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24일 (토)
전체메뉴

작가와 떠나는 경남산책 (58) 박서영 시인이 찾은 김해 화포천

일렁이는 슬픔 더 깊이 파헤치는 바람
울고 싶은 사람이여, 화포천에 혼자 가라

  • 기사입력 : 2013-08-13 11:00:00
  •   
  •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들. 화포천은 바람의 은신처다.

    화포천 미루나무
    생태학습관

    갈대집



    훼손되지 않은 생명 속으로

    한없이 걸어들어간다

    올 때마다 다른 얼굴

    자신을 다 보여주지 않는다



    물이 범람하며 생긴 습지

    건강하게 되살아나는 생태계

    한바탕 슬픔 휩쓸고 지나가면

    우리 마음도 깨끗해질까



    이곳은 바람의 은신처

    적막하지 않은 내 마음의 오지

    폴 발레리의 말이 떠오른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고




    여름 끝물. 망명하는 꿈을 꾼다. 그곳이 어디든 모든 것 내려놓고 망명할 곳을 찾아 떠나고 싶어진다. 정호승 시인은 ‘여행’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사람이 여행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뿐이다/ 아직도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의 오지뿐이다’라고. 마음을 두고 어디든 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무리 멀리 가도 마음이 따라다니니 어쩔 수 없는 일. 그러니 멀리 가보나 마나. 그곳이 어디든 나는 나인 채로 떠돌다가 돌아오고야 만다. 나는 ‘마음의 오지’라는 표현에 덜컥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훼손되지 않은 생명 속으로 한없이 걷고 있는 느낌이 드는 곳. 화포천은 한동안 내 ‘마음의 오지’였고 ‘은신처’였다.

    새벽 여섯 시. 김해 화포천을 찾았다. 물안개가 피어올라 모호한 시간 속으로 걸어가는 것 같다. 물안개가 화포천의 풍경을 벗겨내고 있다. 한 겹, 한 겹 옷을 벗은 화포천이 자신의 속살을 보여주고 있다. 길고 구불구불한 나무데크를 따라 걸으니 이런 이정표들이 눈에 들어온다. 큰기러기뜰, 노랑부리저어새뜰, 노랑어리연꽃뜰, 창포뜰, 물억새뜰. 뜰의 이름이 매우 아름답다. 그런데 이 뜰의 주인을 만나려면 계절을 잘 선택해야 한다. 지금은 노랑어리연꽃의 계절이다. 동·식물들이 서로를 다치게 하지 않고 통치하지 않으며 잘 살고 있다. 그러나 동·식물의 세계도 살아남기엔 만만치 않다. 생태계는 원래 약육강식이 지배하고 있으니.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약육강식과는 다른 건강한 생명력이 살아 있는 자연의 맨얼굴이다. 잠자리들이 사방 가득 날아다니고 있다. 잠자리의 종류를 살며시 발음해 본다. 깃동잠자리. 고추좀잠자리. 검은물잠자리, 왕잠자리. 입 안에서 따뜻한 모음의 날갯짓이 일어나는 것 같다.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우연히 수달, 왜가리, 독수리, 고라니 등을 만날 수 있을까? 어딘가에 잠시 깃들었던 흔적을 남겨둔 채 떠나버린 새들을 추억하는 건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아직 멸종되지 않고 가끔 찾아와주는 것들을 기다리고 있다. 죽지 않고 살아 있어 우리가 가끔 안부를 묻고 만날 날을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다.

    화포천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하천형 자연습지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천천히 걷다보면 온 몸이 땀에 젖는다. 노랑부리저어새를 비롯한 희귀한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지만 그들은 쉽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진 않는다. 이곳 습지에 살고 있는 생물의 종류도 600종이 넘고, 멸종위기생물도 9종이나 살고 있다고 한다. 화포라는 이름은 사라진 포구의 이름이라는데 선사시대 이전에 생겼으리라 추측한다. 화포천 습지의 형성은 조금 독특하다. 하천의 하류에 있는 큰 강에서 홍수가 나게 되면 그 물이 거꾸로 하류에서 상류로 흐르게 된다. 그럼 물이 거꾸로 올라 오다가 주변의 낮은 지역이 잠겨 습지가 되는데, 바로 화포천이 그런 배후습지라는 것이다. 물이 범람하면 도리어 생태계는 건강하게 되살아난다. 우리의 마음도 한바탕 고통과 슬픔이 휩쓸고 가 버리면 깨끗해질 수 있을까. 위선을 떨지 않고 밑바닥까지 속을 내보일 수 있는 친구가 한 명 있으면 좋겠다. 화포천 생태학습관을 둘러보면서 그곳에서 만나는 사진과 동·식물의 이름을 읽으면 가슴이 뛴다. 잊어버리고, 잃어버렸던 이름을 되찾기라도 한 것처럼 두근거린다. 자연에서 느끼는 살아 있는 기분이 좋다.

