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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9월 25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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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품을 말한다 (48) 도예가 최봉수

틀을 깬 도자… 그 안에 감춰놓은 추억들

  • 기사입력 : 2013-09-09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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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봉수 경남대 산업디자인학과 교수가 초벌구이를 끝낸 작품을 살펴보고 있다./김승권 기자/


    내심 매끄럽고 세련된 그릇들을 떠올렸다. 둥글한 항아리나, 크고 작은, 깊거나 얇은 것들.

    은은하게 반들거리는 유약이 발린 도자는 아닐 수 있지만, 곱고 무겁게 다진 흙 자체의 매끈함은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상상과 기대는 한순간에 깨졌다.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값싼 사기그릇처럼 ‘와장창’.

    도예에 대한 흔한 상상과 기대를 뛰어넘는 당황스러움을, 한 시인은 이렇게 풀었다.

    장자가 그릇을 들고 있다/ 그릇 속에 우주의 배꼽이 꿈틀거린다/ 북쪽 깊은 바다에 사는 곤(鯤)인지/ 하늘로 솟구지는 대붕(大鵬)인지/ 장자에게 물었다/ 장자는 답하지 않고 저자로 사라졌다/ 장자가 엎어두고 간 그릇을 들어보니/ 삼라만상이 고스란히 한 그릇이다/ 내 좁은 소갈머리를 목탁처럼 치며/ 봄과 가을사이 매미가 요란하게 운다.

    정일근 경남대 교수의 시 ‘장자의 그릇- 최봉수 도공께’다. 정 교수는 평소 존경하는 선배 교수를 위해 지었다고 덧붙였다.

    도자(陶磁)도 시(詩)도 여전히 난해하고 오묘하다.

    도예가 최봉수(경남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교수)의 작업은 각(角)지고 반듯하다.


    ◆반듯한 세라믹 판에 잊어서는 안될 것들 오브제로 형상화

    학과 동(棟) 한편에 자리한 작업실. 막 초벌을 끝낸 작품들은 모두 정사각형에 가까운 네모 모양을 하고 있었다. 네모진 세라믹 판(版)에는 다양한 오브제가 얹혀 있다. 초기 작품을 제외한 최봉수 교수의 전형적인 작품 패턴이다.

    그는 오브제를 통해 전해 주고픈 이야기와 메시지를 담는다. 메시지의 주어는 ‘시간의 흐름’이다. 지나왔고, 또 지나갈 시간을 조형적으로 붙들어 놓기는 좀체 쉽지 않은 일이지만 끈질기게 해왔다.

    그는 자신의 주변에 머물렀던 것들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그것이 나무판자든, 돌이든, 조개껍데기든. 빨래판이나 녹슨 못이든.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이라면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최 교수는 “점점 희미해지지만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형상화해 오브제로 삼았다. 그곳에는 소중한 나의 추억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며 “누구나에게 시간은 중요하고, 특히 나에게는 결코 지워서는 안 될 절대적인 것이다. 찰나(刹那)에 불과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남기려고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극사실에서 매스의 중량감으로

    최 교수는 초기 작품에서 사물의 극사실 표현에 집중했다. 형태는 반공예적인 시도로, 철저하고 세밀한 묘사를 통한 사물 재현이라는 방법으로 공예의 기능적인 면을 거부하고 있다.

    이 같은 작품 추구는 그의 대학원(부산대 미술학과) 논문인 ‘도예 표현의 다양성에 대하여’와 궤를 같이한다. 전통 도예 표현을 조사한 결과 그는 우리네 도자가 도자기의 공예적인, 기와 같은 건축적인, 토우와 같은 조각적인 것 등이 혼재돼 다양한 쓰임새를 보이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이 같은 다양성에서 쓰임새를 뺐다. 쓰임에만 국한된 공예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해석에서다.

    그가 선택한 사물은 판자로, 작업장과 집 주변에 흔하게 뒹굴고 있던 것이었다. 생선상자, 또 뜯겨 나간 적산가옥(敵産家屋)의 파편, 이들에 배인 역사적 아픔과 고단한 삶의 체취를 도자로 남기고 싶었다.

    나무 판자에 대한 작가적 감성, 여기에 도자가 보여주는 현상, 즉 상자처럼 보이기 위해 흙을 주물렀다. 다소 거친 느낌이 나지만, 결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는 조심스러움으로 지나온 시간을 함축하고자 했다.

    그의 작품은 90년 중반 들어 다소 변한다. 상자를 이루는 하나하나의 판자가 아닌, 전체 매스(덩이)에 중점을 두게 된다. 덩어리가 갖는 응축된 힘을 강조한 그의 작품은 이때부터 훨씬 중량감이 있고, 프로페셔널한 느낌을 강하게 풍기게 된다. 최 교수는 “메시지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지만, 다소 무거워진 작품은 내면의 안정과 기술적 진보라고 자평한다”고 했다.



