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19일 (금)
전체메뉴

[경남을 가다] 작가와 떠나는 경남 산책 (43) 유홍준 시인이 찾은 함안 군북 마애석불·백이산 공룡발자국

1200년 전 새긴 ‘인간의 소망’
9700만년 전 내디딘 ‘절멸의 길’

  • 기사입력 : 2013-04-18 01:00:00
  •   
  • 보물 제159호 방어산 마애약사삼존불./유홍준 시인/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45호 백이산 공룡 발자국./함안군 제공/


    ◆군북 마애석불

    마애(磨崖)란 석벽에 불상이나 글자, 그림 따위를 새기는 것을 말한다. 전국에 마애는 엄청나게 많이 분포하고 있다. 사람들은 왜 바위에다가 하염없이 무엇을 새기려 했던 것일까?

    오후 3시 반. 함안군 군북을 향해 길을 떠난다. 진주시 문산읍을 지나자 곧 방어산이 보인다. 방어산은 이름 그대로 병란(兵亂)을 방어했다는 산으로 함안군 군북면과 진주시 지수면의 경계 역할을 한다. 동남쪽에 여항산과 백이산, 동북쪽에 삼봉산이 솟아 있어 마치 함안의 초병 같기도 한 산이다.

    전설에 따르면 양쪽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려 날아다니며 300근짜리 활을 쏘는 묵신우(墨神祐)라는 장군이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이 산에 성을 쌓고 성문을 닫아 건 채 한 달을 버텨 적을 물리쳤다고 한다. 지금도 방어산 정상에는 그 성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방어산 정상 조금 아래에는 흔들바위가 있는데, 그 흔들바위는 서쪽 진주 사람과 동쪽 함안 사람들이 서로 자기 쪽으로 바위를 기울게 해 놓으려고 했다는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싶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 흔들바위가 기울어진 쪽으로 부자가 난다는 속설 때문이었다는 것. 하긴 지수면 청운리가 LG그룹 구인회 창업주의 고향, 정암다리 건너 의령이 삼성그룹 이병철 창업주의 고향, 동쪽 군북 땅이 효성그룹 조홍제 창업주의 고향이니 헛말이 아니었던 듯도 싶다.

    방어산을 지나 곧 군북. 나는 여명삼거리를 지나 하림리로 접어든다. 이미 두어 번 와봤으니 헷갈릴 게 없다. 마애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는 주저 없이 산길을 올라간다. 보물 제159호 마애약사삼존불까지는 500m. 이정표에는 그렇게 새겨져 있지만 그거 믿으면 안 된다. 결코 만만치 않은 가풀막이고 일러주는 거리보다 훨씬 더 멀다.

    마애약사삼존불은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것으로 높이 약 4m의 변성암 절벽에다 선을 파서 새긴 것이다.

    이 삼존석불 가운데 본존불은 약사여래부처이다. 잘 보면 약병을 들고 서 있는 걸 알 수 있다. 약사란 무엇인가. 인간세계의 병으로 생기는 고통을 씻어주는 부처.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다 예외 없이 늙고 병들고 죽는다. 약사여래불은 그다지 생동감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우울해 보이기까지 한다. 차라리 오른쪽 월광보살의 얼굴과 맵시가 훨씬 더 부드럽다. 왼쪽 일광보살의 형상이 훨씬 더 씩씩하고 멋지다.

    하여간, 월광보살 팔꿈치 부근에 정원(貞元) 17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방어산 마애불은 정확한 연대(신라 애장왕 2년·801년)를 알 수 있다는 측면에서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아무도 없는 절벽 앞에서 나는 바위에 새겨진 그 불상을 한참을 올려다보았다. 몹쓸 병과 씨름하는 어머니가 생각났지만 나는 손을 모으지는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마애석불을 보고 내려오는 길, 산 밑 절 도량에 까마귀떼가 가득하다. 한 마리 두 마리가 아니다. 꽃잎 스러지는 벚꽃나무에 앉아 후다닥 후다닥 요란들을 떨고 있다. 흩날리는 벚꽃잎 속에 내려앉는 까만 까마귀떼! 나는 황급히 카메라를 꺼냈다. 저 독특하고 멋진 장면을 잡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의 낌새에 민감한 새들. 오후 5시의 하늘로 날아오르는 까마귀떼를 나는 그저 황홀하게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까마귀야 안녕. 나는 명관리 공룡 발자국을 보러 가야 한다. 마애사를 내려와 생육신 어계 조려의 생가 쪽으로 방향을 잡았고 원북마을 채미정 앞에서 좌회전, 지금은 폐선이 된 경전선 철도 건널목을 건너 작은 고개 하나를 넘었다. 제법 규모가 큰 저수지 하나가 나타난다. 그 저수지를 계속 끼고 돌면 명관리다.


    ◆백이산 공룡발자국

    저만치 명관리 동구에 숲 하나가 보인다. 양졸숲이다. 그러나 거기까지 가면 안 된다. 오른쪽을 유심히 보아야 한다. 그래야 ‘공룡 발자국’이란 안내판을 만날 수 있다. 아니면 저수지 내려서자마자 오른편 그럴 듯한 기와집 한 채가 보이는데 그곳으로 가면 된다.

    그 기와집은 도천재(道川齋)다. 도천재에는 아주 소중한 자료 하나가 남아 있는데 나는 그 이름이 무척이나 맘에 들었다. 단서죽백(丹書竹帛). 유형문화재 제56호다. 대나무 바탕의 비단(竹帛)에 붉은 글씨(丹書)로 쓰여져 붙여진 명칭이다. 인조 2년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삼등(三等) 진무공신(振武功臣)에 봉해진 이휴복(李休復)에게 임금이 내린 교서다. 이휴복은 인천이씨로 순천군수를 지냈다. 도천재 안마당에는 자목련이 붉게 피어 있었다. 나는 자꾸 그 자목련이 단서죽백으로 읽혔다.

