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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떠나는 경남산책 (67) 박서영 시인이 찾은 영남 알프스 억새평원

억새바람 속삭인다… 일어나요, 괜찮아요

  • 기사입력 : 2013-10-15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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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남 알프스 억새평원
    간월재
    영남알프스 풍경


    수크령. 사나운 이리의 꼬리를 닮은 풀을 말한다. 얼핏 보면 강아지풀을 닮았는데, 강아지풀보다는 탐스럽고 크다. 가을날 산길을 오르다 보면 종종 만나게 되는 수크령은 야생의 짐승을 떠올리게 한다. 그때 떠오른 짐승이 이리, 여우, 노루, 사슴, 멧돼지든 무슨 상관이랴. 어느 날 밤 국도에서 내 차에 치일 뻔했던 고라니, 어느 날 새벽 산책길에서 우연히 만났던 멧돼지 가족. 사라질 때 얼핏 봤던 그들의 꼬리는 희미해지기는커녕 점점 더 선명해진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예요. 그 말을 위로 삼아 그냥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내 슬픔이 나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나는 나를 이겨내고 밖에 있는 당신을 향해 뭔가 말을 걸고 싶어진다. 똑똑하고 현명한 야생의 정신이 되살아나 나를 이끌고 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하늘과 가까이, 구름도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곳, 영남 알프스로 출발했다.


    영남 알프스는 가지산, 운문산, 재약산, 간월산, 신불산, 영축산, 천황산 등 밀양, 양산, 울산을 걸쳐 솟아오른 해발 1000m 이상의 산군을 말한다. 영남알프스의 주요 산들을 둥글게 연결하는 등산로에는 구간마다 이름을 붙여 놓았다. 간월재를 시작으로 영축산까지 이어지는 억새바람길, 영축산에서 죽전마을로 내려가는 단조성터길, 사자봉까지 연결되는 사자평 억새길, 배내고개로 하산하는 단풍 사색길, 배내고개에서 간월재로 오르는 달 오름길 등 총 5구간이다. 내가 선택한 길은 ‘억새바람길’이다. 영남알프스 산군은 높고, 광활하다. 운동이라고는 동네 뒷산이나 둘레길 걷는 게 전부인 체력으로 9월에 영남알프스를 세 번 올랐다. 세상에 가장 탐험하기 어려운 곳이 타인의 마음이다. 또한 나는 나의 마음조차 아직 탐험을 끝내지 못했다. 일단 한 번 다녀오면 뭔가 손에 잡힐 것 같았다. 밀양을 지나 양산 배내고개를 시작으로 등산을 시작했다. 곧 몸에 신호가 왔지만 어느 순간 길은 겹겹의 산 능선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되었다. 산 능선을 따라 걸으며 이상한 평화를 느꼈다.

    간월재에 도착. 여기서부터 영축산까지 이어지는 ‘억새바람길’이 시작된다. 억새평원 사이에 길을 내고 걸을 수 있도록 해놓았다. 구름이 내 머리 위에서 흘러 다닌다. 팔이 조금만 더 길었더라면 구름을 만질 수 있을 터인데…. 나는 어느 순간 동화에 나오는 팔이 매우 긴 사람이 되어 구름을 만지고 있다. 목이 매우 긴 사람이 되어 구름을 먹고 있다. 구름과 놀고 있다. 날씨가 맑다. 바람도 상쾌하다. 억새 꼬리들도 살랑살랑 흔들린다. 아직 보랏빛을 머금은 채다. 수크령이라는 풀 이름에서 야생을 느꼈다면, 억새라는 이름에서는 바람새가 떠오른다. 억새도 시간이 지나면 점점 야생의 본능을 드러내며 갈기갈기 자신을 내보일 것이다. 끝내 바람 속으로 사라질 운명이지만, 누구나 한때 뜨거운 시간을 스쳐야 한다. 인생은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몸이든 마음이든 그렇다. 평원은 봄엔 초원이 되고, 가을엔 억새로 뒤덮인다. 이 평원에서 밤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곳에서 달이 뜬 것을 보지 않는다면 영남알프스 풍경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어느 선생님이 계셨다. 아그작아그작 달의 간을 깨물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간월(肝月), 달의 간이라니. 평원에 밤이 오면 노루, 사슴, 고라니, 여우, 멧돼지도 좋으니 나와 함께 달의 간을 먹으며 놀아줄 이를 찾아 헤매고 싶어진다. 그들이 한없이 그리웠다. 더군다나 가을밤엔 달 아래 억새가 출렁대는 모습이 장관이라고 한다. 나는 그 모습을 본 것도 아니면서 억새가 달을 간질이며 노는 모습을 상상했다. 계획을 세우며 두근거렸던 가슴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무데크에 텐트를 치는 사람들을 보니 괜스레 질투가 났다. 저 사람들은 보고 나는 못 보는 평원의 밤이여, 밤의 친구들이여, 거창한 우정의 맹세라도 한 것처럼 나는 다정하게 중얼거렸다. 기다려 달라고, 꼭 기다려 달라고.

