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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을 가다] 전통 사찰 이야기 (10) 사천 다솔사

1500년 역사 간직한 도량… 우리나라 茶문화 발원지

  • 기사입력 : 2013-06-27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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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양루에서 바라본 다솔사. 가운데가 적멸보궁.
    다솔사가 차밭과 봉명산의 신록에 묻혀 싱그러움을 더하고 있다.
    대양루 왼편의 나지막한 계단.
    다솔사 주지 동초 스님이 차를 따르고 있다.



    숲은 밤새 내린 장맛비로 물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선선하면서도 온몸을 감싸는 습기가 청량감을 더한다.

    분명 숲을 관통해 만든 길인데도 본래 나 있던 길인 듯 어색하지가 않다.


    곧게 뻗은 소나무. 그 사이로 오르는 야트막한 산길은 주변 경치에 눈길을 팔고, 잡스러운 고민들을 곱씹으며 시간을 끌어봐도 채 20분이 걸리지 않았다.

    사천 다솔사(多率寺) 가는 길이다. 입구 주차장에서 절까지는 500m 남짓이다.

    나지막한 돌계단을 딛고 절에 들어섰다. 좁고도 낮다. 천년이 넘은 사찰이라고 해 널찍한 경내에 높다랗고 웅장함을 상상했건만,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게다가 변변한 탑 하나 보이지 않고, 나지막한 가람 대여섯 채가 이마가 맞닿을 듯 옹기종기 모여 있을 뿐이다.

    경내를 돌아보기 전 주지인 동초(東初) 스님을 만났다. 스님이 키우는 듯한 개가 짖으며 먼저 반겼다. 절에서 개를 만나다니, 생뚱맞았지만 살갑다.

    동초 스님은 차를 건네면서 “도량이 모양새는 볼품없지만 오랜 시간 동안 많은 고승과 독립운동가 등이 거쳐갔고, 한국의 차(茶) 문화가 발원(發源)된 의미있는 곳이다”고 말했다.

    스님과 인사를 나누고 일어섰다. 차 몇 모금에 정신이 한결 맑고 개운해졌다.

    다솔사의 역사는 ‘곤양 지리산 영악사 중건비’에 고스란히 기록돼 있는데, 비문 옆에 친절하게도 핵심부분을 쉽게 풀어 큼직하게 써놓았다.

    ‘남쪽 바다에 닿아 있는 곤명은 그 진산을 지리산으로 하는데, 수백 리 흘러 곤명 북쪽에 봉우리를 맺은 봉명산에 절을 세웠다. 문창후 최치원과 지영·능민 두 스님이 거닐며 즐기던 곳이다. 신라 지증왕 4년 계미년(503년)에 절의 역사가 시작됐으며 이름을 영악사(靈嶽寺)라 했다. 선덕여왕 5년 병신년(636년)에 자장법사가 중창(重創)하여 타솔사(陀率寺)라 했다.’(중략)

    비석은 숙종 30년(1704년)에 세웠다. 다솔사는 임진왜란과 6·25전쟁 때 화재로 소실되기도 했는데, 다솔사란 이름은 19세기 이후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다솔사는 이처럼 1500년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고찰이다.

    절 이름인 다솔은 소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지만, 이 절의 주산이 마치 대장군이 앉아 있는 듯해 군사를 많이 거느린다는 뜻에서 다솔(多率)이라 붙여졌다고 한다. 이곳에는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된 조선 영조 때의 대양루를 비롯해 극락전, 응진전이 있고 가까이에 보안암과 서봉암 등을 거느리고 있다.

    다솔사가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불자들의 순례지와 기도도량으로 신성시되는 이유는 적멸보궁(대웅전)에 모신 108과의 사리 때문이다. 지난 1978년에 대웅전 삼존불상에 금칠을 다시 하던 중 후불탱화 속에서 발견됐다. 이곳의 내력과 자장율사의 발자취를 따라 가면 부처의 진신 사리로 추측된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때 사명대사도 잠시 머물렀다는 얘기도 있는데, 남해안 일대에 왜구의 노략질이 심했고 곳곳에 승병이 조직된 것을 보면 영 틀린 추측은 아닐 것으로 여겨진다.

    다솔사는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 만해 한용운을 비롯해 김법린, 최범술, 김범부 등이 은거하며 항일 의지를 불태웠다.

    한용운은 요사채 ‘안심료(安心療)’에서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했고, 소설가 김동리 역시 1936년부터 1940년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김동리 선생은 산 아래에 야학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다. ‘등신불’ ‘황토기’ 등 대표작들이 이때의 체험이 바탕이 됐다고 한다.

    다솔사는 우리나라 차 문화의 발원지다. 다솔사를 창건한 연기조사나 의상대사, 도선국사 등이 모두 이름난 차승(茶僧)들로 알려져 있다.

    이때부터 주변에 차나무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정확한 기록으로는 1960년대 주지였던 효당스님(1904~1979)이 본격적으로 차밭을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효당 스님은 사천 출신으로, 1916년 다솔사로 출가해 만해를 당수로 하는 비밀결사인 만당(卍堂)을 조직해 독립운동을 했다. 1960년 이후 다솔사를 다시 찾아 원효사상과 다도(茶道) 연구에 전념했다.

    적멸보궁 뒤편을 중심으로 산 위쪽으로 3만3000㎡ 정도에 차나무가 가지런히 자리하고 있다.

    다솔사는 지난 5월 이곳이 한국 차문화의 발원지임을 알리고, 이에 걸맞은 위상을 정립하기 위해 ‘다솔사 차축제’를 처음으로 개최했다. 차 문화 고유 도량으로 조성하기 위한 첫걸음인 셈이다.

    돌아오는 길. 또다시 차를 버리고 숲길을 걸어 내려왔다. 은은한 솔 향기 속, 주지 스님 방에 걸려 있던 ‘다도무문(茶道無門)’을 떠올렸다. 차(茶)와 선(禪)은 불이(不二)이며 무문(無門)이다.

    갑자기 사방천지 경계 없는 길을 걷고 있는 듯했다.


    글= 이문재 기자

    사진= 김승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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