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18일 (목)
전체메뉴

경남의 마을 아, 본향! (20)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 원동마을

남명 조식 선생이 후학 가르친 ‘산해정’으로 유명한 마을
신산서원 부근 마을서 ‘원동’지명 유래
30가구 80여명 주민 과수·밭농사 지어

  • 기사입력 : 2013-07-02 01:00:00
  •   
  •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 원동마을 전경.
    원동마을 입구에 서 있는 용두바위.
    수령이 300년 이상으로 추정되는 당산나무.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 원동마을은 1970년 초반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돼 자연환경이 잘 보전돼 있는 자연마을이다. 주변에 높지 않은 산들이 마을을 감싸고 있어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을 준다.

    30가구 80여 명의 주민들은 매실, 키위, 산딸기 등을 재배하거나 밭농사로 생업하고 있다.

    대동면에서 교통이 가장 불편한 외진 곳이지만 조선시대 저명한 유학자인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이 과거공부를 포기하고 낙향한 후 창건해 18년간 후학을 가르친 산해정(山海亭)이 신산서원(新山書院) 안에 있어 역사를 전공하는 사람이나 관심 있는 관광객이 간간이 찾곤 한다.

    ◆신산서원 부근에 형성된 마을= 원동마을은 남명 선생을 모신 신산서원에서 연유하는 지명이다.

    <김해지리서>에 ‘서원곡(書院谷)이며 조식을 모시는 신산서원이 있었기 때문이다’고 표기돼 있다. 원동리의 원(院)은 한자말로 신산서원을 지칭하고 동(洞)은 훈이 ‘골’로 마을을 뜻하는 우리말 골을 표기하기 위한 차자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원동은 ‘원(院)골’의 표기이고 원동리는 원동에 리(里)를 붙여 말단 행정구역단위의 하나라는 사실을 표기한 것으로 ‘신산서원 부근에 형성된 마을’을 뜻한다.

    ◆마을을 둘러싼 산= 동쪽에 까치산, 서쪽에 돗대산, 북쪽은 복호산이 마을을 싸고 있다.

    돗대산은 예전에 차산(次山), 조차산(曺次山)으로 불렸다. 특히 차산(次山)은 남명의 아들 이름이다.

    남명이 22살에 남평(南平) 조(曺)씨와 결혼한 뒤 30세 무렵에 처가마을에 정착한 뒤 1남2녀를 뒀는데 44살 되던 6월, 9살이던 아들 차산이 죽자 돗대산에 묻었다 하여 이 산의 이름이 차산(次山), 조차산(曺次山)이라고 명명됐다고 한다.

    <김해의 지명>에는 ‘조차산은 아무래도 돗대산과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돗대산은 원래 돛대산일 것이다. 돛대산과 조차산의 자음이 유사했던 까닭에 돛대산에 조차산의 이야기가 부회(傅會)돼 조차산이 됐을 것이다. 조의 옛 자음은 ‘됴’였다. 돗대산은 돛대산으로 산지형이 낙동강 하구에서 보았을 때 돛대처럼 생겼다고 인식돼 생겨난 이름일 것이다’고 돼 있다.

    복호산은 호랑이가 누워 있는 형상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까치산은 전국적으로 흔한 산이름이어서 별다른 의미가 없는 듯하다.

    ◆마을을 지키는 세 수호신= 원동마을 주민들은 당산나무, 용두바위, 선달바위를 마을의 수호신으로 생각하고 있다.

    산해정 인근 평지에 우뚝 솟은 당산나무는 수령이 300년 이상 된 모과나무다. 흔히 보기 힘든 과실수 당산나무다. 예전에는 장정 3~4명이 못 안을 정도로 굵었는데 누군가 나무 구멍에 촛불을 피우고 기도하다 불이 나는 바람에 나무 일부를 잘랐다고 한다.

    주민 황태환(76) 씨는 “당산나무가 원래 돗대산 골짜기에 있던 절 경내에 있었는데 1959년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 사라로 돗대산이 무너지는 바람에 아래에 쓸려 내려와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말했다.

    마을 입구에 있는 용두바위는 용머리처럼 생겼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어른 키 두 배 정도의 커다란 바위 3개가 붙어 있다. 예전에는 조그만 바위까지 4개가 있었는데 1970년대 마을 진입로를 확장하면서 깨버렸다고 한다.

    복호산에 있는 선달바위는 직사각형 형태인데 고인돌처럼 작은 돌들이 받치고 있는 특이한 형상이다.

    주민들은 수호신 덕분에 여태까지 마을에 큰 우환이 없었다고 믿고 있다.

    1945년 대동면에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 다른 마을은 죽는 사람이 생겼지만 원동에는 감염자가 없었다고 한다.

    ◆남명이 후학 가르친 산해정=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125호인 산해정은 앞면 5칸, 옆면 2칸으로 추녀 끝을 올린 목조기와다. 앞부분의 기둥을 받치는 높은 주춧돌과 간지지를 엮어 진흙을 바른 침실 천장의 제작법이 특징이다.

    남명 연구에 평생을 바친 경상대 이상필 교수에 따르면 산해정의 창건 연대는 1530년으로 알려져 있지만 17세기 중반에 이뤄진 ‘연보’ 이외에 1차적 근거자료가 없다. 31세 때인 1531년 과거공부를 포기하고 위기지학에 전념할 결심을 하고 서울생활을 청산한 후 김해로 왔다. 따라서 32세 때인 1532년 때 창건됐다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

    1588년 감사 감수와 부사 양사준의 협조로 안희가 일을 주도해 산해정 동쪽 아래쪽에 신산서원을 창건했으나 임진왜란 때 모두 불에 탔다. 안희 등이 주도하고 부사 김진선의 협조로 1608년 착공해 1609년에 신산서원이 산해정의 유지에 다시 세워졌다. 1818년 신산서원 곁에 산해정이 복원됐다. 1871년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따라 신산서원과 함께 산해정이 훼철됐다. 1890년 신산서원 터에 산해정이 중건 복원됐다. 그 뒤 여러 차례 중수됐고 1998년 신산서원이 복원되면서 산해정이 서원의 강당이 됐다.

    신산서원은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문을 잠가두고 있으나 관람객이 전화를 하면 관리인이 달려와 열어준다. 이곳에서는 김해향교 대동지회 회원 10여 명이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 두 차례 분향하고 청소한다.

    신산서원의 맨 위쪽에 있는 숭도사(崇道祠)는 조식 선생과 송계(松溪) 신계성(申季誠, 1499~1562)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곳이다. 송계 선생은 조선 선조 때 유학자로 조식 선생과 교류했다. 과거를 포기하고 평생 은거하며 학문과 수양을 닦았다.

    ◆몰려오는 개발의 칼바람= 조용하고 평화롭던 이 마을도 개발의 칼바람을 비켜갈 수 없었다. 3년 전부터 마을 입구를 가로지르는 냉정~대동 간 고속도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마을 위쪽에는 골프장 조성이 추진되고 있다.

    주민들은 이런 개발사업들이 청정한 자연환경을 오염시키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황 씨는 “우리 마을은 진입로가 하나뿐이다 보니 범죄가 없고 물이 깨끗하고 공기가 맑아 주민들이 건강하게 오래 산다”면서 “바람이 있다면 이런 청정지역이 앞으로도 잘 보전됐으면 하는 것 하나뿐이다”고 말했다.

    글·사진 = 양영석 기자 yys@knnews.co.kr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양영석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