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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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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을 가다] 작가와 떠나는 경남산책 (57) 배한봉 시인이 찾은 통영 동피랑 벽화마을

풍경도 시도 사람도 그림이 되는 곳

  • 기사입력 : 2013-08-08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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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전거를 이용한 설치미술과 동피랑에서 바라본 통영시가지 풍경.
    동피랑 벽화와 골목. 골목 끝에 쉼터가 보인다.
    허물어진 담장도 자연스럽게 만드는 벽화.
    박경리의 시 ‘옛날의 그 집’.
    동피랑 꼭대기에 있는 동포루.






    통영 동피랑은 전국적으로 벽화로 유명한 도심 속의 작은 마을이다. 마을 입구 비탈길 옹벽부터 언덕 꼭대기 끝집까지 골목골목 낡은 벽에 다양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정겨운 풀꽃에서부터 바다를 헤쳐가는 대형 선박에 이르기까지 풍부하게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온갖 그림들은 작고 허름한 집들을 단순한 하나의 주거지에서 예술과 삶이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으로 재탄생시켜 놓았다.

    나는 거대하고 화려한 것보다 왜소하고 수수하고 낡은 것들에 마음 빼앗길 때가 많다. 동피랑도 그런 까닭으로 두세 번 들렀지만 지금도 여전히 아름다운 곳으로 기억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자취 시절의 골목길에 대한 추억 탓인지도 모른다.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그 골목에서는 아무나 붙잡고 말을 붙여도 정답게 받아줄 것만 같아서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넉넉해진다. 동피랑 골목도 그런 느낌이다.


    동피랑은 동네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벽화마을임을 실감하게 된다. 마을 초입의, 높이가 10m쯤 돼 보이는 옹벽이 온통 벽화로 덮여 있다. 이순신 장군, 우체통, 물고기, 섬 풍경 등이 벽화 속의 주인공들이다. 매우 통영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순신 장군은 통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인물이다. 통영이라는 이름도 이순신 장군의 통제영에서 비롯된 것이니 말이다.

    빨간 우체통은 청마의 시를 떠올리게 한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행복’에서)고 했지. 연인에게 보낼 편지를 쓰는 시인의 환한 얼굴 표정이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듯하다.

    비탈길을 조금 오르면 이내 삼거리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벽화를 만날 수 있다. 큰길을 중심으로 동피랑 마을을 감싼 옹벽에는 큰 그림이 주를 이루고 있고, 구불구불한 비탈길 골목을 따라 오르면 담이나 집 벽에는 소품 위주로 그림이 그려져 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곧 허물어질 것만 같은 블록 담장이 한 폭 그림과 채색으로 인해 안정감과 멋을 갖게 된다는 점이다.

    벽화들은 바닷속 풍경, 나뭇잎을 먹고 있는 기린, 할머니 얼굴, 사색하는 청년, 쾌활한 소녀들, 말타기 놀이를 하는 아이들, 자전거를 이용한 설치미술, 날개 그림 등등 그 종류를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만큼 여러 가지로 표현되어 있다. 닭 그림 앞에서 꽁지를 잡는 시늉을 하며 사진을 찍는 등 여러 퍼포먼스가 가능한 것도 그림 소재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동피랑 벽화마을에는 그림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동피랑UCC우체통, 트릭아트 길, 동피랑갤러리, 빠담빠담 드라마 촬영지, 소공원, 커피숍, 기념품 가게, 쉼터 등이 군데군데 있다. 휘어지고 꺾어진 골목길을 따라가며 벽화들을 살펴보다가 차 한 잔의 여유를 가져도 좋고, 간단한 간식을 즐겨도 좋다.

    벽화들을 감상하다가 간혹 시를 만나면 마치 무슨 복권에 당첨이라도 된 기분이 든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옛날의 그 집’에서)는 박경리의 시도 있고, “통영장 낫대들었다// 갓 한닢 쓰고 건시 한접 사고 홍공단 댕기 한감 끊고 술 한병 받어들고// 화륜선 만져보려 선창 갔다// 오다 가수내 들어가는 주막 앞에/ 문둥이 품바타령 듣다가// 열이레 달이 올라서/ 나룻배 타고 판체목 지나간다 간다”(‘통영-남행시초 2)는 백석의 시도 새겨져 있다. 하지만 동피랑에서는 시도 한 폭의 그림으로 존재한다.

    동피랑 점방 입구에 ‘느림우체통’이 서 있다. 이 우체통의 우편물은 한 달 뒤에 배달되는 것이 특징이다. 무엇이든 ‘빨리빨리’로 통용되는 이 시대에 한 달 뒤쯤 배달된 우편물을 받아보는 느낌도 아주 이색적이겠다.

