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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박수무당 김현각 씨

“굿은 춤·음악·음식·의상 어우러진 복합예술”

  • 기사입력 : 2013-07-16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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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솔당 당주 김현각 씨가 창동예술촌 무대에서 공연굿을 펼치고 있다.
    김현각 씨가 3·15 대진혼굿에서 작두를 타고 있다.
    3·15 대진혼굿 연희.
    부마민주항쟁 32주년 진혼굿.



    미지의 세계에, 과학으로 증명되지 못한 원리에 다가서는 일은 위험하다. 그래서 조심스러웠다. 그때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한 변의 길이가 16㎞인 정팔면체에 겨자 씨를 가득 채워 100년 주기마다 한 알씩 빼냅니다. 그것이 다 비워지는 시간을 한 겁이라고 하지요.

    모르는 두 사람이 만나는 일은 이를 천 번 반복한 결과라 합니다.

    하룻밤을 함께 지낸 남녀는 3000겁, 부부는 8000겁, 부모자식은 9000겁이라는 엄청난 인연법을 가지고 있지요. 그러니 오늘 만남도 그만큼 소중한 인연입니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수많은 신을 모신다는 만신(萬神), 즉 무당, 그중에서도 남자 무당, 흔히 말하는 박수무당이기 때문이다.


    ◆무당, 그 참을 수 없는 무거움

    김동리는 소설 ‘무녀도’와 ‘을화’를 통해 무당에 대해 이야기했다. 박생광은 말년에 화려한 오방색을 자유자재로 쓰며 무녀 그림을 그렸다. 박찬경은 무당을 소재로 한 영화 ‘만신’을 찍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무당은 여전히 멀다. 그리고 어렵다. 산세가 험한 산골짝에 숨어 온갖 음험한 주술을 부리는 마녀 쯤으로 치부되어버린 무당. 부여나 고구려 시대 제천의식을 주관하던 천관녀들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신분제도의 맨 아래로 곤두박질친다. 그리고 다시는 부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첨단을 달리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이들이 무업을 이어가는 이유는 뭘까? 그들에게서 삶의 비책을 얻으려는 민중들이 아직도 많은 이유는 뭘까? 그 참을 수 없는 무거움에 대해 이야기해본다.


    ◆박수무당 김현각 탄생

    박수무당 김현각 씨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싸움꾼으로 경찰서를 들락거렸고 지리멸렬한 이혼의 아픔도 겪었으며 사업이 망해 길에서 담배꽁초를 주워서 피워봤다. 죽으려고 농약도 마셨다. 결론은 “그 모든 것들은 박수무당이라는 귀착점에 도달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었을 뿐”이었다. 옛 이야기는 접기로 했다.

    김 씨는 강신무, 즉 신이 내려 무당이 된 경우다. 38세가 되던 2005년 봄부터 변화가 왔다. 날로 번창하는 사업을 하며 세 아이의 아버지로 남부럽지 않게 살 때였다. 어느 날부터 지독한 불면증과 하혈에 시달렸다. 병원에서도 원인을 알지 못했다. 깜빡 잠이 들면 노인들이 보이고 말을 탄 장군들이 나타났다. 사업도 접어야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무당을 찾아갔더니 무병(巫病)이라는 결론이 내려졌고 내림굿을 받으라고 했다.

    “솔직히 힘들어서 아무 생각 없었습니다. 몸이 아프니까 이것만 나으면 살 것 같다는 생각이었지요.”

    굿판이 벌어졌고, 그는 참담한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장구와 징 소리가 격해지는 순간, 몸이 저절로 움직였고 눈을 뜨자 꿈에 보였던 노인들과 장군들이 보였다. 그리고 생전 처음 듣는 말들이 자신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곧 마산에 ‘천솔당’이라는 이름의 신당을 차렸다. 그때부턴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오기만 해도 머릿속에서 팝콘이 터지는 듯한 어떤 예감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리스·로마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신탁’, 한국식으로 말하면 ‘점’을 볼 수 있게 된 것. 하지만 그는 웬만해선 점을 봐주지 않는다. “내림굿을 하고 나니 병이 씻은 듯이 낫고 마음이 그렇게 편안해질 수가 없었습니다. 무학산 산신님께 빌었죠. 신을 팔아 장사하지 않겠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겠다. 혹세무민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이 맹세를 지키지 않을 때는 제 능력을 거두어가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돈 몇 푼 받고 신수 봐주는 박수무당 그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 “내가 원해서 무당이 된 것도 아니고 어떤 측면으로는 신이 나를 선택한 사제인데, 이렇게밖에 못 사나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시작했다. 전라도 시나위와 이매방류 살풀이, 처용무를 배우고 태평소를 불었다. 그리고 굿이라는 콘텐츠에 눈을 떴다. 그는 무굿을 춤과 음식, 음악, 의상이라는 문화요소가 집합되고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복합 예술 장르로 보았다.


