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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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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김상진 창원지법 가사·민사조정위원장

“조정은 서로가 속내 털어놓고 이해하는 화해 과정”

  • 기사입력 : 2013-05-07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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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상진 창원지법 가사·민사조정위원장이 법원 청사에 걸린 ‘만민대로’ 작품을 보고 있다.
    의료분야 민사조정위원으로 도내 최장기간인 20년간 활동 중인 김상진 창원지법 가사·민사조정위원장이 그간의 애환을 설명하고 있다.



    창원지법 2층 24호실, 30여㎡ 남짓한 조정실 가운데는 입 구(口) 자 모양의 테이블이 놓였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피고 측과 원고 측 당사자가 각각 서로 마주보고 앉았다. 양측의 입장이 엇갈리는 탓인지 조정실의 공기가 무겁다. 상대를 향해 언성이 높아지며 오가는 말들이 고울 리 없다.

    김상진 창원지법 민사조정위원장은 "자, 진정하시고 피고 측은 잠시 나가서 기다리세요"라고 말했다. 냉정한 판단을 위해 먼저 원고의 말을 듣고 피고의 입장을 충분히 듣겠다는 의미다. 김 위원장은 원고 측으로 의자를 당겨 앉은 채 안경 너머로 원고를 따뜻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편안하게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법을 지키고 존중하자는 취지인 '법의 날'이 지난달 25일로 50돌을 맞은 올해, 의료분야 민사조정위원으로 도내 최장기간인 20년간 활동 중인 김상진 창원지법 민사조정위원장을 만나 법으로 모든 분쟁을 해결하려는 요즘의 세태와 경험을 들어봤다.


    민사조정위원이 되다

    김상진 위원장이 민사조정위원으로 발탁된 것은 지난 1994년의 일이다.

    김 위원장은 당시 창원에 병원이 별로 없던 탓에 민사조정위원 제의를 받고 흔쾌히 수락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에는 창원병원과 창원한서병원 정도밖에 없어서 당시 한솔의료재단 이사장이던 내게 제안이 들어왔다”며 “다른 의사들은 낮에 진료도 해야 하고 바빴기 때문에 내가 한가해 보였는지 민사조정위원 의사를 물어왔다”고 웃으며 말했다. 어쩌면 김 위원장에게 민사조정위원은 운명과 같았다. 1950년대 중반 6·25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부터 그는 약종상 일을 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의사의 꿈을 키워 갔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3남 2녀 중 김 위원장을 포함한 3형제가 현재 의료분야에 종사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의사가 되는 것을 의심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민사조정 절차는 민사재판의 전 단계로 피고와 원고의 동의하에 열린다. 조정절차는 법적인 강제 절차가 아니며 조정을 받아도 따르지 않을 수 있다. 불복하면 본안인 민사재판으로 넘어간다. 김 위원장은 “강제적인 절차도 아니고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도 아니지만, 본 재판보다 부담이 덜하기 때문에 피고와 원고가 비교적 말을 편하게 할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다”고 설명했다.

    김 위원장이 주로 담당하는 분야는 의료사고와 관련한 손해배상이다. 예컨대 의사와 의사 사이의 분쟁, 의료사고에 관한 전문조언 등을 맡고 있다. 그는 의료분야는 혼자 짊어져야 하는 책임 때문에 의견조율이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김 위원장은 “의사는 혼자서 판단해야 하는 직업이다. 개복(開腹)하고 장기를 1cm 잘라낼지 2cm 잘라낼지를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데 그 결정이 사람의 목숨과 직결된다”며 “혼자서 책임이 무거운 판단을 하다 보니 남의 말을 듣지 못하게 되고, 이것이 분쟁에서도 소통을 어렵게 한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시민으로서 의사로서 또 준(準) 법관으로서 사안을 다루기 위해 냉정해지려고 노력한다.


    냉정과 열정 사이

    김 위원장은 원고와 피고의 상황에 몰입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의사로서 또 사람으로서 냉정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은 일. 그는 구체적인 날짜와 장소 등을 제외하고 기사화해달라고 당부하며 몇 가지 경험을 전했다.