    도천재를 지나 좁은 내(川)를 끼고 골짜기를 향해 가면 이내 또다시 작은 저수지 하나를 만난다. 비포장이고 좁고 험하다. 승용차는 아예 대들지 않는 게 좋다. 저수지 중간쯤에 작은 안내판이 하나 서 있는데 ‘공룡 발자국’이다.

    헷갈린다. 직진? 아니면 왼쪽? 나는 왼쪽 길을 택한다. 겨우 경운기나 트럭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이다. 하지만 열다섯 살 먹은 내 코란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울퉁불퉁, 아이쿠 그런데 막다른 길이다. 잘못 왔나? 커다란 무덤 앞에 나는 어리둥절해 한다. 차를 세우고 골짜기 쪽으로 가 본다. 아닌 거 같다. 헷갈린다. 모르겠다. 이 깊은 산속에 공룡 발자국이라니!

    이상하게 무덤 쪽에선 자꾸 향냄새가 난다. 싸구려 향냄새다, 나는 이 냄새를 무척이나 싫어한다. 무덤 옆 대나무밭엔 부러지고 썩은 대나무들로 엉망진창이다. 갑자기 기분이 영 이상해진다. 나는 무덤 앞 겨우 차를 돌릴만한 곳에서 후진과 전진을 반복해 되돌아 나왔다. 다시 저수지 옆 안내판 앞에 섰다. 모르겠다, 도대체 이 깊은 산골 어디에 공룡 발자국이라니. 정말로 있기는 한 건지!

    시계를 본다. 5시 40분이다. 아이쿠, 나는 6시 반에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약속 하나를 잡아놓은 터였다. 포기를 하자. 나는 서둘러 진주를 향해 길을 잡는다. 그렇다. 단번에 찾지 못하는 이 깊은 산속 첩첩오지의 공룡 발자국이란 얼마나 매력적이고 흥미진진한가. 이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문에 쓸 사진을 찍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나는 그것보다는 대번에 찾아내지 못한 공룡 발자국에 대한 아쉬움과 궁금함이 훨씬 더 좋았다.

    2012년 2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45호’로 지정된 명관리 공룡 발자국을 처음 먼저 발견한 사람은 아랫마을 이영부 마금자 씨 부부라 한다. 평소 등산을 좋아해 백이산과 맞닿아 있는 집 뒤쪽 덤불숲을 정리해 등산로를 개설해보자고 했고, ‘태산암’ 근처에서 휴식 중 움푹 파인 자국이 있는 것을 발견, 삽과 괭이로 꼬박 사흘을 흙과 덤불로 우거진 주변을 수습했고 마침내 고성 상족암보다 훨씬 더 형체가 또렷하고 밀집된 공룡발자국을 찾아냈다고 한다. 이들 부부가 발견한 공룡 발자국은 무려 100여 개.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환희와 전율을 느꼈다 한다.

    태고의 베일을 벗은 명관리 공룡 발자국 화석지에 대해 국내 지질학 분야의 교수들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이 쏟아졌고 야외학술 지표조사와 화석복제(탁본)가 이뤄졌으며 마침내 보고서를 발간, 그 가치를 입증했다고 한다. 게다가 한 방송사는 이 명관리 공룡발자국 화석을 특집으로 방영해 한국방송대상 특종상을 받기도 했단다.

    이런 과정들을 거쳐 문화재로 지정된 ‘함안 명관리 공룡 발자국’은 총 3곳이다.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 618번지, 산 59-1번지, 산 60-1번지. 이 공룡 발자국은 중생대 백악기 지층인 ‘함안층’ 상부의 퇴적층에서 발견된 것들로 함안층은 붉은색의 이암과 응회질 사암이 반복적으로 섞여 있는 게 특징이다. 9600~9700만 년 전 초식공룡이 낮은 호수 주변의 부드러운 펄을 시속 500m 이내의 속도로 천천히 걸어가면서 남긴 발자국이 굳어져 암석이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백이산 4부 능선의 태산암에 분포한 화석지는 작게는 7t에서 25t에 달하는 다섯 종류의 공룡이 노닐던 곳으로 밝혀졌다. 특히 고성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고 섬세한 발자국이며 보행열이 이렇게 고른 건 국내에서 거의 유일하단다. 한 부부의 발견으로 세상에 알려진 공룡 발자국 화석지. 부부는 그 후 화석지 주변에 크고 작은 돌탑 50여 개를 쌓아 또 화제를 낳았다 한다. 누구의 지원도 없이 오로지 부부가 그 돌탑 쌓기에 전념했다는 것. 하여간 흥미로운 것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약속 시간에 쫓겨 되돌아 나왔지만 이번 초행길에 공룡 발자국 화석지를 못 보고 온 것은 어쩌면 나에게는 더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한동안 내 머릿속엔 이 공룡 발자국이 끊임없이 찍힐 것이고 그러면 내 머릿속도 공룡 발자국 화석지가 될 것이니까 말이다.

    생로병사에 시달리는 인간이 그것으로부터의 근심을 덜고자 새긴 함안 군북 방어산의 마애석불과 거대한 동물이 멸종의 길로 걸어간 백이산 공룡 발자국 화석지. 그것들은 나에게 소망과 무능함과 절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 귀중한 자산이었다.


    글·사진= 유홍준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