    ◆굿의 예술성에 눈을 뜨다

    근래에 들어 무굿의 예술성은 사회적으로 공인된 부분이 많다. 서해안배연신굿, 동해안별신굿, 경기도당굿, 진도씻김굿, 남해안별신굿 등이 중요무형문화재로 등록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경남에는 통영의 남해안별신굿 외에는 이렇다 할 굿이 없다는 사실이 김 씨를 안타깝게 했다. 그 때문에 지방색이 묻어나는 굿을 지닌 지역에 비해 경남은 무속에 대한 편견이 심한 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가 시작한 일이 굿을 가까이서 즐기는 공연처럼 만들어 알리는 작업이었다. 그는 전통굿에 주요 뼈대를 두고 현대에 맞는 연희와 볼거리를 가미한 공연굿을 만들기 시작했다. 국악과 한국무용을 굿과 접목시켜 1과장 접신, 2과장 기원, 3과장 해원과 상생, 4과장 연희, 5과장 액살소멸, 6과장 마당놀이로 구성된 공연굿을 기획했다. 그리고 2007년부터 매년 1000만 원의 사재를 털어 ‘무학산 산신대제’를 열어 떡과 음식을 나누며 ‘한판 거하게’ 놀았다. 200여 명의 관중으로 시작한 산신대제는 매년 관객의 수가 배로 늘어나며 성황을 이뤘다.


    ◆공연굿과 진혼굿을 펼치다

    2009년에는 만날제 기간에 무학산 산신대제를 열었다. 시에 무굿을 하겠다고 건의했을 때 담당 공무원들은 펄쩍 뛰었다. 공식행사에 정체불명의 푸닥거리를 넣을 수는 없다는 것. 그는 ‘굿은 종교 제례가 아니라 맺힌 마음을 풀고, 망자들을 좋은 곳으로 인도하고, 산 사람들의 염원을 비는 하나의 장’이라고 설득했고, 전통적 굿이 아닌 마당놀이 형식으로 꾸미자는 타협점을 찾았다. 이후에는 2009년 천솔무속보존회가 만들어져 굿 연구를 해나갔고, 2010년에는 3·15의거 50주년 기념식에서 민주열사 28명의 영가들을 축원하는 대진혼굿을 주관했다. 이듬해 가을에는 부마민주항쟁 32주년 기념식에서 유치준 열사의 혼을 달래는 진혼굿을 주관했다. 그리고 2012년 통합 창원시 태평기원굿을 펼쳐 호평을 받았다. 언젠가 자신의 경험을 살려 ‘박수무당이 쓴 무굿의 실제에 대한 논문’을 쓰고픈 꿈도 갖게 됐다.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 되고 싶어

    최대한 양보해 굿은 예술로 보아 넘긴다고 하더라도, 신을 모신다는 것 자체가 타 종교의 따가운 시선에서 벗어날 순 없는 법. 이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경전과 신단을 갖춘 고등종교와 달리 구전으로 내려오는 무속신앙에는 절대전능한 신은 없습니다. 삼신할미, 부엌신, 마당신 등이 높고 낮음 없이 한 울타리에서 인간을 보호하는 영적 존재로 담겨져 있을 뿐이지요. 인간 세상사와 똑같지요. 그냥 그렇게 봐주십시오.”

    그의 소망은 26살 큰딸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버지가 되는 것. 딸이 결혼할 때 아버지가 박수무당이라는 사실을 떳떳하게 여길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 그의 바람대로 ‘무당’이라는 존재가 진중하고 품위 있는 의미로, 검증되지 않은 미지의 세계가 친숙한 삶의 일부로 다가올 날을 ‘조심스레’ 기대한다.


    글=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사진=성승건 기자 mkseong@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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