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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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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환 작가의 인도 아요디아에서 김해까지 ③ 아요디아(Ayodhia)

수로왕릉의 두 마리 물고기, 인도땅에서 드디어 만났네
라마왕의 일대기 ‘라마야나’의 배경이 된 인도 북부 아요디아는
허황옥 공주의 고향인 ‘아유타국’으로 추정된다

  • 기사입력 : 2013-10-16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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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도 갠지스강 중류 아요디아의 한 사원에서 발견한 쌍어 문양. 이 두 마리 물고기 문양은 김해 수로왕릉의 정문에서도 발견돼 허왕후가 인도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강력한 증거로 여겨진다.
    아요디아의 사류 강변 가락공원에 세워져 있는 허왕후 유허비.
    아요디아에서 만난 소녀.
    미쉬라 왕조의 라즈사단 궁전.
    아요디아의 힌두사원 앞을 지나는 사람들.


    ‘신들의 전쟁터, 신들이 만든 비극의 땅, 테러, 총격, 유혈 충돌, 2000명 이상 사망, 폭력사태를 막고자 군경 병력 수십만 명 배치….’인도 매체에 오르내리는 아요디아(Ayodhia)의 최근 소식이다.

    아요디아는 산스크리트어로 ‘대항하여 싸울 수 없다’는 뜻이다.

    인도의 대서사시 라마야냐의 배경이 된 아요디아는 라마의 탄생지로 아요디아 사류 강변의 모든 사원이 라마왕에 관한 이야기로 만들어졌다. 라마야나(Ramayana)는 산스크리트어로 ‘라마의 여정’이다.

    라마왕의 일대기라는 뜻으로 고대부터 전해내려온 비슈누신의 화신 라마의 이야기를 기원전 3세기경 시인 발미키가 엮어낸 후 힌두교의 경전으로 여겨져온 책이다.

    왕위를 뺏기고 유랑길에 나선 라마가 마왕에게 아내를 납치당한 뒤 원숭이 군대의 우두머리 하누만의 도움으로 아내를 구출하고 왕위에 오르는 모험담 속에 인간사의 규범과 철학이 두루 담겼다.

    아요디아 왕국의 라마왕에 관한 이야기들은 힌두사회의 행동윤리처럼 퍼져 있다. 라마의 이야기는 아요디아 사람들의 삶을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고고학자 김병모 교수의 역사추적 시리즈를 통해 아요디아를 알게 됐다. 김병모 교수는 아요디아와 김해의 관계를 쌍어무늬를 근거로 수년간 현지 답사하며 ‘허황옥루트 인도에서 가야까지’를 저술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 편에도 서기 48년 인도 아유타국(현 아요디아) 왕실의 허황옥은 먼 항해 끝에 당시 철기문화를 꽃피웠던 해상왕국 가락국에 도착해 수로왕과 혼인했다고 기술돼 있다.

    수로왕비릉에 가면 허황옥이 배에 싣고 왔다는 파사석탑이 보존돼 있다. 김 교수는 그것을 근거로 허왕후의 고향인 아유타국은 ‘아요디아’ 지방일 것으로 추정했고 두 마리 물고기 문양을 따라 지금의 중국 사천성 안악현(옛 보주) 서운향에 있는 보주 허씨 사당에 이르기까지 답사했다. 김 교수의 답사길을 다시 밟아 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새삼 책임감이 느껴지면서도 설레는 맘을 감출 수 없었다.

    “미쳤어 너, 역사학자야? 종교 전문가야?”

    내가 머물던 호텔의 시크교도인 사장은 벽에 매달린 TV를 손으로 가리켰다. TV에는 강변의 선분홍색 사원을 배경으로 군경과 주민들이 인터뷰하는 모습들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이 뉴스가 아요디아에 관한 것이라고 내게 일러 주었다. 아요디아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도로가 차단되고 모든 기능이 멈추었다. 군경만이 거리를 메우고 있다는 속보가 계속 보도되고 있었다. 나는 시작부터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여행할 곳은 얼마든지 많아.”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극구 말렸다. 그리고 나를 에스코트할 사람을 섭외해 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동여매던 배낭을 다시 내려놓았다.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틀간의 고민 끝에 결국 나는 차를 빌려줄 만한 에이전시를 직접 알아보기로 했다.

