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25일 (목)
전체메뉴

경남의 마을 아, 본향! (19) 창원시 진해구 웅동 소사마을

진해군항의 100여년 역사와 유산 간직한 곳
1905년 일제강점기 군항 건설하며 마을 조성

  • 기사입력 : 2013-06-25 01:00:00
  •   
  • 일제가 군항을 조성하면서 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만든 웅동수원지에서 내려다본 마을 전경. 마을 뒤편으로 부산신항을 연결하는 국도개설사업이 진행되고 있고, 마을 어귀에는 아파트도 들어서 있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문학가 김달진 생가.
    돌담길이 남아 있는 김달진 문학관 옆으로 고랑길이 정겹다. 김씨박물관 담벼락에 일제시대의 풍경을 담은 사진이 전시돼 있다.
    석탄을 실어나르던 궤도차가 지나다닌 굴다리.
    우수기 웅동저수지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장관이다.


    생겨나고 늙고 병들고 소멸하는 소위 ‘생로병사’의 자연섭리가 생명체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우연히 또는 어떤 계기로 모여 조성한 마을에도 생로병사의 섭리가 엄연히 작동한다. 한때 100호가 넘게 살아 활기가 넘쳤던 농어촌 마을도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고 해가 갈수록 빈집이 늘면서 시나브로 허물어지고 있는 곳이 많다. 생로병사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마을’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싶다.

    창원시 진해구 웅동1동 소사 마을. 이 마을은 생겨난 지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100년이 조금 더 됐을 뿐이다. 일제에 의해 진해군항이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유래하게 됐다.

    조금 과장하자면, 오늘날 군사도시 진해의 시작점은 바로 소사마을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조선 근대기의 잔영(殘影)을 오롯이 보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장소 소(所), 모래 사(沙)를 쓰는 ‘소사’라는 지명은 <모래·자갈이 많았던 곳>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현재의 소사마을도 마을이 생기기 전에는 계곡물에 운반돼온 자갈·모래가 들판을 이룰 정도로 많았던 곳으로 추정된다.

    소사마을은 조선을 합병한 일본제국이 1905년 통감정치 시작과 함께 진해군항 건설을 본격화하면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즉, 근대기에 만들어진 마을이다. 마을의 터는 조선말 행정체계상 웅천군(熊川郡) 동면(東面)에 속한 지역으로 소사천의 기점이 되는 구천(九川)계곡의 하류였다. 일제가 진해군항 건설을 본격화하면서 군항과 시가지에 필요한 용수를 공급할 수원지와 전기생산지로 선택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1908년 소사수원지(현재는 웅동수원지로 개명) 공사가 시작될 시점에 이 지역에는 심등, 뒷골, 용잠, 댐뱅이, 들마을, 더머이, 안몰 등 7개 마을이 있었다. 일제가 수원지 공사를 위해 이 7개 마을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만든 마을이 지금의 소사다.

    따라서 이 마을에는 일제의 유산과 흔적들이 현재까지도 많이 남아 있다.

    마을 서쪽에 위치해 여전히 해군 수원지로 쓰이면서 철조망으로 접근이 차단돼 있는 웅동수원지가 대표적이다. 봄·여름에는 장마로 불어난 물이 수문을 넘어 7계단 폭포수를 이루며 장관을 연출한다. 마을에서 수원지 수문에 이르는 좁다란 길은 ‘연인의 길’로 불린다. 조선시대 때는 웅천현에서 김해부로 이동하는 주요 간선로였다. 주민들은 단오날 수문 폭포수를 맞으면 1년 내내 땀띠가 나지 않는다는 속설을 믿고 지금도 이곳에서 물놀이를 즐긴다. 농번기를 앞두고 마을주민들의 해치(봄놀이) 장소로 활용됐던 수원지 둑 아래 벚꽃장은 이제는 접근을 할 수 없는 군사통제지역 안에 들어 있어 아쉬움을 더한다.

    소사마을에는 조선 말 호주 최초의 선교사 데이비스 목사가 지나간 흔적도 있다. 데이비스 목사는 1890년 4월 3일 평밭고개를 넘어 웅천현과 김해부로 이어지는 길목에 위치한 소사주막에서 하루를 묵었으며, 다음 날 부산으로 떠났다고 한다. 그가 지나간 논길을 ‘데이비스의 길’이라 이름 붙여 놓았다. 당시는 웅동수원지가 만들어지기 전으로 우기 때마다 구천계곡 물이 범람해 넓은 소사지역이 모래·자갈밭으로 변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는 고작 3~4가구만 살았고, 웅천현에서 김해부로 넘어가는 고갯길과 진해 해안으로 가는 논길로 갈라지는 삼거리에 바로 소사주막이 있었다.

    김달진 문학관 옆에는 일제가 마을 화재를 감시하고 비상진화를 알리기 위해 세운 종탑과 그 거리를 일컫는 ‘종대걸’(종대거리)이 옛 그대로이다. 종대걸은 마을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 일제는 1913년 소사수원지를 완성하고 난 후 이곳 인근에 면사무소를 설치했다. 그리고 주변에는 생필품을 파는 점방과 한약방 등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다고 한다. 진해와 마산의 근대사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김씨박물관’ 김현철(59) 관장은 김달진문학관 인근 자신의 집을 개조해 당시의 주막과 사진관, 점방 등을 재현하고 각종 유물 등을 전시해 놓아 주말에는 많은 관람객이 찾아들기도 한다.

    소사마을 도랑을 따라 난 샛길을 일컫는 고랑길에는 아직도 돌담이 많이 남아 있어 근대 소사마을의 분위기를 간접적으로나마 맛볼 수 있다.

    웅동수원지가 완성된 후 1914년 소사마을 인근에는 화력발전소가 세워졌고, 증기터빈으로 진해군항에 공급할 전기를 생산했다. 여기에 연료로 사용될 석탄을 진해 황포돗대(흰돌매)에서 웅동수원지 펌프실까지 ‘까시랑차’로 불리는 궤도차로 운반했는데, 궤도차가 지나다녔던 길을 ‘깜장길’(석탄을 실어나르던 궤도차 길)이라 불렀으며 아직도 그 흔적이 소사다리 하천부지에 ‘굴다리’로 남아 있다.

    소사마을에는 아파트도 일부 건립돼 375가구 16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어 큰 규모의 자연마을이다. 최근에는 인근 지역이 진해경제자유구역으로 편입되고 부산진해신항으로 물류도로가 사통팔달 개설되면서 마을이 물류도로에 포위되는 아픔도 겪고 있다. 생로병사의 ‘병’을 겪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진해와 마산의 근대사 발굴에 열정을 쏟고 있는 김현철 김씨박물관장은 “일제가 진해군항을 만들면서 도시에 필요한 물과 전기를 생산할 곳으로 소사지역을 택하면서 이 마을이 생겨나게 됐다”면서 “사실상 소사마을은 옛 진해시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글= 이상목 기자 smlee@knnews.co.kr

    사진= 성승건 기자 mkseong@knnews.co.kr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이상목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