    ◆오브제는 나의 스토리…교환교수 시절 회화성 강조한 평면 시도

    2000년 초 매스에 변화를 시도했다. 덩어리가 주는 감각적 요소는 훌륭하지만, 스토리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스토리의 재료로 현판, 나무조각. 못, 조개껍데기, 돌 등이 등장하게 된다. 최 교수가 끊임없이 지켜온 낡은 기억들, 시간과 기억의 소재들이다.

    널빤지 조각은 그의 유년시절과 역사적 인식을, 조개껍데기는 연인의 추억을, 빨래판 조각에는 어머니를 담았고, 못과 돌 등은 이전의 시간과 현재를 묶는 매개체로 활용하게 된다.

    그는 “훨씬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전할 수 있었다. 이때의 오브제들은 현재의 작품들에까지 큰 영향을 주게 됐다”고 말했다.

    이는 도자 고유의 기능인 그릇 즉 용기(用器)로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공간의 확보이며, 그릇이 하나의 형이상학적 사유의 얼개가 될 수 있음을 알아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전 작품들에서도 그릇 고유의 기능을 뛰어넘긴 했지만, 보다 풍부한 메시지들을 담음으로써 완숙미가 더해지게 된 것이다.

    그는 2004년 또 하나의 변화에 직면한다.

    일본 나고야 예술대 교환교수로 재직했던 2004~2005년, 평면에 눈을 돌리게 된다. 전시와 작품 이송(移送) 등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현지에서 발견한 원형의 장독 건조대에 눈이 꽂혔다.

    100년 이상된 둥근 건조대는 그가 이제껏 해왔던 세라믹 나무판을 대신해 그 위에 오브제를 바로 적용할 수 있는 편의성이 좋았다.

    최 교수는 “보다 오브제에 중점을 두고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세라믹 부조에 가까운 형태로 다양한 오브제의 배치를 통해 흘러간 시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며 “건조대라는 하찮은 기물을 이용해 시간에 대한 기억을 정리하고 회화성도 끌어 올릴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입체성에 갈증…또다시 매스 위에 오브제 작업

    최 교수는 귀국 후에도 건조대 판자 위 작업을 계속한다. 건조대는 시간적인 표현력이 좋은데다 고유의 형태가 예뻤기 때문이다.

    건조대에 덧댄 작품은 건조대와 절묘한 매칭을 이뤘다. 건조대의 결이나 표면은 자체의 시간과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고, 작품을 도드라지게 하는 액자 역할도 했다.

    이러기를 몇 년. 조형에 대한 갈증이 났다.

    건조대 작업은 회화에 무게가 더해진다. 평면은 회화성을 표현하기에는 좋지만 입체성이 부족하다.

    회화와 입체의 딜레마는 2010년쯤 풀리고, 방향을 틀었다. 다시 매스에 오브제를 첨가하는 형태로 전환했다. 하지만 크게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회화의 자유스러움에 오랫동안 빠져서일까. 너무 형태적으로 흐른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유약 처리를 통해 회화적인 요소를 표현하려는 시도를 해봤지만, 여전히 성에 차지 않는다.



    ◆쓰임새와 아름다움의 조화로운 매치에 고민

    최 교수의 작업에 대한 갈등은 여전히 진행형으로 보인다. 갈등은 그가 흙을 만진 이후 계속된 것으로, 자신이 찾고, 간직하려는 시간의 흐름을 완벽하게 정형화하기 위한 열정이다. 언뜻 과거에 천착하는 느낌마저 있지만, 기억은 그의 작품에 없어서는 안 될 핵심적인 에너지다.

    그는 지난해 의령군 칠곡면 한 전원마을에 집을 지어 이주했다. 집 이름은 이예당(怡藝堂)으로 후배 교수인 정일근 시인이 지었다고 한다. 그는 이곳에서 마지막이자 새로운 작업을 계획하고 있다.

    최 교수는 “오브제를 사용하는 서구적인 개념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물레 등을 이용한 전통적인 공예 형태의 도예를 시도하려고 한다”고 했다. 도자에 기능성을 부여하겠다는 것으로, 오브제 또한 기능적으로 재해석해보겠다는 얘기로 들린다.

    따라서 향후 그는 공예 본래의 의미인 쓰임새와 오브제를 이용한 아름다움을 조화롭게 매치시키는 것에 고민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쓰임새에 대한 재해석에 고심하고 있다. 공예의 기능성과 조형성이 적절하게 어우러진 새로운 도자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다”며 “어떤 형태든 그 속은 내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와 기억들로 채워질 것이다”고 말했다.

    이문재 기자 mjlee@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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