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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허권수 경상대 인문대학 한문학과 교수

“韓國人 뿌리 찾고 正體性 가지려면 漢字 알아야죠”

  • 기사입력 : 2013-04-30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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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권수 경상대 한문학과 교수가 경남신문 앞 용지공원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3000여 년 전 한자를 받아들여 문자생활을 해왔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하지만 1970년 한글전용정책이 시행된 후 한자를 배우지 않은 세대가 점차 구매력을 지닌 층으로 바뀌면서 1990년대 초부터 신문을 비롯한 출판물은 물론, 거리의 간판 등이 모두 한글로 바뀌게 됐고 이제는 우리 주변에서 한자를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됐다. 한자가 우리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시대에 살면서도 평생 한문을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한자의 학문화와 대중화에 몸바쳐온 허권수(61) 경상대 인문대학 한문학과 교수를 만났다.


    그는 우리나라 한문학계 태두인 연민(淵民) 이가원 선생을 사사한 한문학의 거두다.

    경상대 국어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한국학과 한문학전공, 성균관대 대학원 한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경상대 남명학연구소장, 한국한문교육학회 부회장, 우리한문학회 회장, 성균관 전학(成均館 典學), 도산서원(陶山書院) 재임(齋任) 등을 역임했으며 연민학회(淵民學會) 회장, 한국고전번역학회 부회장, 중국화중사범대학(中國華中師範大學) 역사문헌연구소 겸직교수 등을 맡고 있다.

    지난해 2월에는 각계각층 인사 350여 명이 뜻을 모아 허 교수 개인의 학문연구와 학술활동을 돕기 위한 모임인 연학후원회(硏學後援會)를 결성했다. 정치인의 후원회는 흔하지만 교수 개인 후원회는 처음이다. 허 교수는 극력 만류했으나 한문학의 부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회원들의 열렬한 성원으로 후원회가 탄생됐다.

    ‘조선후기 남인과 서인의 학문적 대립’ 등 70여 종의 저서·역서(譯書), ‘권필한시연구’ 등 논문 70여 편을 발표했다.

    저서 ‘절망의 시대, 선비는 무엇으로 사는가’는 2012년 경남도 인재개발원이 도민들이 읽어야 할 ‘경남인의 도끼’ 100권으로 뽑혔으며 2001년 4월 문화관광부로부터 이달의 책에 선정되기도 했다.


    ◆한문에 미친 학창시절

    1952년 함안에서 태어난 허 교수는 어려서부터 신문과 책 읽기를 좋아했다. 당시에는 한자 3000자 정도 알아야 신문을 제대로 읽을 수 있었는데 모르는 한자를 만나면 숙부나 형님에게 물어서 한자를 익혀 나갔다. 법수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신문 읽는 데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한자를 많이 알았다. 한자를 알고 독해력이 향상돼 학교 공부가 너무 쉬웠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농민교재에 소개된 단군신화를 읽고 재미가 있어 국사에 빠졌다. 혼자 읍내 서점에 가서 여러 종류의 고등학교 국사참고서를 샀다. 항상 보자기에 싸 다니면서 수없이 반복해서 읽다 보니 우리나라 역사의 주요 사건과 인물을 줄줄 외웠다.

    국사를 공부하다 보니 한문을 꼭 알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중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한문공부를 시작했다. 책가방에 항상 옥편을 넣어 다니면서 앞에서부터 보고, 또 뒤에서부터 보면서 어떤 글자가 몇 페이지에 있다는 것을 알 정도로 한자 2만여 자를 모두 외웠다.

    초등학교 졸업할 때 상으로 받은 국어사전에 나오는 고사성어를 다 뽑아 모아 직접 책으로 만들기도 했다. 친구들은 그에게 ‘한자 귀신’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한자는 많이 알았지만 한문책의 문장 해석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마산고 1학년 때 연세대 이가원 교수에게 한문문법을 가르쳐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고등학생의 편지를 본 이 교수는 친절하게도 자신이 지은 ‘한문신강(漢文新講)’을 읽어보라는 답장을 보내왔다. 방학 때 ‘한문신강’을 열 번 정도 읽으니 웬만한 한문책은 읽을 수 있고 간단한 글도 지을 수 있게 돼 이 교수에게 한문으로 편지를 보냈다. 그 뒤로 계속 한문편지 왕래를 하며 평생 사제지간의 인연을 맺었다.

    한문신강에서 ‘한한사전(漢韓辭典)이 있어야 한다’는 글을 보고 마산의 한 서점에서 4만5000 한자를 수록한 대한한사전(大漢韓辭典·張三植 저)을 구입했다. 1968년 당시 대한한사전 가격이 5000원으로 고등학교 학비 10달치여서 할머니는 못 사준다고 했으나 ‘이 책이 없으면 죽겠다’며 5일간 단식한 끝에 손에 넣었다.