    처음 이곳을 찾은 것은 사 년 전 겨울이었다. 비바람이 휩쓸고 간 화포천에서 나는 폐허를 보았다. 그 폐허 속을 걸어 어디까지 갔었는지 가물가물 하지만, 그 후로 가끔 혼자 찾아오곤 했었다. 올 때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화포천은 점점 나의 ‘마음의 오지’가 돼 버렸다. 사실 소문내고 싶지 않은 곳이었고, 여름 땡볕 아래에서 혼자 기원이 담긴 문장을 쓰듯 남겨두고 싶은 곳이었다. 이렇게 고백하듯 써버리고 나면 나는 다시 다른 곳을 찾아 떠돌아야 할 것이다. 말하고 나면 미지의 것들이 사라지게 되고, 이제 나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사실 처음부터 나만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게 밖으로 내놓는 건 내 마음이 이제 다른 곳으로 조금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겠지. 화포천을 알기 전에 자주 갔었던 ‘마음의 오지’가 따로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어느 여름날엔 뜨거운 심장으로 이 둑길을 하염없이 걸은 적도 있었다. 이젠 여름이 다 지나가 우리가 더 이상 뜨거울 일도 없는데 문득 등줄기에 굵은 땀이 흐른다. 아직 남은 태양빛이 있는가? 그것은 이미 우리의 몸 안에서 다 녹아 흘러내렸고 이제 남아있지 않다. 어두컴컴하고 아픈 동굴에서 나오라고 누가 빛을 비춰준 적 있었던가? 나는 화포천에 와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이곳은 살아남은 이들과 떠난 이들의 처형지처럼 쉬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바꾼다.

    여름끝물의 태양이 뜨겁다. 곧 사그라져버릴 뜨거움인 줄 알면서도 그 감촉이 좋아 한동안 서 있었다. 둘러보니 마땅한 그늘도 보이지 않는다. 화포천은 그런 곳이다. 그늘이라 해봤자 고작 길쭉한 미루나무 몇 그루가 전부다. 이곳에서의 그늘은 컴컴한 밤의 시간이다. 밤이 되면 화포천은 고요한 생명의 기운을 세상에 퍼뜨린다. 삵이나 고라니가 살금살금 나와 당신을 놀라게 할지도 모른다. 아무도 없는 깊은 밤에 화포천을 찾았다가 두려움의 정체를 본 날도 있었다. 바람과 적막이 서로를 탐하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본 적도 있었다. 생명은 이렇게 늘 두렵고도 불안한 세계를 감추고 꿈틀 살아있다.

    나는 둑에 쭈그리고 앉아 화포천을 스윽 스치며 지나가는 기차를 보았다. 벌써 몇 대의 기차가 지나갔다. 저 기차는 무궁화호만 정차하는 한림정역을 지나왔을 것이다. 한림정역 이정표를 지나 ‘갈대집’에 오른다. 이 ‘갈대집’은 초가 3칸의 원초적인 오막살이집 형태를 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이곳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 갈대로 지붕을 잇고 살던 집을 복원해놓은 곳이다. 갈대집을 지나 계속 걷다보면 ‘대통령의 길’이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태어난 봉하마을과 이웃해 있다. 한 사람의 생애가 전쟁처럼 뜨거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들. 살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몸과 마음의 전쟁 중에 있다. 먹고 다투고 사랑하고 이별하면서 우리는 언제나 고통의 순간들과 마주한다. 지나간 순간들이 가슴에 박혀 얼굴이 빛나는 이는 좋은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다. 우리가 조금 더 싱싱하게 되살아나기를 바라면서 화포천과 봉하마을을 이어주는 긴 둑길을 본다. 둑에 풀이 무성하다. 산비둘기 두 마리가 다정하게 바라보고 서 있다.

    이제 화포천을 떠나야 할 듯하다. 뒤돌아보지 않고 다른 ‘마음의 오지’를 찾아 떠날 것이다. 내 마음의 오지는 결코 적막하지 않다. 늘 바람이 불고 있다. 그 바람 속의 수런거림을 들으며,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되길 바란다. 나는 다시 화포천에 올 수 있을까. 저수지 물 속으로 풍덩 가물치 한 마리가 튀어 올랐다가 사라지는 소리가 들린다. 이곳 습지엔 버들붕어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물고기도 산다. 버들붕어라는 물고기가 궁금하여 또 한 번 오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름과 달리 버들붕어는 투어(鬪魚)다. 사랑과 이별이 싸우고 희망과 절망이 싸우고 현실과 꿈이 싸우는 곳이 세상이다. 당신은 평화를 원했고, 원치 않은 일을 하게 되었고, 멀리 떠나갔다. 영혼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화포천에 잠시 어느 날의 영혼을 두고 왔다.

    화포천은 폐허의 가슴을, 슬픔으로 늘 일렁거리는 마음을 더욱 깊이 파헤친다. 뭔가 남아 있는 심장에 꽃을 피우라는 의미일까. 몇 년간 화포천을 찾았지만 화포천은 자신을 다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리움이 남아 있으리라. 인적이 없는 화포천에서 새들은 쉬지 않고 울어댄다. 그것은 살아 있다는 신호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고 폴 발레리가 그랬지. 생명의 바람은 결코 한 방향으로 불지 않는다. 화포천은 바람의 은신처다. 그러니 울고 싶은 사람이여. 화포천에 혼자 가라. 실컷 울고 나면, 명치 끝을 찌르는 슬픔 따위 한동안 견딜 수 있을 테니.

    글·사진= 박서영



    본지 지면 개편에 따라 그동안 유홍준, 송창우, 배한봉 시인이 꾸려온 ‘작가와 떠나는 경남산책’이 오늘(58회)부터 새로운 시인들과 함께합니다. 새 필진은 박서영, 김승강, 김참 시인입니다. △박서영-고성 출생, 199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김승강- 창원 출생, 2003년 ‘문학·판’으로 등단, 시집 ‘흑백다방’과 ‘기타 치는 노인처럼’. △김참- 사천(삼천포) 출생. 1995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그림자들’, ‘미로여행’.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 관련기사
  • 조고운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