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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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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김형태 경남과학기술대 배구부 감독

15년 만에 돌아온 코트서 ‘우승 연금술사’ 꿈꾼다

  • 기사입력 : 2013-09-13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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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프리카에 동계 스포츠 종목이 만들어진다면’ 당장 “터무니없는 소리 말라”는 반응이 예상된다.

    그러나 황당한 일이 지난 1988년 자메이카에서 실제로 벌어졌다.

    겨울조차 없는 나라의 실화는 영화 ‘쿨러닝’(1993)으로 소개돼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은퇴한 미국 국가대표 출신 감독이 오합지졸의 자메이카 선수들을 이끌었고

    지난 1988년 캐나다 캘거리 동계올림픽에 출전했다.

    프로·실업팀 하나 없는 지역에 대학 배구팀이 처음 창단한다면 어떨까.

    사람들은 허수아비팀이나 도깨비팀쯤으로 여길지 모른다.

    지난 2008년 창단한 도내 유일의 대학 배구팀, 경남과학기술대학교 배구부의 이야기다.

    배구 국가대표를 지냈던 김형태(55) 감독은 창단 초기 대학 지명조차 받지 못한 선수들로 꾸린 이 팀을

    대학배구리그에서 강팀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만들었다.

    대학배구 돌풍의 핵으로 불리는 경남과기대 배구부 김 감독을 만났다.


    ◆화려했던 과거= 지난 1977년 가을 브라질에서 열린 제1회 배구 세계 청소년 선수권. 당시 김형태 선수는 주특기인 백어택(공격라인 뒤에서 공격)으로 체격 좋은 외국팀을 차례로 무너뜨렸다. 키 188㎝, 몸무게 88㎏의 만 18세 소년은 국내 배구판에 눈도장을 찍었다. 1978년부터 5년간 그는 배구 국가대표 주전 레프트였다.

    이듬해 김 감독은 진주 동명고를 졸업하고 경기대에 진학했다. 각종 대표 경력을 갖고 있던 그는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활약했다. 김 감독은 아직도 자신의 대학리그 데뷔 무대인 1978년 3월의 대학 춘계연맹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인하대와의 경기에 첫 세트부터 출전했는데, 긴장감 탓인지 선배들의 주문이 ‘웅웅’댈 뿐 접수가 안 됐어요. 2세트부터는 백어택도 하고 점수를 올리기 시작했죠.”

    당시 경기대는 인하대를 상대로 3대 0 완승을 거뒀다.

    그는 실업팀에서도 승승장구를 이어갔다. 1983년 현대자동차서비스에 입단한 김 감독의 활약은 당시 언론에도 잘 나타나 있다. ‘타점 높은 강타와 블로킹으로 위기 때마다 현대를 살려냈다’(동아일보, 1983년 6월 22일), ‘국가대표 김형태의 노련미에…서울시청을 3대 0으로 완파’(매일경제, 1986년 1월 13일) 등의 자료가 눈길을 끈다.

    그는 “당시 실업팀에는 현대를 포함해 종합화학, 럭키금성, 한국전력, 고려증권이 있었어요”라며 “1984년부터 슈퍼리그 3연패를 달성했던 것을 잊을 수 없다”고 회상했다.


    ◆은퇴… 15년 만에 돌아온 배구판= 김 감독은 만 28세가 된 1988년 은퇴하고 소속팀에서 코치를 시작했다. 그러나 5년간의 지도자 기간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는 “속된 말로 배구에 회의를 느꼈죠. 1위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 스트레스가 엄청났어요”라며 담배 연기를 길게 뿜었다. 결국 지난 1993년 6월, 코치직을 그만두고 현대자동차서비스에 사원으로 입사했다. 김 감독은 회사원으로 평범하게 살면서도 배구를 잊지 못했다. 올해 월드리그에서 국가대표로 선발된 배구선수 김광국(27·우리카드)이 그의 아들이다. 응원차 아들의 경기를 보러 갈 때마다 김 감독은 가슴이 뛴단다. 그는 “배구판에서 몸은 떨어져 있어도 아들의 경기를 볼 때면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고 말했다. 때마침 경남과기대에서 감독직을 제안했다. 아내는 당연히 반대했다. 김 감독은 “아내가 직장생활에 적응도 됐는데, 편안하게 직장생활을 하라고 조언했다”며 “그래도 제자들과 함께 땀을 흘릴 수 있는 기회를 어떻게 버리겠느냐”고 반문했다. 2008년 김 감독은 15년 만에 배구판으로 돌아왔다.