    간월재에서 영축산 방향으로 산 능선을 타고 간다. 오르락내리락 숨이 차다. 나는 쓰러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걷고 있었다. 마치 나와의 긴 싸움 같았다. 내게서 나를 떠나보내고, 당신을 들어앉히려고 나선 길인데 뭔가 잘못된 걸까. 아무튼 내 슬픔을 쫓아내려면 나는 나와 싸워야 한다. 고질병이다. 나는 조금 더 놀 수 있어야 한다. 문학과 삶과 그리고 당신과 즐기면서 함께 갈 수 있어야 한다. 건들건들 억새를 흔들어대는 바람이 좋다. 하얗게 머리를 풀어헤치고 풍화되어버린 억새를 보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겠지. 신불산을 넘어 영축산까지 가는 길은 아늑하고 부드럽다. 멀리 영축산이 모습을 드러내자 무릎이 풀린다. 검은 새 한 마리가 활공하고 있다. 겹겹으로 굽이치는 산 능선 위를 자유롭게 날아간다. 사람에게는 날개가 없기 때문에 마음껏 꿈을 꾸고 지혜로 그 꿈에 도달하라고 머리와 심장이 있다. 사람들은 똑똑한 머리로 비행기를 만들고 열기구를 만들고 패러글라이더를 만들었다. 새를 꿈꾸면서 비행을 그리워하다 보니 이루게 되었다. 나도 새를 그리워한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 가장 큰 새. 멸종되어 버린 새. 울음이 고운 새. 날지 못하는 새. 날아가 버린 새. 어릴 때 내가 앵두나무 밑에 묻어준 새. 억새도 새의 이름을 가져서 언젠가 날아가 버릴 것이다. 우리는 모두 새의 깃털을 하나씩 가졌다. 그것이 희망이다. 어느 날 우연히 내게 떨어진 깃털. 부드럽고 아름답지만 깃털의 실체는 어디 있나. 내가 꼭 움켜쥐고 있는 이 깃털은 도대체 어떤 새가 떨어뜨리고 간 것인가.



    여기에 누군가가 보낸 작고 귀여운 새가 있어요. 바람과 함께 살기 위해 지구로 내려 왔어요. 바람 속에 태어나서 바람 속에 잠듭니다. 누군가가 보낸 이 작은 새. 그 새는 가볍고, 부서질 듯 연약하며, 하늘색의 깃을 가지고 있어요. 바람 위에서 사는 작은 새. 누군가가 보낸 이 작은 새가 하늘 높이 납니다. 인간이 볼 수 없는 높은 곳까지. 이 작은 새는 땅을 밟는 순간에 죽어 갑니다.

    -작은 새. 마리안 페이스풀



    하늘 아래 가장 아름답다는 억새밭 가운데 앉아 있으니 마리안 페이스풀의 허스키하고 고급스러운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무겁지 않고 가볍지도 않은 노래. 슬프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묘한 목소리를 가진 영국의 여성가수. 죽을 때 겨우 땅에 발을 내려놓는 작은 새를 생각한다. 당신과 나도 바람 속으로 여행하는 작은 새처럼 꿈의 깃털을 떨어뜨리며 날아간다. 언젠가는 땅에 딛게 될 한없이 작은 맨발. 우리는 서로의 맨발을 잠시 바라본 적 있나. 이제부터라도 그 고단한 맨발을 애틋하게 바라봐 주도록 하자.

    억새가 나를 스쳐간다. 간혹 그리움이 깊어져 나를 허물어버리기도 했으리라. 이젠 무너진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울 때다. 언젠가는 억새처럼 하얗게 자신을 바람 속에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응원해야 한다. 그 길에 당신이 함께 있어 견딜 만하다. 한때 윤종신의 ‘2시의 데이트’를 즐겨 들었다. 그의 마지막 멘트는 언제나 ‘자신 있죠!’였다. 운전을 하고 어딘가에 가면서 나는 그 멘트를 들을 때마다 얼마나 울컥했던가. 괜스레 심장 깊숙이 숨어 있는 나의 자아를 들여다보게 된다. 당신이여. 오늘은 햇살도 좋고 바람도 좋고 색깔도 좋은 날이다. 나는 억새평원에 주저앉아 당신을 생각한다. 괜찮죠. 그리고 자신 있죠! 억새평원의 바람이 당신에게 건네는 말이다. 이 말이 날아가 당신의 가슴에도 단단히 내려앉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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