    동피랑 점방 바로 아래 소공원에는 화가 몇 명이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가족이 다 함께 왔다면 하나의 화폭에 가족 모습을 다 담은 만화 캐릭터 형식의 그림 한 장을 남기는 것도 좋을 듯. 연인도 마찬가지. 사랑의 미래를 약속하는 좋은 기념이 되지 싶다. 이런 풍경도 동피랑에서는 자연스럽게 하나의 그림으로 흡수된다.

    동피랑의 꼭대기에는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이 설치했던 통제영의 동포루(東砲樓)를 복원해 놓았다. 동포루에서 바람을 쐬며 동양의 나폴리라 불리는 통영시내와 바다를 휘둘러보다가 나는 비로소 동피랑 골목이 참 가파르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래, 동피랑이라는 지명이 ‘동쪽 비랑’에서 유래했다지. 그러니 가파를 수밖에. 비랑이란 벼랑의 경상도 사투리. 벼랑처럼 가파른 언덕에 집을 짓고 산 이 동네 사람들의 옛 사연을, 노인을 붙잡고 물어보지 않아도, 또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짐작 그대로, 그 이름만큼 가파를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까 동피랑은 참 아프고 슬픈 이름. 아슬아슬하고 숨이 차오르는 이름.

    통영시는 원래 낙후된 이 마을을 철거하고 동포루를 중심으로 주변에 공원을 조성할 계획이었다. 동피랑이 철거 직전의 달동네에서 벽화마을로 탈바꿈한 것은 2007년 시민단체 ‘푸른 통영 21’에서 공공미술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동피랑 색칠하기-전국벽화공모전’을 연 것에서 출발한다. 동피랑이 벽화마을로 이름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마을을 보존하자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통영시는 동포루 복원에 필요한 마을 꼭대기 집 3채만 헐고 나머지는 철거계획을 철회했다. 동피랑은 이제 골목을 따라 그려져 있는 형형색색의 벽화와 만나기 위해 전국에서 관람객이 줄을 지어 찾아드는 문화예술 피서지가 됐다. 그러니까 동피랑은 문화예술이 어떤 거대한 공장이나 산업시설보다 힘이 세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동피랑의 까망길을 따라 내려오면 재미있는 문장들이 새겨진 판이 길 옆에 붙어 있다. 어쩌면 이런 것이 진짜 동피랑의 힘, 통영의 힘이 아닐까 싶다. 몇 가지 소개하면 이런 문장들이다.

    “이야, 내는 요새 도이 없으나이 잠바 개춤도 빵구가 나고, 자꾸도 고장이고, 만날천날 추리닝 주봉에 난닝구 바람으로 나댕긴다 아이가.”

    “우와, 몬당서 채리보이 토영항 갱치가 참말로 쥑이네.”

    “쌔기 오이소! 동피랑 몬당꺼지 온다꼬 욕 봤지예! 짜다리 벨 볼 끼 엄서도 모실 댕기드끼 어정거리다 가이소.”

    길 옆에 걸린 문장들을 읽으며 내려오다 보면 오랜 친구와 이야기하고 있다는 착각마저 든다. 기실 통영 사투리나 내 고향인 함안 사투리나 별반 차이가 없어서 더 그렇다. 우리 지역말이란 게 실은 그렇다. 된장국 같고, 몸에 잘 길들여진 옷 같은 느낌이다.



    공원 여기저기 구름을 모았어

    솜사탕 기계는 바람을 끌어와 구름뭉치 솎아냈지

    나는 나무젓가락에 감긴 천 원어치 구름을 먹는다

    도르르 말린 구름을 삼키면 간혹 새의 깃털이 나오기도 해

    그것을 어금니로 씹으면 가벼워지기도 할 거야

    경쾌한 하늘이 여섯 시 간곡함을 받아들이느라 낮아질 때가 있지

    어쩌면 깃털을 먹은 내가 허공으로 뜨는 시간일지 몰라

    -강재남, ‘오늘 날씨 쨍쨍합니다’, <시사사>, 2013년 7-8월.



    동피랑은 벽화를 보는 재미도 좋지만 하릴없이 그냥 골목을 어슬렁거리는 재미도 끝내준다. 천천히 강구안으로 내려오다 하늘을 본다. 바람이 몇 점 구름으로 하늘에 솜사탕 그림을 그리고 있다. 벌써 6시가 넘었다. 졸시(拙詩) ‘통영의 봄은 맛있다’(<열린시학>, 2010년 여름)에 등장하는 분소식당 가서 시원한 생선탕이나 한 그릇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통영 시인 강재남의 시 구절처럼 “내가 지나는 하늘마다 맑음이 따라 나오느라 여섯시가 간곡해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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