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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아버지의 짝사랑- 김문주(아동문학가)

  • 기사입력 : 2013-08-09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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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딸바보’란 신조어는 아마 방송에서 사용하면서 유행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제는 유난스러운 신조어도 아닌 것이 주위에 ‘딸바보’ 아빠들이 허다하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우리 집만 해도 그렇다. 첫째인 아들과 터울이 심해 아직도 어리광쟁이인 딸은 아빠를 마음대로 조종한다. 엄마가 안 사주는 과자는 아빠에게 몰래 부탁하고, 애교 한 번으로 용돈도 더 받는다.

    이번 휴가도 초등학교 3학년인 딸을 위한 것이었다. 물놀이를 좋아하는 딸이 수영장 딸린 곳을 원해 아빠는 닷새 동안 인터넷만 들여다보고 수영장 딸린 곳을 골라 예약했다. 처음 가보는 도시라 그곳의 명물을 보고 싶은 것은 내 마음뿐이었다. 이틀 동안 아빠는 오직 딸과 물놀이만 열심히 해주고 왔다.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딸바보임이 분명하다.

    옛날에는 아버지란 존재는 집안에서 무서운 사람이었다. 엄부(嚴父) 밑에서 자식이 반듯하게 자란다고 했다. 하지만 요즘은 엄부는 찾아보기 힘들다. 엄부의 부재가 큰 문제라고 한탄하는 교육자도 있고, 요즘 시대에 엄부는 오히려 교육에 역효과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아빠들이 딸바보가 되는 이유는 이런 교육 철학과는 별 상관이 없는 듯하다. 그저 딸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어 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은 그렇지 않았다. 무뚝뚝하고 재미없었다. 나는 아버지와 이야기를 하며 웃고 떠든 기억이 거의 없다. 내가 사춘기 무렵,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는 재기하지 못했고 나는 그런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도움 없이 내 스스로 어른이 된 줄 알았다. 결혼을 하고 나도 부모가 되면서 아버지를 천천히 이해할 무렵 아버지는 힘없는 뒷방 늙은이가 되어 있었다.

    폭염주의보가 내려 뜨거운 날,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우리 집에 오셨다. 엄마 심부름으로 나에게 콩국을 가져다주러 오신 거였다.

    “너 이거 옛날부터 잘 먹었잖아. 시원할 때 먹어라.”

    플라스틱 통이 든 비닐봉지를 내게 건네주고 아버지는 급히 엘리베이터를 타셨다. 잠시 들어오시라고 했지만,

    “어, 아니다, 너 바쁜데 갈란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칠 여유도 없이 아버지는 돌아섰다. 혼자 식탁에 앉아 콩국을 먹는데 늙은 아버지의 뒷모습이 목에 걸렸다.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간혹 호박죽을 갖다 주기도 하고 과일을 갖다 주기도 하신다. 언제나 선걸음에 물 한잔도 하지 않고 그냥 가셨다. 어쩌다 친정에 가면 아버지는 무심한 듯 지나는 말로 남편과 아이들의 안부를 물으신다. 자상하게 혹은 재미있게 말을 걸 줄 모르시는 분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는 아버지에게 더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딸이다. 시댁에는 의무적으로 안부전화를 해도 친정은 가까이 있다고 편하게 생각해서 안부전화를 하는 적이 없다. 어쩌다 내가 필요한 일이 있어 전화를 했다가 아버지가 받으시면 나는,

    “아빠, 엄마는요?”

    하고 엄마를 바꾸란 듯이 말한다. 나는 그렇게 무심한 딸이다.

    오늘 아침, 엄마가 전화를 하셨다. 아버지가 바지를 몇 개 샀는데 허리 사이즈가 같으면 남편에게 하나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잠시 들러서 옷을 가져가라는 엄마의 말 뒤편으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더운데 뭣하러 애보고 오라고 해. 내가 자전거 타고 갖다 주면 되지.”

    나는 나중에 봐서 가겠다고 해놓고는 깜빡 잊어버렸다. 저녁에 다시 엄마가 전화를 하셨다. 내가 오겠다고 해서 아버지가 종일 외출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는 것이다. 아버지 목소리도 들려왔다. 내일은 꼭 가겠다고 약속을 했다.

    전화를 끊고 문득 생각하니 우리 아버지도 딸바보이다. 표현도 제대로 못하고 마음속으로만 짝사랑하는 딸바보. 세상의 아빠들은 어쩔 수 없이 모두 딸바보인가 보다.

    김문주(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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