽벽), 대장천과 금곡천 등의 하천이 흐르고 있다.

    김대근 회장은 “소막골은 소막을 치고 병든 소에게 약을 먹였더니 나았다는 데서 유래됐고, 대대목은 대나무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며 “또 골이 깊은 탓인지 바위와 돌이 많아 담벼락을 돌을 이용해 쌓았다”고 밝혔다.

    김 회장은 이어 “배 씨 집안 외에도 장성(將星)이 많이 배출됐고, 이곳 출신은 아니지만 마을 뒤편 성흥사(聖興寺)에서 공부한 사람들 중 출세한 사람이 많다고 들었다”며 “때문에 성흥사는 대장동 계곡과 함께 마을의 큰 자랑이다”고 덧붙였다.

    성흥사는 대장동 계곡을 따라 마을 뒤쪽 산(팔판산) 아래 자리하고 있다. 범어사 말사(末寺)로 신라시대 833년(흥덕왕 8년)에 무주(無住) 무염(無染)이 구천동에 창건했다. 창건 당시 승려 500여 명이 머물렀던 큰 규모였으나, 1109년(고려 예종 4년) 화재로 소실된 뒤 대장동으로 옮겨 중창했다. 그러나 1668년(조선 현종 9년) 화재가 다시 발생해 구천동으로 옮겼다가 1789년(정조 13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중창했다.

    성흥사 창건에 관해 설화가 전하고 있다. 826년(흥덕왕 1년) 이 지방에는 왜구의 피해가 극심해 왕이 몹시 근심했는데 왕의 꿈에 백수노인이 나타나 지리산에 있는 도승(道僧)을 불러 왜구를 평정하게 하라고 당부했다.

    왕은 곧 사신을 보내 도승을 모셔 오게 해 간절히 부탁했다. 도승이 팔판산 위로 올라가 한 손에 지팡이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자신의 배를 몇 번 두드리니 뇌성벽력이 천지에 진동해 왜구들은 신라 군사들의 함성으로 착각하고 달아났다.

    그 도승이 곧 무염으로, 왕은 무염에게 재물과 전답을 시주해 절을 창건하게 했다고 한다.

    노인들은 성흥사도 대장동 계곡도 중요하고 자랑스럽지만, 무엇보다 마을 본래의 모습이 퇴색돼 가는 게 안타깝다.

    여느 시골마을처럼 젊은이들이 외지로 다 떠나 생기를 점차 잃고 있다. 대신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풍광을 따라온 외지인 집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최근에는 인근 공단에 근무하는 외국인 근로자들도 마을 주민이 됐다.

    사람뿐 아니라 개발로 인해 마을 모습도 점차 변하고 있다. 이곳은 지난 2003년 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 개발지역으로 지정됐지만 2012년 지구해제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 와중에 마을 주민들의 마음에는 깊은 생채기가 났다.

    웅동발전협의회 주홍중 회장은 “개발이 조용했던 마을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들쑤셔 놓았다. 주민들은 개발의 이익이 아니라 오히려 그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며 “엄청난 변화의 충격을 완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방안들이 강구돼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50~6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 뒤편 야트막한 언덕에 오르면 바다(영길만)가 한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지금의 신작로도 공장들도 없던 시절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멀리 바다를 내려다보며 지친 마음과 몸을 추스르고 또 꿈을 키워 갔을 것이다.

    당시의 영길만 모습은 이곳 태생 이일윤(필명 용일)이 작사하고 이미자 씨가 노래한 ‘황포돛대’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마지막 석양빛을 기폭에 걸고 / 흘러가는 저 배는 어데로 가느냐 / 태풍아 비바람아 불지를 마라 / 파도소리 구슬프면 이 마음도 구슬퍼 / 아 어데로 가는 배냐 어데로 가는배냐 / 황포돛대야 // 순풍에 돛을 달고 황혼 바람에 / 떠나가는 저 사공 고향은 어디냐 / 사공아 말해다오 떠나는 뱃길 / 갈매기아 울지마라 이 마음이 서럽다 (후렴).’

    이제 마을 언덕에서 영길만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다른 옛 모습들도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마을을 떠날 때쯤 한 노인이 주문처럼 말했다.

    “사람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나면 뉘라서 마을 얘기를 들려줄까. 천천히, 반듯이 변하도록 지켜야 하는데….”


    글= 이문재 기자

    사진= 김승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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