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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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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근의 우리땅 순례 (84) 황강 32 합천군 합천읍 죽죽비~함벽루

황강 맞댄 함벽루엔 조선 최고 문인들의 흔적이…

  • 기사입력 : 2013-06-19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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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강을 굽어보며 서있는 함벽루. 누각 처마의 물이 황강에 바로 떨어지는 배치로 유명하다.
    신라 충신 죽죽의 비.
    함벽루 암벽에 새겨진 송시열의 글씨.
    취적산 비석.
    연호사.




    호국보훈의 달 황강을 찾아가는 길에도 따가운 6월의 태양이 내리고 있었다.

    말 그대로 호국은 나라를 지킨다는 것이고, 보훈은 공훈에 보답한다는 뜻이다.

    6월은 나라의 존립과 유지를 위해 공헌하거나 희생한 국가유공자들을 예우해 국민의 애국정신을 함양하는 기간이다.

    일제강점기엔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고 1950년 6·25전쟁 때는 북한의 침략에서 국토를 지키는 등 나라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수많은 선열들이 목숨을 바쳤다.

    현충일을 하루 쉬는 공휴일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반문해 보고 싶다.

    호국보훈의 정신은 기념식을 하고 충혼탑이나 전적비를 건립해서 참배를 한다고 애국심이 길러지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젊은이들이 조국이 위기에 처하면 해외에서 공부를 하다가도?속속 귀국하는 것은 조국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신라충신 죽죽의 비·대야성

    6월은 죽은 송장도 누워 있기 미안해서 벌떡 일어나고 부지깽이도 일손을 도와주려고 날뛴다는 바쁘고도 바쁜 농번기이다. 황강을 찾아가는 도로변 들판에도 양파, 마늘, 감자를 수확하는 농부들의 손길이 분주했다.

    창녕군 장마면 남유리 마을 인근에서 탐스런 감자를 수확하는 황순복(53) 씨 부부를 만났다. 바쁜 농사철에 기행하는 것이 미안해서 감자 캐는 일을 도와주고 싶다고 했더니 마음씨 좋아 보이는 구릿빛 얼굴의 황 씨는 농촌 일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며 자신의 맡은 일을 하는 것이 가장 소중한 애국자라고 했다. 굵은 감자 3상자(상자당 21㎏)를 친지들과 나누려고 6만 원에 구입해 차에 싣고 떠나려는데 판매용이 안 된다는 작은 감자를 비닐봉지에 담아 건네주었다. 우리땅 순례 기행에는 늘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는 행복이 있다. 그들은 또 다른 나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가르는 적포교를 건너 합천군 청덕면으로 들어서면 4대강 개발사업 일환으로 조성해 놓은 낙동강변 자전거 도로가 들꽃 사이로 싱그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언제 만나도 정겨운 정양늪생태공원은 태고의 숨결을 가득 담고 침묵과 고요 속에 잠겨 있었다. 이따금 철새들의 비상하는 소리만 고요와 적막을 깨고 있었다. 늘어진 버드나무 사이에는 낚시금지 경고판이 있는데도 한낱 종이에 불과한 듯 고기를 잡는 강태공들의 유유자적 한가로운 모습이 보였다. 행정기관이 단속과 감시를 게을리하면 불법은 활개를 친다.

    정양늪생태공원에서 황강을 가르는 제2남정교를 건너면 왼쪽이 일해공원이고 오른쪽은 취적산에 충혼탑이 있다. 일해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호이다. 일해공원 내에는 3·1독립운동기념탑이 있다. 2004년 합천군은 경상남도 지원금을 받아 황강 옆 강변에 ‘새천년 생명의 숲’을 조성했는데, 합천군은 당시 심의조 합천군수 주도로 조례를 만들어 공원 명칭을 일해로 바꾸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우리 현대사에 남긴 상처는 작지 않다. 새천년 생명의 숲을 일해공원으로의 명칭 변경은 올바른 행동이 아니다.

