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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3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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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을 가다] 작가와 떠나는 경남산책 (54) 배한봉 시인이 찾은 김해 수로왕릉과 봉황동유적

이곳엔 가락국의 역사가 흐르고
2000년 전 가야인의 삶이 숨쉰다

  • 기사입력 : 2013-07-11 01:00:00
  •   
  • 수로왕릉
    숭화문
    쌍어문
    패총전시관
    고상가옥과 수혈주거
    여의각




    김해 하면 가락국(駕洛國, 금관가야 金官伽倻), 가락국 하면 수로왕이 떠오른다. 김해는 내가 사는 창원과 어깨동무하고 있는 바로 이웃도시라 이름만 들어도 친근하게 다가온다. 오늘은 생각난 김에 김해 수로왕릉(사적 제73호)과 봉황동유적(사적 제2호)을 둘러보기로 한다.

    이제 막 7월에 들어섰는데 한낮 더위가 보통 아니다. 곧 이른 장마가 시작될 거라더니, 폭풍전야 같은 그런 전조인가? 웃옷을 벗었는데도 땀줄기가 등을 적신다. 하지만 더위가 대수랴. 가락국 문화를 만난다는 설렘이 마음을 재촉한다.

    창원에서 장유를 거쳐 천천히 운전해 왔는데도 왕릉 입구까지 40여 분밖에 안 걸렸다. 멀리 산 위에 이곳을 지키기 위해 쌓은 것으로 짐작되는 분산성이 보인다. 왕릉 정문인 숭화문(崇化門)을 들어서자 묘한 기운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기 시작한다. 2000년 전에 가락국을 세운 수로왕의 웅기가 서린 탓일까. 비밀스런 고대왕국 가야의 도읍지가 풀어내는 역사의 힘 때문인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사방을 둘러본다.

    길 양편에 하나씩 놓인 거북 석상이 제일 먼저 나그네를 반긴다. 저 돌거북은 수로왕의 탄생신화 속 구지가를 의미할 것이다. 구지가는 수로왕 탄생신화의 출발점에 놓인 노래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하늘이 내려 보낸 알에서 태어난 사람답게 수로왕은 158세(42~199)의 나이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

    (龜何龜何 首其現也 若不現也 燔灼而喫也)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


    예나 지금이나 현명한 지도자의 출현은 여전히 큰 과제가 틀림없다. 구지가를 읽으면, 가락국 백성들이 얼마나 강렬하게 어진 왕의 출현을 기다렸는가가 그대로 느껴진다. 머리를 내놓으라는 명령과 내놓지 않으면 구워먹겠다는 위협의 구조로 소망을 달성하려는 의도를 표현했다는 점에서 구지가는 짧지만 매우 강렬한 의미를 지닌 한 편의 시(詩)인 것이다. 2000년 전에 문제 해결의 열쇠가 집단의 염원을 담은 언어에 있다는 믿음을 신화적으로 보여주었다는 데서 감탄을 하게 된다. 오늘날 이 시대의 지도자들도 제발 구지가의 의미를 제대로 살피며 국민들의 마음을 헤아려주면 좋겠다.

    왕릉 방향으로 홍살문과 가락루가 나란히 서 있다. 홍살문은 능묘나 궁전, 관아 앞에 세우는 붉은 색 나무문으로 경의를 표해야 하는 신성구역을 나타내는 상징물이다. 가락문 왼쪽 기와담장에는 능소화가 무더기로 피어 나그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가락루를 지나면 납릉정문(納陵正門)이 나오고 거대한 수로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수로왕릉은 납릉으로도 불리는데, 조선 중종 때 붙인 이름이다. 왕궁(봉황대)의 동북쪽 평지에 조성되어 있는데, 지름 22m, 높이 5m 정도의 원형봉토분으로 능비, 상석, 문인과 무인 석상, 말과 양과 호랑이 석상 등이 갖추어져 있다. 능의 뒤편에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2기가 있으며, 경내에는 숭선전, 숭안전, 안향각, 숭신각과 신도비, 납릉 정문 등이 배치되어 있다.

    수로왕릉에서 빼놓지 않고 봐야 할 것 가운데서 으뜸은 쌍어문(雙魚紋)이다. 숭화문 입구에서 만난 문화관광해설사 김영희 씨가 멀리 외국에서도 이 쌍어문을 보기 위해 온다면서 친절하게 안내해 준 덕분에 나는 세세하게 그 문양을 살펴본다. 쌍어문은 1792년에 세워진 능침의 정문인 납릉정문 상단 좌우에 하나씩 있다. 파사석탑과 코끼리의 문양이 같이 새겨져 있다. 인도 아유타국과의 교류를 나타내는 상징물이라고 한다. 붉고 푸른색의 단청이 탈색되어 세월의 무게를 더하고 있다.