    ◆나사와 볼트는 어디에…= 대학팀을 꾸린 첫해, 그의 팀은 볼품없었다. 간신히 끌어모은 재학생 중에는 친구를 따라 동아리로 생각하고 들어온 학생도 있었다. 그해 진주 동명고와의 연습경기에서 팀은 참패했다. 그는 곧바로 전국을 돌며 창단 멤버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올해 4학년이 된 진주 동명고 출신 정민수, 강원 속초고 출신 용동국, 서울 인창고 정명호 선수 등 9명을 스카우트했지만 그중에 6명이 빠져나갔다. 김 감독은 인창고는 일곱 번, 속초고는 세 번이나 방문했지만 되돌아온 것은 학부모들의 싸늘한 시선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학부모들은 우리 배구부가 시합이나 뛸 수 있을지 반신반의했다”며 “특히 실업팀인 화성시청으로 가려던 용동국을 잡으려고 하루 16시간 동안 운전을 한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용동국 선수가 실업팀에 진출하려던 이유는 대학팀의 지명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2명의 선수도 상황은 마찬가지. 그러나 이들 4학년 3인방은 올해 프로팀에 당당히 지명될 정도로 괄목상대할 정도로 성장했다. 우리카드는 정민수(리베로)를 2라운드 4순위, 용동국(레프트)를 수련생 4순위로 선발했고, LIG손해보험은 정영호(레프트)를 3라운드 5순위로 뽑았다.


    ◆1승을 추억하고, 1위를 희망하다= 지난 2009년 춘계연맹전 당시 정민수 선수를 포함한 9명의 1학년 선수가 주축이 된 경남과기대는 성균관대(1대 3)와 경희대(2대 3)에 연패한 후 오히려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 김 감독은 “강팀과의 경기에서 세트를 빼앗았다는 경험이 중요하다”며 “이어진 건동대(현 중부대)와의 경기에서 3대 0 완승을 거둘 수 있었던 동력이었다”고 말했다. 이날 승리는 경남과기대가 공식 경기에서 거둔 첫 번째 승리였다.

    경남과기대 배구부는 매년 주전 멤버를 보충하며 점차 승리의 자신감을 키워 갔다. 급기야 2011년 10월 제92회 전국체전에 경남대표로 출전한 김 감독의 팀은 예선에서 건동대를, 8강에서 동아대를 꺾고 4강에 진출하면서 동메달을 차지했다. 이어 작년 전국체전 예선전에서 서울 대표인 한양대를 맞아 3대 0으로 완파하는 이변을 연출했고, 이어 조선대를 꺾고 2년 연속 동메달을 얻었다. 당시 2부 리그 소속팀이었고, 정민수(아킬레스건 부상)와 정영호(손가락 골절)가 부상으로 전력에서 제외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괄목할 만한 성적이다.

    올해 처음 대학 1·2부 통합 대학배구리그에서 5승 5패로 창단 5년 만에 ‘돌풍의 핵’으로 성장했다. 리그에서 경희대를 상대로 첫승을 했고. 한양대, 조선대를 상대로 파죽의 3연승을 거뒀다. ‘한 세트의 25점은 한꺼번에 얻을 수 없다’는 게 김 감독의 지론이다. 그의 목표는 확고하다. 김 감독은 “지방팀도 대학리그에서 우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며 “반드시 정상에 서겠다”고 밝혔다. 오는 10월 전국체전에서 김 감독의 팀이 어떤 감동을 선사할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글= 정치섭 기자·사진=성승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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