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20일 (토)
전체메뉴

경남의 마을 아, 본향! (13) 남해군 창선면 적량마을

쪽빛 바다 그림같은 풍경
눈길 끌고 발길 붙잡는 곳

  • 기사입력 : 2013-04-16 01:00:00
  •   
  • 남해군 창선면 적량마을은 아침 햇빛이 온 마을을 따뜻하게 비춰준다는 뜻의 해비치마을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적량진성을 나타내는 비석(왼쪽)과 남해 창선 선정비.
    마을 주민들의 안녕을 지켜준다는 국사당.
    고사리를 채취하고 있는 주민들.
    적량마을에 취항한 유람선 늘픔호.



    아침 바다에 붉은 해 뜬다고 해 赤梁마을

    조선시대 왜구 침입 막아낸 전략적 요충지

    임란 땐 봉화 올려 이순신 장군 승전 도와

     
    어촌·농촌 특성 고루 갖춰 체험마을 운영

    고사리 따기·동물농장·뗏목 낚시 등 인기

    마을주민 삶의 흔적 묻은 ‘고사리밭길’도



    남해군 창선면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4㎞ 정도를 달려 고사리밭 언덕배기 고갯마루에 ‘해비치 적량마을’ 표지판을 지나자, 눈앞에 펼쳐지는 망망대해의 탁 트인 에메랄드빛 바다의 풍광에 ‘와!~’ 하는 함성이 절로 터져 나온다. 아침이면 바다에서 붉은 해가 불끈 솟아 오른다고 해서 마을 이름을 적량(赤梁)이라 지었단다.

    적량마을 뒷산에는 국사봉(國祀峰)이 있는데, 매년 섣달 그믐날이면 제기와 제물을 모두 새것으로 해 국태민안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마을의 개들이 짓지 못하게 가두고, 아기 낳을 산모들은 모두 이웃마을로 보낼 정도로 엄하게 모셨다. 또한 외적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성을 쌓았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봉화를 올려 이순신 장군의 승전에 크게 공을 세우기도 했다. 남해에서는 화목하게 제일 잘사는 동네로 꼽힌다고 하니 아마도 국사봉 할배의 덕이 아닐까.

    남해군 창선섬의 동쪽 끝에 있는 적량마을 곳곳에는 천혜의 자연환경과 더불어 조선시대 전략적 요충지로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다양한 흔적들이 있다.

    이제는 적량마을이라는 이름보다는 ‘해비치마을’이라는 이름이 더욱 익숙한 이곳은 지난 2007년 농림수산식품부의 녹색농촌체험마을로 지정되면서 해마다 6000여 명(2011년 말 기준)의 사람들이 방문하는 꽤 알려진 마을이 됐다.

    해비치라는 마을 이름에서 벌써 일출이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창선섬 동쪽에 위치한 까닭에 아침 햇빛이 온 마을을 따뜻하게 비춰준다. 적량마을 주민들은 매년 새해 아침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과 함께 해돋이축제를 벌이는데, 특히 사량도와 수우도 사이에서 떠오른 아침 햇살이 이제는 담장으로 변해버린 성벽을 붉게 물들이는 것을 보고 있으면 고단했던 역사의 흔적을 함께 느낄 수 있다.



    ◆마을의 역사

    적량마을은 조선 초기부터 진(鎭)이 설치됐던 유서 깊은 마을이다. 적량진은 왜구를 막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그 역할을 500년 이상 이어왔다.

    적량진이 설치된 시기와 관련된 명확한 문헌은 없으나, 진양지(晉陽誌)에 ‘옛적에는 창선도의 남쪽에 있더니 지금은 창선도 동쪽으로 옮겼다. 무슨 일로 진을 옮겼는지 알지 못하겠으나 진을 옮길 때 옛 진소(鎭所)에서 태어난 세 살짜리 아이가 만력(萬曆·중국 연호) 계미(癸未·선조 16년)에 새 진터에서 101살로 죽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성종 16년(1485년)에 진을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마을 곳곳에는 성벽 일부가 남아 있다. 특히 적량성을 지키기 위해 굴항을 파고, 병선 등 선박을 감추어 두기도 했는데, 지금은 농토로 개간돼 있다.

    임진왜란 때에는 왜적을 방비하는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적량만호 권전이 통제사 이순신의 아장(亞將)으로 활약하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패하자 배설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도주하다가,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적량성을 불태우고 떠났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다.