    수로왕릉 근처에 한옥체험관, 김해민속박물관, 수릉원, 봉황동유적, 분산성, 수로왕비릉, 대성동고분군, 가야역사테마파크 등 수많은 가야 관련 유적과 문화시설이 밀집돼 있어 가족여행지로도 아주 좋은 곳이다. 천천히 수로왕릉을 되돌아 나온 나는 평소 한 번 가보고 싶었던, 황세장군과 여의낭자 전설이 있는 봉황동유적으로 발길을 옮긴다.

    봉황동유적은 가야시대의 대규모 생활유적이다. 가야시대 대표적 조개무덤인 회현동패총과 봉황대 등이 있다. 봉황대 일대는 당시의 옛집과 포구를 재현한 도심 속의 역사공원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회현동 골목을 꺾어 돌면 패총전시관이 나온다. 패총전시관의 유리문이 밋밋하다고 해서 쉽게 보면 안 된다. 들어서는 순간 패각 등의 유물이 그대로 드러난, 놀랍고 어마어마한 패총의 토층 단면을 볼 수 있다. 회현동패총은 높이 7m, 길이 120m에 이른다.

    패총전시관을 살펴본 뒤 오른쪽 언덕을 오르면 가야시대 고상가옥과 수혈주거가 나온다. 나무와 갈대를 이용해 복원했다. 이곳이 가야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라니. 가만히 땅바닥에 손을 대본다. 그들의 삶과 숨소리가 남긴 온기가 내 손바닥을 타고 온몸으로 퍼지는 것 같다.

    오솔길을 따라가면 숲속에 오늘 내가 꼭 들러보고 싶었던 여의각이 숨어 있다. 여의낭자를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나는 여의각 돌계단에 앉아 땀을 식히며 가만히 눈을 감는다.

    때는 가락국 제9대 겸지왕 시대. 출(出) 정승의 딸 여의(如意)와 황(黃) 정승의 아들 세(洗)는 서로 깊이 사랑했다. 신라군과의 전쟁에 출전하여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 황세에게 왕은 하늘장수라는 칭호를 내리고 외동딸 유민공주와 혼인시켜 부마로 삼았다. 여의낭자는 황세장군을 그리워하다 죽었다. 황세장군 역시 여의낭자를 그리워하다 얼마 뒤 죽고 말았다.

    그러니까 이 언덕은 황세장군과 여의낭자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어린 곳. 그들의 순정이 녹아 있는 현장이다.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야기라 할 황세장군과 여의낭자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의 전설이 새겨진 땅을 나는 오늘 꼭 한 번 밟고 싶었던 것이다. 이 절절한 사연의 기운 때문일까. 갑자기 내 몸이 으슬으슬 아파온다.

    두통도 몸살도 아닌 이 요상한 통증을 다스려볼 요량으로 느릿느릿 봉황대 숲길을 걷는다. 김해는 우리 역사상 천 년 신라의 경주, 5백 년 조선의 한양 다음으로 오랫동안 한 나라의 도읍이었다. 그만큼 유물과 유적이 많을 것이나 김해는 역사의 뒷길에 놓여 있었다. 패자에 대한 역사의 무관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해는 이제 가야 500년 도읍지다운 역사도시의 격조 있는 풍모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6개의 알과 수로왕의 탄강신화, 인도에서 배를 타고 온 아유타국 공주인 허황옥, 150살 이상을 산 수로왕과 허황옥의 나이, 지리산에서 성불했다는 수로왕의 일곱 왕자, 인도에서 허황옥을 따라와 우리나라에 처음 불교를 전했다는 허황옥의 오빠인 장유화상, 거대한 패총과 가야시대의 주거지, 황세장군과 여의낭자의 전설…. 비밀스러운 고대왕국 가야의 숨결을 천천히 느끼고 돌아오며 나는 오래전부터 느꼈던 허기감이 충만감으로 바뀌는 것을 느낀다. 구하구하 수기현야 약불현야 번작이끽야. 다시 구지가를 읊조리며 돌아오는 내 생각 속에 수로왕릉에서 본 능소화가 자꾸자꾸 만개하는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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