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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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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의 마을 아, 본향! (16) 통영시 명정동 명정골

이순신 장군 영령 모신 충절의 땅·박경리 문학의 산실
명정골은 충렬사 아래 우물이름 딴 지명

  • 기사입력 : 2013-06-04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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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포루에서 바라본 명정골 전경. 충무공 이순신 장군 사당인 충렬사와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이 살았던 곳, 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인 공덕귀 여사 생가 등이 명정골에 있다.
    통영 충렬사 정문.
    통영 명정골의 ‘하동집’ 일대. 과거에는 수십 칸의 큰 집이었으나 세월의 부침에 따라 지금은 쪼개져 개인주택이 들어섰다.
    충렬사에 보관된 명조팔사품 가운데 검 종류.

    충렬사 맞은편에 백석 시인의 ‘통영2’ 시비가 세워져 있다.
     
    통영 명정골의 일과 월의 우물, 정당샘이라고도 한다.
    서문고개 일대가 서피랑 쌈지공원으로 개발되고 있다. 최근에 세워진 서포루 전경.


    통영시 명정동 명정골은 충절의 고장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1598년 남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후 1606년 이곳에 충렬사를 창건했다. 명정골은 통영 도심지에서 구 충무시청 뒤편으로 진입하기도 하고 통제영에서 서문고개로, 무전동에서 산복도로로 진입할 수 있다. 서문고개를 넘으면 예사롭지 않은 숲과 마주친다. 절개의 상징인 대나무가 널찍이 펼쳐져 있다. 대나무도 왕대다. 홍송이 자태를 뽐내고 있고 활엽수들도 이순신 장군의 기개만큼 가지나 잎사귀도 푸르고 활달하다. 예부터 명정골에는 황후가 태어날 곳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 곳이다. 그런 탓인지 제4대 윤보선 대통령의 부인인 공덕귀 여사가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 마을 유래

    명정골은 지금의 명정동 일대로 충렬사 아래 두 개의 우물 이름을 딴 지명이다. 기존에 있던 우물을 조선시대인 1690년께 새로 중수했으며,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우물 2개와 빨래터가 유래다. 경남도 문화재로 ‘정당(旌堂)샘’으로 불리는 우물 중 위쪽의 우물은 일정(日井)으로 이 충무공 향사인 충렬사가 사용했고, 아래쪽 우물인 월정(月井)은 일반 민가가 각각 나눠 사용했다.

    이 우물은 사체나 상여가 지나가면 물이 흐려지는 이변이 생겨 지금도 이를 금하고 있으며, 햇빛이 들지 않아도 물이 흐려져 지붕을 설치하지 못하는 등 통영시민들에게 범상치 않은 샘물로 인식돼 있다. 이 우물은 박경리 선생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과 김춘수 시인의 ‘명정리(明井里)’, 일제강점기 시절에 통영에 잠시 머문 백석 시인의 ‘통영’ 등 문학작품의 배경이 됐다.

    명정골은 현재 서호동과 합병된 명정동이다. 2082가구에 4371명이 거주하고 있지만 명정골 인구는 그 절반이다. 

    ◆ 통영충렬사

    이 마을은 통영충렬사와 함께해 온 마을이다. 다시는 왜적의 재침이 없도록 조선 삼도수군통제영의 영구기지가 1604년에 두룡포(현 통영)에 건설되면서 이순신 장군의 영령을 단독배향(한 분만 모심)하고 역대 통제사가 국사(國祀·나라 제사)를 받들도록 왕명으로 지은 사당이다. 충렬사 정문에서 400여 년이 된 동백나무와 위풍당당한 강한루를 지나 충렬사 사당 사적 제235호 경내에는 정당, 동재, 서재, 충렬서원, 승무당, 중문, 외삼문, 유물전시관이 있다.

    1865년 서원철폐령 때에도 이 충무공 사당 가운데 유일하게 통영충렬사만은 제외, 존속시킨 유일 법통사당으로 1945년 광복을 맞아 이승만 대통령, 임시정부의 김구 선생을 필두로 많은 광복지사들이 환국 참배해 건국의 결의를 다지고 이어서 박정희 대통령, 김영삼 대통령,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도 치국의 염원을 남긴 유서 깊은 사당이다.

    통영충렬사에 보관된 팔사품(八賜品)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의 뛰어난 무공이 전해지자 명나라 임금인 신종이 충무공 이순신에게 내린 8종류의 유물 15점이다.

    동으로 만든 도장인 도독인을 제외한 다른 것들은 모두 2점씩으로, 영패, 귀도, 참도, 독전기, 홍소령기, 남소령기, 곡나팔 등이 있으며, 현충사 성역화 후에 진품을 가져갔으나 통영시민의 열성으로 충렬사로 되돌아왔다.