    부산의 A 외과에서 위내시경 검사를 받은 김모 씨는 조직검사 결과 위암 판정을 받고 같은 지역의 큰 병원인 B 병원으로 옮겼다. 김 씨는 병원에 근무하던 지인의 도움을 받아 병원으로 옮긴 다음 날 수술날짜를 잡을 수 있었다. B 병원은 외과 진료결과를 넘겨받고 종양제거 수술을 시행했지만 결과는 뜻밖이었다. 흔히 암으로 알려진 악성종양이 아닌 거대 양성종양이었던 것이다. 가족들은 멀쩡한 사람의 위 일부를 제거했다며 3억 원가량의 의료과실 소송을 제기했다. 병원 측도 어렵게 수술날짜를 잡고 시술했는데 환자 측이 문제를 제기했다며 배신감을 호소했다. 재판에 앞서 의사와 환자는 피고와 원고로 김 위원장 앞에 앉았다. 김 위원장은 고민에 빠졌다. 법적으로 B 병원의 과실은 없었지만 위의 일부가 제거된 환자와 가족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판단으로는 가족들은 재판에서 손해배상은커녕 소송비용도 고스란히 부담해야 했다. 그는 가족들에게 “환자분의 고통은 이해합니다. 안타깝지만 변호사 비용 400만 원만이라도 받을 수 있도록 설득하겠습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버티던 병원 측도 김 위원장의 의사로서의 경험과 어른으로서 조언에 동의하며 조정이 마무리됐다.

    김 위원장이 조정한 분쟁 중에는 민사조정도 있다. 형제간의 상속권 다툼도 그중 하나다. 부친이 사망하면서 남긴 재산을 상속받는 과정에서 상속대상에서 소외된 자녀 1명이 형제들을 상대로 자신의 지분에 대한 소유권 이전 등기를 청구한 사건이었다. 30㎡ 남짓한 조정실에는 형제들이 피고와 원고로 나뉘어 고성과 욕설을 주고받았다. 피고 측은 “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한 일이 뭐가 있냐?”며 따져 물었고, 원고 측은 “그러는 형도 잘한 것은 없다”며 으르렁거렸다. 김 위원장은 형제들을 앉혀 놓고 서로가 이야기할 때 가로막지 말 것을 당부하며 계속 들어줬다. 3시간 남짓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했을 뿐인데 형제들의 목소리가 점차 누그러들었고 어느 순간 조정실이 고요해졌다. 김 위원장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그것이 어쩌면 법적인 해결보다 오늘날 더 절실한 일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맹자(孟子)’의 이루(離婁) 편에는 중국의 성인(聖人)인 하우(夏禹)와 후직(后稷)에 대한 일화가 나온다. 하우는 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 자신이 치수를 잘못한 탓이라고 했고, 후직은 굶주리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이 일을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는 내용이다.

    김 위원장은 분쟁을 법적으로 해결하려는 세태를 꼬집으며 ‘역지사지’를 설명했다. 그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편견 없이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법원까지 찾을 일은 상당히 줄어든다”며 “사람들의 왕래와 소통이 뜸해지는 세상 탓이겠지만, 그런 문화와 분위기가 법적 분쟁까지 오는 걸 막아준다”고 말했다. 최근 휴대전화, SNS 등을 통해 소통의 창구는 다양해졌지만 나를 진솔하게 드러내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방법은 오히려 줄었다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법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 양 당사자 간 대결구도보다는 화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나중에 술 한잔 진하게 하자며 툭툭 털어버리는 것도 좋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조정은 화해의 절차라고 정의했다. 재판 전, 서로의 속내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고 이해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는 “아마 민사조정위원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과 한계도 그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 그런 점이 부족한 내가 법원을 오가는 이유다”고 말했다.

    글= 정치섭 기자 sun@knnews.co.kr

    사진= 전강용 기자 jky@knnews.co.kr


    ☞김상진 창원지법 민사조정위원장은

    1949년 8월 13일 창녕군에서 태어나 1973년 2월 조선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졸업 후 정형외과 전문의로 활동하다가 1988년 창원 한서병원을 설립했다. 이후 한솔의료재단 이사장, 사회복지법인 ‘조은’ 이사장, 한서재활요양병원 병원장 등을 역임했고, 지난 1994년부터 창원지법 민사조정위원으로 참여했다. 작년 초 창원지법 가사·민사조정위원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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