    좋은 사전이 있으니 이제 숨어서 1년간만 한문을 공부하면 한문도사가 되겠다 싶어 고교 2학년 때 휴학을 하고 고향으로 가서 오로지 한문공부에만 매진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한문실력을 갖췄다.



    ◆중대장의 스승이 된 일등병

    고교 졸업 1년 후 입대한 군대에서도 한문책을 놓지 않았다. 일등병 때 새로 부임한 중대장이 왼손 주먹과 한문 실력은 대한민국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허 교수와 대화를 나눠보고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중대장이 일주일에 6일간 하루 5시간씩 공부하겠다고 해 그의 한문스승이 됐다. 최근에 다시 만난 중대장은 군대 시절 써 줬던 한문교재를 40년간 소중히 간직했다가 갖고 와 허 교수를 놀라게 했다.

    한문만 읽어서는 안 되고 학문을 체계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군대 제대 1년 뒤 동기들보다 8년 늦게 대학에 진학했다. 친구들은 직장에 다니고 결혼할 때도 오로지 학구열을 불태웠다.

    대학시절 대학원을 가야겠다고 결심했지만 경제적인 문제로 고민하던 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부설 한국학대학원 한국학과에 한문학 전공이 생겼다. 학비가 없고 장학금과 숙식을 제공한다는 말을 듣고 응시해 합격했다.

    대학원 재학중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교육을 받으러 온 신현천 경상대 총장이 고병익 정신문화연구원장과 식사하는 자리에 인사하러 갔다. 고 원장이 ‘이 학생 한문 정말 잘한다’고 소개하자 신 총장도 ‘나도 그 얘기 많이 들었다’고 했다.

    대학원 졸업 무렵 신 총장에게 인사하러 갔더니 ‘허 선생이 희망하면 경상대에 와서 가르쳐라’고 해서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대학 강단에 서게 됐다. 대부분의 교수들이 상당기간 시간강사나 중등교사를 거치는 데 비하면 행운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신 총장이 허 교수를 경상대로 초빙한 것은 한문학과를 개설하기 위해서였다. 신 총장과 후임 이정한 총장의 노력으로 1988년 한문학과가 생겼고 허 교수는 초대 교수가 돼 자신의 구상대로 학과를 만들어 나갔다.



    ◆습노즉신흠(習勞則神欽)

    1997년부터 10년간은 경상대 남명학연구소장으로 재직하면서(현재 고문) 학술집 ‘남명학연구’ 발간, 학술대회 개최, 남명과 제자 저서 번역 등으로 남명학을 정립하고 선양하는 데 기여했다. 많은 분들의 후원을 얻어 남명학 연구를 위한 ‘남명학관’도 학내에 건립했다.

    그는 학문연구, 저술활동 외에도 일반인들에게 한문의 필요성을 알리고 보급하는 일에 힘쓰고 있다.

    “우리의 정신적인 뿌리를 찾고, 전통문화를 이해하고, 우리 역사를 알고, 한국사람으로서 정체성을 가지려면 한문을 알아야 합니다. 배우기 어렵다고 한문을 내팽개치면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정신적인 어려움에 봉착하게 됩니다. 어릴 때 조금 한자를 배워두면 평생을 쉽게 살 수 있습니다. 한문은 보는 순간에 뜻이 통하기 때문에 한자 1000자만 알면 우리 말 10만 단어를 특별히 공부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 수 있으니 큰 도움이 됩니다.”

    2003년 4월 1일부터 경남신문에 ‘허권수의 한자로 보는 세상’이라는 칼럼을 연재하는 것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일반 사람들이 알기 쉬운 한자 풀이 같은 글을 써 보라’는 주위의 권유로 시작해 올해로 10년째다. 그동안 479회(30일 현재) 연재됐고 200자 원고지로 계산하면 5000매 정도의 분량이다. 해박한 지식과 수려한 문체로 사자성어의 뜻을 알기 쉽게 풀이한 그의 칼럼은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허 교수에게 교훈으로 삼고 있는 한문 구절이 있느냐고 묻자 주저 없이 ‘습노즉신흠(習勞則神欽·수고로운 일에 습관이 되면 귀신도 존경한다)’를 써 준다. 청나라에서 왕족이 아니면서 유일하게 후작(侯爵)까지 받은 증국번(曾國藩)이란 대신이 숨을 거두기 직전 아들에게 남긴 말로 ‘괴롭고 힘든 일을 피하지 말고 부지런히 노력하면 반드시 성공한다’는 뜻이다.

    그는 한문학 부흥과 인간성 회복을 위해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지금 세상은 윤리와 도덕이 타락하고 사람 사이에 갈등이 너무 심해 안타깝습니다. 사람답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질서가 잡히고 사람 살 만한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습니다.”


    글= 양영석 기자 yys@knnews.co.kr

    사진= 전강용 기자 jky@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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