    제2남정교 중간에서 유유히 흐르는 황강을 바라보다 취적산을 돌아가니 작은 비각 안에 신라충신 죽죽의 비가 있었다. 이것은 642년(신라 선덕여왕 11년)에 대야성에서 전사한 죽죽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대야성이 백제장수 윤충에게 포위됐고 이때 성주 김품석에게 아내를 뺏긴 검일이 창고에 불을 질러 성을 혼란에 빠뜨렸다. 전의를 잃은 김품석은 부하 죽죽의 만류를 뿌리치고 항복했다. 백제군이 항복하러 나온 사람들을 모두 죽이자 김품석도 아내와 자식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 죽죽은 남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백제군과 싸웠으나 당할 수가 없었다. 그는 “아버지가 나를 죽죽(竹竹)이라 이름을 지은 것은 추울 때도 시들지 않고, 꺾이더라도 굽히지 말라 함이다. 어찌 죽음을 겁내 항복하리오”라고 말하고 전사했다고 한다. 죽죽의 이런 충절과 용맹을 들은 선덕여왕은 그에게 급찬의 관등을 내리고 가족을 왕도에 살게 했다. 높이 1.4m, 폭 54㎝의 화강암 비석은 1644년(인조 22년) 합천군수 조희인에 위해 건립됐고 비문은 한사 강대수가 지었다. 1370여 년 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죽죽의 비를 보면서 역사는 진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야성은 죽죽비가 있는 취적산(해발 90m) 정상을 흙과 돌을 이용해 쌓은 성이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 때 백제와 신라 서부지방의 접경지대로, 신라 진흥왕 25년(565년)에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해 쌓았다 한다. 성벽의 길이는 300m 정도인데 대부분 훼손되어 원형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건물터와 적을 막기 위해 세운 울타리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증영 유허비·함벽루·연호사

    죽죽비를 지나면 양궁장이 있고 연호산장이 있다. 식당 앞에 차림표와 함께 ‘TV에 한 번도 안 나온 집’이라고 재치 있는 알림막을 걸어놓았다. 옆에 근래에 건축해 현판도 붙이지 않았고 단청을 하지 않은 연호사 일주문이 있다. 일주문을 넘으면 산비탈에 비석군이 있는데 눈길을 끄는 것이 이증영 유허비이다.

    그런데 안내판에는 유애비로 돼 있어 수정이 필요하다. 유허비는 ‘선현들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 그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고 유애는 ‘고인이 생전에 아끼던 물건’이라는 뜻이다. 비는 합천군수를 지낸 적이 있는 이증영(?~1563년)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문은 1554년에서 1558년까지 합천군수를 지냈던 이증영이 1554년의 극심한 흉년에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해 구휼하고, 청렴하게 관직생활을 했다는 내용이다. 비석은 조선 명종 14년(1559년)에 세워졌으며, 비문은 남명 조식(1501~1572년) 선생이 지었고, 글씨는 당대 최고의 서예가였던 고산 황기로 (1521~1567년)가 썼다. 이증영 유허비는 다른 여러 비석들과 함께 섞여 있어 구별하는 데 쉽지 않았다.

    발걸음을 옮기면 문외한의 눈으로 보아도 명당 중의 명당에 황강을 맞대고 함벽루가 사뿐히 앉아 있다. 함벽루는 고려 충숙왕 때에 처음 창건한 이래 여러 차례에 걸쳐 중건됐다. 오래전부터 많은 시인, 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는 장소로 이용되었는데, 이황, 조식, 송시열 같은 조선시대 당대 최고 이름난 선비들의 글이 누각 내부 현판에 걸려 있고, 뒤편 암벽에는 ‘함벽루’라 새긴 송시열의 글씨가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으로,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누각 처마의 물이 황강에 바로 떨어지는 배치로 유명하다. 누각 처마의 물이 황강에 떨어지는 날 마루에 앉으면 배를 타고 있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함벽루는 진주 촉석루나 밀양 영남루보다 더 오래된 정자로 규모는 작지만 건축물 배치의 높은 혜안에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후손들은 처마 밑으로 산책길을 조성하면서 지금은 자연과 아우러진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없다.

    함벽루 옆에 연호사가 있다. 종교적으로 보면 불교와 유교가 공존하고 있다. 연호사는 삼국시대 신라의 대야성에서 가장 풍광이 아름다운 남쪽 석벽 위에 지어졌다. 642년 백제의 침공으로 대야성이 함락될 때 전사한 태종무열왕의 딸 고타소랑과 장병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643년 와우 선사가 지었다고 한다. 연호사에는 폭 20.9㎝의 비단과 42.4㎝의 비단을 꿰매어 만든 신중탱이 있다. 비단 바탕 위에 제석천과 권속들을 묘사한 한 폭의 탱화이다. 색채가 약간 변색되어 있지만 보존상태는 대체로 양호한 편이다.

    (마산제일고등학교 교사·옛그늘문화유산답사회장)


    맛집

    ◆연호산장: 합천군 합천읍 합천리 206. 닭찜 2만8000원, 백숙 4만 원, 메밀묵·묵채 6000원, 땡초계란말이·부추부침 8000원. 현수막에 ‘TV에 한 번도 안 나온 집’이라는 문구가 더 익살스럽다. 읍내로 들어가도 휴일에는 변변한 식당을 찾기 어렵다. 마음씨가 후덕해 보이는 여주인은 음식 장만에도 거침없었다. ☏ 055)932-5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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