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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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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비경 100선] (14) 함안 무진정

옛 시간 품은 봄의 풍경
푸른 암벽 위에 앉은 정자

  • 기사입력 : 2013-04-18 01:00:00
  •   
  •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 무진정. 정자를 둘러싸고 있는 고목과 연못이 운치를 더한다.


    아름드리 고목에 둘러싸인

    천여 평의 아담한 연못은

    조그만 섬과 돌다리가 운치를 더하고

    주세붕 선생의 기문은 백미로다



    점점이 불타는 숯가루

    바람에 날리고 연못에 비치니

    사월 초파일 낙화놀이는

    정녕 인간세상이 아니어라.



    봄볕이 등을 떠밀어 따사로움 속에 녹아드는 4월 중순, 온갖 경치가 모여 있다는 무진정을 구경하기 위해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로 향했다.

    함안IC를 나와 우회전한 후 함안대로를 따라 10분 정도를 달리면 무진정에 닿을 수 있다. 가야읍 시가지를 지나면 길가의 은행나무 가로수가 운치를 더하고, 가로수길이 끝나는 지점의 오른쪽에 보이는 숲이 무진정이 있는 곳이다.

    1542년 완공된 무진정은 조선 초기의 소박한 형태를 지닌 대표적인 정자로 푸른 암벽 위에 높이 솟은 형태가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삼도(三島)의 자주빛 비취색 같은 좋은 경치와 통하고 십주(十州)의 노을빛보다 낫다. 맑은 바람이 저절로 불어오고 밝은 달이 먼저 이르니 반걸음을 옮기지 않아도 온갖 경치가 모두 모여 진실로 조물주의 무진장이라 하겠다.’



    지금으로부터 471년 전인 1542년 6월 여름, 풍기군수를 역임한 주세붕 선생이 지은 무진정의 기문 중 일부분이다.

    무진정에 대한 설명은 주세붕 선생의 글 중에서도 백미로 일컫는 기문에 비할 것이 없다.

    ‘성산의 왼쪽 갈래가 꿈틀거리고 뒤틀고 해 서북쪽으로 굽어서 성난 말 같은 기세로 고을의 성을 에워싸고는 동쪽으로 맑은 시내에 이르러 목마른 용이 물을 마시고 고개를 치켜드는 것 같은 곳의 산마루에 집을 지은 것이 무진정’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주위의 풍경을 한눈에 보는 듯하다.

    큰 냇물이 남쪽에서 흘러오는데 물굽이에는 맑은 거울과 같고, 돌아 흐르는 곳은 구슬 띠와 같아 부딪칠 때는 패옥(佩玉·왕과 왕비의 법복이나 문무백관의 조복(朝服)과 제복의 좌우에 늘이어 차던 옥) 소리가 난다고 했으나, 오늘날은 물길이 바뀌어 연못이 조성돼 있다.

    무진정을 지은 조삼 선생은 1473년 태어나 1489년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무오사화를 일으킨 유자광을 주벌하자는 상소를 올려 세상을 놀라게 했다.

    1507년 문과에 급제했고 함양, 창원, 대구, 성주, 상주의 다섯 고을 목사를 지냈으나 관리가 차츰 편을 가르는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돌아왔다.

    공부할 때부터 서책 이외에는 마음을 두지 않았는데, 1587년 편찬된 함주지에 계집종이 아침상을 차려도 먹지 않아 다시 내오고 점심도 마찬가지였는데 해가 져서야 아침상을 찾았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선생은 7형제 중 세 번째인데 선생을 포함해 세 사람은 문과, 두 사람은 무과, 다른 분은 생진과에 합격해 모두 요직을 역임했다.

    아버지 진산공이 한때 진주에 살았는데, 당시 진주 사람들이 진주의 남쪽 입구를 문안인사 오가는 함안조씨 7형제의 벌판이라 부러워했으며 오늘날 칠암동 동명(洞名)의 기원이 됐다고 전한다.

    한편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돌아온 후 얼마 되지 않아 옛 동료가 모두 을사사화에 희생됐는데, 그제야 사람들이 선생의 혜안에 감탄했다고 한다.

    기문에도 ‘천명을 알았기 때문에 능히 용퇴할 수 있었고, 용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능히 이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으니 정자의 경치도 무진하고 선생의 즐거움 또한 무진한 것이다. 무진한 선생의 즐거움과 무진한 정자의 경치가 모였으니 정자의 이름은 선생의 이름과 더불어 무진할 것이 분명하다’는 기록이 있는데 경치도 즐거움도 다함이 없으니 봄날에 가슴이 활짝 트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무진정 앞의 3300여㎡에 달하는 아담한 연못은 후손들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물길을 돌려 만들었는데, 연못 안에 세 개의 섬을 만든 후 가운데 영송루를 짓고 돌다리를 놓아 운치를 더하고 있다.

    이렇게 연못을 둘러싼 고목과 정자가 포근함을 느끼게 하는 무진정은 평소에도 많은 사람이 찾지만, 그 이름을 더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낙화놀이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된 함안낙화놀이는 매년 사월 초파일에 무진정에서 열리는데, 연못 주위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불붙은 숯가루가 바람에 날리고 연못에 비치는 장관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음력 3월 중순 물오른 참나무를 흙구덩이에 넣고 일주일간 불을 지펴 숯을 만드는데, 이 숯을 가루가 되도록 곱게 간 후 한지에 말아 두께 1.5㎝, 길이 15㎝의 실을 만들고 두 개를 같이 꼬면 낙화타래가 완성된다.

    타래 2000여 개를 연못에 매달고 불을 붙이면 숯가루가 타오르면서 떨어지는 불꽃이 연못을 가득 채운다. 2시간 이상 진행되는 낙화는 잔잔하게 떨어지다 바람이 불면 우수수 떨어지며 하늘로 날아오르기도 해 무수한 숯가루 불빛이 반딧불이보다 더 영롱한 빛을 내면서 평생 잊지 못할 명장면이 연출된다.

    액운을 태워 없애고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함안낙화놀이는 조상의 지혜와 품격, 고유성을 인정받아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돼 있다.

    1889년부터 1893년까지 함안군수를 지낸 오횡묵 군수가 낙화놀이를 노래한 시가 세 편 전하는데 1890년에 지은 시를 소개한다.



    찬란한 산호 같은 등불의 장이 이날 열리니

    한 성의 화기가 사람을 뒤따라서 오는구나

    붉은 빛은 꽃이 피어 봄이 머무는 듯하고

    밝음은 별무더기 같아 밤은 돌아오지 않네.

    혹 바람이 불어 흐르는 불빛을 성글게 하더라도

    달이야 무슨 상관있어 한 점 구름을 싫어하리오.

    은혜에 젖은 지난날에 기이한 상도 많았으니

    멀리서 장안의 대궐을 바라보노라


    글=배성호 기자·사진= 성승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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