    ◆대문호 박경리(朴景利) 소설가의 문학 산실

    박경리(본명 박금이) 선생은 음력으로 1926년 10월 28일 통영시 명정동에서 박수명 씨의 장녀로 태어나 2008년 5월 5일 81세로 타계했다. 1945년 진주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55년 소설가 김동리의 추천으로 단편 ‘계산’과 1956년 단편 ‘흑흑백백’이 현대문학에 발표되면서 작가로서 본격적인 삶을 시작했다. 대표작으로 ‘토지’가 있고, 통영시 문화동 간창골이 주 무대인 ‘김약국의 딸’이 있다. 스스로를 반일주의자라고 말하는 선생은 월탄문학상과 인촌상, 한국여류문학상, 내성문학상, 금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했다.

    박경리 선생의 생가는 서문고개 부근이지만 그 이후 명정골로 내려와 공덕귀 여사의 집 건너편에서 살았다. 그는 여자로서는 불행한 삶을 살았다. 부모는 사이가 좋지 않아 아버지는 거의 나가 살았다. 훗날 그는 “나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경멸, 아버지에 대한 증오 때문에 극단적인 감정 속에서 고독을 만들었고 더불어 공상의 세계를 쌓았다”고 술회했다. 설상가상으로 전매청 직원과 결혼, 딸과 아들을 낳았지만 6·25전쟁으로 남편과 아들을 잃었다.

    박경리의 문학적 산실은 명정골이다. 입담이 좋은 외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와의 대화를 통해 김약국 집이나 이웃집인 ‘하동집’을 통해 문학적 토양을 만들었다.

    ◆ 하동집과 통영문화예술계의 산증인 수필가 제옥례 여사

    아흔아홉 살 제옥례 여사는 통영문화예술계의 산증인이다. 당대 최고의 학벌 집안에 태어나 교사에서 수녀로, 10명 아이의 어머니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 온 제 여사는 박경리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하동집’의 안주인이다. 조부는 승지 벼슬을 받은 통영의 갑부인 제기준이다. 아버지가 식산은행에 근무한 탓에 그 당시 유치원을 다녔고 호주선교사 집에서 신교육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글쓰기에 소질이 남달랐고 방정환 잡지에서 동시 ‘새벗’이 당선됐다.

    진주여고와 경성사범학교(서울대 사범대학 전신)를 졸업하고 황해도 천주교재단의 보통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죽음을 앞둔 하동집 부인으로부터 8남매의 새어머니를 구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당시 노기남 대주교와 고성성당 신부가 “수녀로 사는 것보다 어머니로 사는 것도 더 의미가 있다”는 권유에 따라 하동집 박 부자와 결혼해 두 자녀를 낳았다. 박경리 소설가의 어머니가 하동집의 바느질을 도맡아서 했고, 어린 박경리도 자주 어머니를 따라 하동집을 드나들었다.

    그런 탓에 대하소설 토지의 최참판댁 집 구조가 하동집과 같은 구조로 자주 등장한다. ‘수필집 겨울나그네’와 ‘한알의 밀알이 되어’를 펴냈다. 여성운동과 봉사활동에 여념이 없었던 그는 통영통제사 음식을 체계적으로 발굴 재현하고 있다. 

    ◆ 토영이야~길 제1코스

    토영이야길 제1코스인 ‘예술의 향기길’이 이곳 명정골을 통한다. “세계의 큰 문학은 고향에서 시작됐다. 예술인의 이름이 붙은 길을 걷는 것은 문화를 가까이 하는 길”이라는 박경리 선생의 말처럼 이곳은 문화예술의 감동을 체험할 수 있는 길이다.

    동피랑에서 ‘말뚝이(익살과 풍자로 양반들의 허위의식을 고발하고 서민들의 아픔을 대변하는 탈)가 안내하는 방향을 따라 세병관을 거쳐 명정골에 오면 이순신 사당, 소설가 박경리 생가, 윤보선 대통령 부인 생가, 백석 시인의 시비, 함안조씨 정려문, 정당샘, 나전칠기 송주안 생가, 두석장 김덕룡의 집, 박경리 소설의 뿌리 하동집 등 자연환경과 전통에 빛나는 문화유산을 두루 품고 있다.

    시인 백석(백기행·1912~1985)은 통영처녀 천희를 애틋하게 그리며 정당샘 앞에서 며칠을 기다리다 남긴 ‘통영2’ 시비가 충렬사 맞은편에 세워져 있다.

    백석은 현재 서울 길상사를 법정스님에게 기증한 자야와 염분이 있으며, 당시 고급요정 대연각의 주인인 자야는 법정스님에게 “1000억 원의 재산보다도 백석 시인의 시 한 줄이 더 낫다”고 말해 화제를 뿌렸다.

    백석 시비에서 100m 밑길에는 1883년 고종의 명으로 세워진 함안조씨 정려문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안내판만 붙어있다. 2년 전 본지가 ‘문화재 훼손 우려’라는 제목으로 보수가 시급하다고 지적했지만 후손들의 무관심으로 다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게 됐다.

    글·사진=신정철 기자 sinjch@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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