    마을 뒷산 국사봉은 그리 높지 않은 봉우리인데도 맑은 날이면 거제도까지 훤히 바라보이는 전망을 가지고 있어, 임진왜란 당시 왜적의 침입로를 차단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곳에는 국사당이라 불리는 사당이 하나 있는데, 주민들은 이곳에 마을의 수호신이며 주민들의 안녕을 지켜주는 산신령 격인 국사당 할아버지가 있다고 믿고 있다.

    마을사람들이 국사당 할아버지에게 한 해 한 번 올리는 제사는 엄격하고 신성시한다. 동제가 있기 전에 마을에 초상이 나면 동젯날을 새로 받을 정도이고, 젊은이가 군대를 갈 때에도 반드시 국사당 할아버지 앞에 절을 올리고 갈 정도이니, 주민들에게 얼마나 국사당 할아버지가 신앙화돼 있는지 알 수 있다.

    마을 앞에는 절충장군 김정필 첨사의 선정불망비가 세워져 있다. 이 비는 김정필 공이 수시로 피폐한 빈민을 구휼한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원래 성의 입구에 세워졌으나, 대부분이 농토나 택지로 개간되는 과정에서 후손들이 마을회관 앞으로 이전해 보존하고 있다.



    ◆체험 마을로 인기

    어촌과 농촌의 특성을 고루 갖춘 적량마을은 영농체험과 바다체험을 모두 함께할 수 있다.

    봄이면 마을 뒷산의 부드러운 고사리 순을 수확하는 체험을 즐길 수 있으며, 다랑이논에 피어나는 유채밭을 배경으로 추억에 잠기는 낭만까지 선물받을 수 있다. 또 마을에서 직접 운영하는 농장은 사계절 체험이 가능해 사슴과 닭, 오리 등의 동물들이 체험객을 반갑게 맞이한다.

    마을 앞바다에서는 오는 6월까지 전통어구인 들망을 이용한 도다리 잡기와 야간 붕장어 낚시를 체험할 수 있다. 마을에서 직접 채취한 전복, 홍합, 소라 패각을 이용한 나전칠기 체험도 적량마을에서만 즐길 수 있는 이색체험이다.

    특히 최근에 새롭게 정비된 뗏목 위에서 낚시체험까지 할 수 있으며, 지난 5일 취항한 29t 규모의 유람선 ‘늘픔호’에 오른다면 물건항과 통영의 사량도와 수우도, 두미도 사이를 오가며 남해바다의 매력에 빠질 수 있다.



    ◆대표 특산물은 고사리

    이맘때부터 적량마을 곳곳에서는 수확한 고사리를 말리고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일찍이 어선어업이 발달했던 적량마을이지만, 최근에는 고사리 농사가 새로운 소득원으로 자리 잡은 까닭에 마을주민의 절반 이상이 고사리 농사를 짓고 있다. 멀리서 보면 녹음이 우거진 산세 사이로 마치 겨울 잔디같이 연갈색으로 뒤덮인 언덕에 세상 구경을 하려는 듯 여린 고사리가 머리를 내밀고 있는데, 지천으로 깔린 고사리로 ‘노다지’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연상될 정도다.

    20여 년 전부터 창선면 동부지구를 중심으로 재배돼 온 고사리는 최근에도 재배농가가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수확 시기가 4~6월로 농사가 크게 바쁘지 않은 농한기로 인력수급이 쉽고, 국내 유통 80% 이상을 중국산 고사리가 차지하고 있어 경쟁력이 있다.



    ◆고사리밭길

    적량마을에서 시작해 동대만 휴게소까지 이르는 14㎞의 고사리밭길은 적량마을 사람들의 삶이 진하게 녹아 있다. 산과 밭으로 거미줄처럼 이어진 고사리밭길은 척박한 자연환경을 극복하며 살아온 마을 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묻어 있다.

    남해사람들은 척박한 환경에서 바다를 생명으로 여기고 물때에 맞춰 갯벌과 갯바위 등에서 해초류와 해산물을 캐는 것을 ‘바래’ 간다고 하는데, 고사리밭길도 척박한 자연환경을 극복하며 살아온 남해사람들의 삶의 무게가 담긴 바래길 가운데 하나다.

    고사리밭길은 남해의 바래길을 공통된 특성이라 할 수 있는 농촌과 어촌의 풍광을 번갈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바다가 전해주는 갯내음과 대지가 전해주는 여린 고사리의 생명력을 동시에 느낄 수 있어 해마다 이곳을 찾는 도보여행객들이 증가하고 있다.


    글·사진= 김윤관 기자 kimyk@knnews.co.kr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김윤관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