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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을 가다] 전통 사찰 이야기 (11) 진주 청곡사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 전설 깃든 천년고찰

  • 기사입력 : 2013-07-11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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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왕비 신덕왕후의 전설이 전해 내려오는 학영지.
    사찰 입구에 있는 느티나무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눈앞에 대웅전이 펼쳐진다. 대웅전은 1611년 이후 한 번도 해체·복원된 적이 없는 목조건물이다.
    영취산에서 설법을 하는 석가모니를 그린 국보 제302호 영산회괘불탱.


    압도적인 경이로움에 숨이 턱 막힌다. 위엄 있는 자태와 자비로운 얼굴이 그를 우러러 보게 한다. 길이 10.4m, 폭 6.4m 크기의 그를 보려면 지하 3층까지 내려가야 한다. 진주 청곡사(靑谷寺) 불교문화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국보 제302호 영산회괘불탱이다. 저절로 합장이 되고 고개가 숙여진다.

    겸재 정선과 동시대를 살았던 조선 후기 대표적 불화승 의겸이 10명의 화승과 함께 제작한 이 괘불은 영취산에서 설법을 하는 6m 크기 석가모니불상의 위엄 있는 자태 옆에 부드럽고 인자한 표정의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서고, 그 뒤로 여러 보살과 제자들이 함께 따른다. 화면 중심에 꽉 차게 배치돼 있는 석가는 얼굴이 둥글고 원만하며, 예배자의 시선을 의식한 듯 당당하게 표현했다. 두 어깨를 걸친 옷은 중후하게 묘사했고, 가슴 중앙에 ‘卍’ 자를 크게 그려 넣어 눈에 띈다.

    괘불은 원래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걸개그림을 말한다. 이때 야외에 설치되는 법단이 ‘야단’(野壇)이다. 괘불이 걸리는 날에는 사찰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붐볐다. ‘야단법석’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나왔다.

    그림 무게 114㎏이나 되는 이 대형 괘불은 어디에 보관할까. 길쭉한 괘불함에 넣어 두는데 거북이 자물쇠, 용머리 손잡이, 연꽃 동자들이 돋을새김된 앞바탕 등 장식도 구경거리다.

    300여 년이 지났음에도 나무의 틀어짐이 없이 훌륭하게 만들어낸 장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괘불의 화기에는 장인의 이름이 기록돼 있다. 길이 6m가 넘는 거대한 괘불함을 만든 장인이 ‘서선발(徐先發)’이란 사람이며, 당시 ‘나무를 다루는 장인’을 ‘목양공(木良工)’으로 불렀음이 기재돼 있어 흥미롭다.

    지난 2일 장맛비가 주춤한 새 청곡사로 향했다. 문산IC에서 5분 거리로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곳이었다. 주차장에서 절까지는 멋진 숲길이다. 마치 산림욕장의 산책로를 연상시킨다.

    평일이라 그런지 방문객들이 많지 않아 속세를 벗어난 듯 숙연한 분위기가 감돈다. 일주문까지는 걸어서 불과 5분 거리. 산새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전설을 가득 담고 있을 것 같은 자그마한 저수지가 보인다. 학영지라는 곳이다. 호수에 반쯤 잠긴 노송이 세월의 무게를 견뎌내며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 짙은 녹음이 호수 속으로 들어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학영지는 태조 이성계의 왕비 신덕왕후(청곡사 아랫마을이 고향)의 전설이 담겨 있다. 신덕왕후가 어릴 때 달밤이면 연못에 와서 맑고 깨끗한 물을 거울 삼아 비춰보기를 즐겨했는데, 자기 미모를 고고한 학으로 비유하고 자기 얼굴을 학의 그림자처럼 비췄다고 해 학영지라고 한다.

    청곡사에는 도선국사에 얽힌 전설도 전해져 온다. 신라 헌강왕 5년(872년) 도선국사(827∼898)가 진주 남강에서 푸른 학이 이곳 월아산 기슭으로 날아와 앉자 성스러운 기운이 있다 해 청곡사를 세웠다 한다. 청곡사 입구에 있는 방학교(訪鶴橋)가 그 전설을 뒷받침해 준다.

    청곡사도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다. 고려 우왕 6년(1380년)에 중수했으며, 조선태조 6년(1397년) 신덕왕후의 원찰이자 비보사찰로 상총 스님에 의해 중창됐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선조 35년(1602년)에 계행, 극명 두 스님이 다시 중수했고, 광해군 5년(1612년)에는 고명 스님이 불보살님과 보물 제1232호인 제석천왕과 대범천왕을 새롭게 조성했다. 현종 2년(1661년)에는 인화 스님이 업경전 10왕을 조성했다. 또 경종 2년(1722년)에는 국보 제302호인 괘불탱화가 조성됐으며, 조선 말기에 포우 대사가 대대적인 중수를 했으나, 6·25 전란에 대부분 소실되고 2000년부터 서강 스님이 대대적인 중수를 해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청곡사 도명 스님은 “지금의 청곡사 대웅전은 광해군 4년(1611년) 이후 한 번도 해체, 복원된 적이 없을 정도로 오래된 목조건물이며,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51호로 지정돼 있고 업경전은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139호로 지정돼 있다”고 설명했다.

    대웅전 앞에는 높이 3m 정도의 3층 석탑 1기가 있다. 3층 석탑은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돼 있으며 도선 국사의 창건 당시에 건립된 것이라 전하며, 신라 말의 양식이 뚜렷한 작품이다.

    절을 한 바퀴 둘러보자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대웅전 왼편 ‘선불장’ 마루에 앉아 시원한 산바람을 맞으며 땀을 식혔다. 그런데 선불장 기둥에 잘라졌던 자국이 보인다. 청곡사 고석수 종무실장은 “선불장의 기둥은 반으로 잘려져 있는데, 1890년대 청곡사 살림이 어려워져 절이 비워져 있을 무렵 마을의 어떤 부자가 선불장 기둥을 탐내 잘라서 자기네 집 사랑채 기둥으로 썼는데, 3년 뒤 그 부자 집안이 몰락했다”며 “마을사람들이 청곡사를 지키는 제석천왕과 대범천왕이 노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제자리로 옮겨 놓았고, 그 후 기둥이 잘린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청곡사가 자리한 곳의 이름은 갈전리로 태조 이성계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신천 강씨 신덕왕후가 만났던 재미있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고려 말 이성계는 남해안의 왜구를 토벌하고는 무학대사와 함께 월아산 청곡사를 찾는다. 절에 오르기 전 말에게 물을 먹이고 자신도 물을 마시기 위해 잠시 멈추었다. 우물가에 한 여인이 있어 물을 청했더니 바가지에 버드나무 가지 하나를 띄워 물을 담아 주었다고 한다. 이유가 궁금해 물으니 여인은 급히 먹다 체할 것이 걱정된다 했고 그 마음씨와 미모에 반한 이성계가 훗날 왕비로 삼은 사람이 바로 이때 만난 신덕왕후라고 한다.

    청곡사를 품고 있는 월아산은 진주시민들이 자주 찾는 쉼터로 높이가 482m밖에 되지 않아 한나절 산행으로 알맞은 곳이다.

    청학이 날아와 앉은 청곡사. 월아산 소나무 숲 벗 삼아 학영지에 비친 달빛을 노래하며 고즈넉한 산사에서 차 한 잔의 여유와 함께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여보는 건 어떨까. 주지 적광 스님의 말씀이다.

    글= 이종훈 기자

    사진= 성승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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