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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베트남 귀화인 고희선 씨

“이주민 통역봉사 하다보니 고충해결사 됐네요”

  • 기사입력 : 2013-08-16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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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트남 귀화인 고희선 씨가 창원시 의창구 팔룡동 경남이주민센터 맞은편에 있는 자신의 외국인 전용 마트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창원시 의창구 팔룡동 경남이주민센터 맞은편 외국인 전용 슈퍼마켓인 ‘Vina mart’. 20㎡ 남짓한 마트에는 젊은 베트남 여성 3명이 수다를 떨고 있다.

    마트 주인 고희선(38) 씨는 간간이 이들과 얘기를 섞으면서, 또 다른 외국인 남성과 휴대전화 개통을 상담하고 있다.

    고 씨는 호치민 인근 동나이성 출신의 베트남인이었다. 2004년 한국으로 왔으며, 지금은 귀화했다.

    손님과 상담하랴, 오는 전화 받으랴 바쁜 그녀에게 취재약속을 잡은 기자가 무안할 정도다.

    “더위가 만만찮다”기에 베트남이 더 덥지 않느냐고 했더니 “이젠 한국사람 다 됐어요”라며 웃는다.



    시누이집 더부살이로 신접살림

    고 씨의 베트남 이름은 티타오. 그가 창원에 자리잡기까지 사연은 이렇다. 티타오는 대학을 졸업하고 베트남에 있는 한국인 의류공장에 취업했다. 그곳에서 기술자로 와있던 지금의 남편 서수옥(남편의 나이가 많다며 굳이 밝히지 않았다) 씨를 만났다. 2002년이다.

    그러다 2004년 초 현지공장이 인건비가 싼 중국으로 옮기면서 서 씨는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이미 임신 6개월의 아이가 있었다. 달랑 가방 2개와 뱃속 아기만 데리고 한국에 왔다는 그녀. 남편은 실업자였다.

    지낼 곳이 없었던 부부는 창원의 시누이 집에서 더부살이를 했다. 좁은 아파트에 두 집 식구 6명이 함께 살았다. 남편은 옷 수선가게에 나갔지만 월급은 적었고 빚은 자꾸 늘어났다. 티타오는 그때를 돌이키며, 경제적·정신적으로 정말 힘들었다고 한다. “낯선 한국에 와서 몸도 마음도 힘들었어요. 시누이 집에 얹혀 사는 것도 그렇고…. 한국어가 서투른 저는 장애인과 마찬가지였어요. 언어장애인. 말이 안 통하니 시장도 못 보고….”

    아이를 낳고 5개월 만에 창원 사파동에 단칸방을 구했다.

    한국에 살기 위해서는 우선 한국어부터 배우는 것이 급했다. 당시만 해도 베트남인이 한국어를 체계적으로 배울 곳이 거의 없었다. 2007년 말 성산종합사회복지관이 운영하는 한국어 강의를 들으러 나갔다. 궁하면 통한다고. 고 씨의 절박함이 우등생으로 만들었다. 수강생 중 한국어를 제일 잘하면서 주말이면 베트남 근로자들이나 이주민들을 상대로 한 통역 자원봉사를 했다.

    2008년 아예 경남이주민센터에 상근자로 나갔다. 이듬해 남편이 동남아인들을 상대로 하는 가게를 열었고, 고 씨는 3년 정도 이주민센터에 근무했다.



    시도 때도 없이 “도와주세요”

    경남이주민센터에 근무하면서 국내 베트남 이주민들과 근로자들에게 자신의 연락처가 많이 알려졌다. 그들에게서 지금도 ‘SOS’ 전화가 끊이지 않는다.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설명을 못하겠다며 물어온다. 증상을 듣고 의사에게 전화로 설명해준다. 의사로부터 처방을 듣고 다시 환자에게 설명한다.

    한국인 남편에게 맞았다며 도와달라고 울면서 전화올 때도 있다. 어렵게 취업한 회사에서 의사소통이 안 된다며 전화가 온다. 가게일을 못 볼 정도다.

    “그들은 당장 답답해서 전화한 어려운 사람인데, 매정하게 끊을 수가 없어요. 나도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언어장애인이었어요. 옛날 생각하면 못 끊어요.”

    심지어 잘 모르는 사람에게서도 전화가 온다. 고 씨 번호를 서로 알려주면서 전파가 된 것이다.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구세주 같은 번호다. 상대는 답답하니까 막무가내로 도와달라고 한다. 이쪽 사정은 생각지도 않고. 경기도에서 병원가야 한다며 밤중에 콜택시를 불러 달라고도 한다. 친절한 고 씨는 인터넷을 뒤적여 콜택시를 불러 준다.



    법정 통역인 “가슴 아파요”

    기자가 고 씨를 처음 만난 곳은 창원지방법원 법정에서다. 형사법정에서 베트남 피고인을 통역하는 고 씨를 보면서 유창한 한국어에 한국인인 줄 알았다. 법정 통역을 맡은 것은 2008년부터라고 한다. 경남이주민센터에 근무할 때 법정 통역인으로 추천됐다. 한국인도 생소한 법률용어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법률용어가 너무 어려웠어요. 도리가 있나요? 인터넷을 뒤적여가며 공부를 했습니다.” 하루에 법률용어 하나씩 배운다는 자세로 공부를 했다. 때로는 길게 이어가는 판사님의 말씀을 따라잡지 못해 멍해지기도 했다.

    범죄를 저질러 남의 나라에서 재판을 받지만, 자신의 잘못을 정확히 알고 죗값을 치러야 한다.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잘못했으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지만, 선고가 나고 나면 마음이 편하지 않아요.”

    5년째 법정 통역을 하면서 살인범을 비롯 사기도박, 성폭행, 공갈 등 어지간한 사건은 거의 다 해봤다. 법정 통역인이 법정에서 통역만 하는 게 아니다. 재판에 들어가기 전 공소장을 번역해 국선변호인에게 전달하고, 피고인에게는 재판절차를 설명해줘야 한다. 국선변호인과 교도소에 가서 미결수를 접견하기도 한다.

    “법정에 서면 베트남인들은 자기 주장을 잘 못합니다. 그냥 도와달라고만 합니다. 말을 잘 못합니다.”



    한국 아줌마된 고 씨 “장사 안 돼요”

    그에게는 초등학교 3학년생 아들만 하나 있다. “너무 힘들어서 하나만 낳았는데, 외로워 보여서 지금은 하나 더 낳고 싶다”며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단다.

    학원 다니는 시간 맞춰 아들 챙기고, 남편과 교대로 가게 나가고…. 한국인 ‘아줌마’가 다 됐다. 친정 부모님도 한국으로 들어와 고 씨 가게 옆에 쌀국수 식당을 개업했다. 이쪽 저쪽을 바쁘게 오간다.

    “장사가 잘되냐”고 물었더니 “슈퍼는 10원짜리 모으기”라며 미래를 걱정했다. 대형 마트들이 외국식품 코너를 잇따라 내면서 3년을 넘기기 어려울 것 같다며 얼굴이 어두워졌다. 베트남 출신의 불법체류자가 양산되면서 정부에서 입국자를 조정해 베트남인 숫자가 줄고 있는 것도 이유다.

    베트남인들의 ‘민원 해결사’이자 ‘고충처리인’인 사람 좋은 고 씨는 오늘도 한국에서 한국인보다 더 열심히 살아간다.


    글=이학수 기자 leehs@knnews.co.kr

    사진=성승건 기자 mkseong@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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