    다시 짐을 꾸리고 속도를 내 아요디아로 향했다. 아요디아는 뉴델리의 동쪽 555㎞ 인도 북부 유타르프라데시주 파이자바드 행정구에 있는 도시다. 많은 인도의 도로를 달려보았지만 아요디아로 향하는 길은 잘 닦여져 있고 정비가 잘돼 있었다. 밤 10시 출발한 차는 다음 날 정오께 도착했다. 예상대로 군인과 경찰이 거리 곳곳에 배치돼 있었다. 난 먼저 커다란 대포 같은 렌즈와 카메라를 숨겼다. 뜨거운 한낮, 예상과 다르지 않게 무장 군인들이 우리를 가로막았다. 많은 차들이 아요디아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군경의 심문을 받고 돌아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Go back(되돌아 가시오).”

    나를 대한 그들의 첫 마디였다. 군경들은 단호했다. 난 할 수 없이 연락처를 뒤져 아요디아의 왕손 빔렌드라 미쉬라(Mishra·57) 씨에게 전화했다. 그는 내가 타고 있는 차량번호를 묻고 전화를 끊었다. 이글거리는 태양 속에 그늘 한 점 없는 바리케이드 앞에서 그의 전화를 기다렸다. 목이 바싹 타고 피가 마르는 듯한 순간이었다.

    미쉬라 왕조의 후손인 미쉬라 씨는 이미 김해 김씨의 후손들과 조우하고 김해시와도 인연을 맺고 있었다. 가락중앙종친회(김해김씨 종친회)는 지난 2000년에 한국의 대리석으로 만든 허왕후 유허비(遺墟碑)를 아요디아로 가져갔다. 그의 도움으로 인도 정부는 아요디아의 사류(Saryu) 강변에 유허비를 세우고 ‘가락공원’이라 이름 지었다. 그는 인도와 한국 양국관계를 돈독히 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도 일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쉬라 씨의 도움으로 뜨거운 태양을 피해 수많은 바리케이드를 무사히 넘었다. 100여 ㎞부터 봉쇄당했던 길을 미끄러지듯 빠져나와 아요디아 도심에 있는 미쉬라왕조의 라즈사단(RajSadan) 궁전에 도착했다. 유럽풍 정원이 있는 성은 매력적이었고 아요디아에서 가장 큰 건축물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왕족의 기품을 지닌 미쉬라 씨는 나를 환대해줬다. 100년이 넘은 라즈사단 궁전에는 9명의 미쉬라 가족과 10여 명의 집사들이 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와의 짧은 대화를 끝내고 아요디아에서 많이 발견되었다는 두 마리 물고기 문양을 확인하고 싶어 지체없이 거리를 나섰다.

    긴장이 흐르는 아요디아 사원을 둘러보았다. 거의 모든 상점이 닫혀 있었다. 두 마리 물고기 문양이 있는 몇몇 사원 근처 일부 거리는 완전히 통제되고 있었다. 나는 사원의 정문에서 두 마리 물고기 문양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가까운 다른 사원에서도 그 문양을 볼 수 있었다. 모두 정문 문설주에 새겨져 있었고 그림으로 그려진 것은 색감이 화려하고 칠의 흔적이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요디아의 사원에서 찾아낸 쌍어 문양은 나를 흥분시켰다. 그것은 2000년 전 허황옥 공주가 아요디아에서 가야로 향하다가 남겼을 만한 오래된 증거물이기도 하지만 미래 ‘Asia Forever Romance Road’로 향하는 주요 이정표나 다름없기에 이번 여행의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촬영을 금하는 엄격한 통제에 부딪혔다. 나는 군인들의 눈을 피해 간신히 몇 장의 사진을 찍고 해가 지는 고그라강(江)변을 따라 짙은 향내가 나는 힌두사원으로 향했다. 오래된 사원 주위를 지나는 이들이 몸을 숙여 향을 켜고 경배하는 의식과 몸 동작은 경이로웠다.

    한낮 태양에 눈살을 찌푸리면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마리 물고기 형상을 바라보았다. 누가 왜 무엇 때문에 물고기를 신령스런 모습으로 만들어 내었는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인 의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두 마리 물고기가 마주보는 형상은 사원과 사찰 같은 종교적인 곳의 대문 중앙에 신령스럽게 새겨져 있다. 그것은 풍요와 조화 또는 평등과 평화 그리고 영원한 사랑과 같은 인간이 염원하는 모든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허황옥 공주의 고향 아요디아 사원에 그들의 염원을 담은 문양이 새겨진 것처럼 그녀가 영원한 사랑을 이룬 가야의 수로왕릉 안의 납릉정문에서 아직까지 두 눈을 뜨고 김수로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라즈사단 궁전에서 밤을 맞았다. 나는 마치 2000년 전 가야의 사신처럼 집사들이 내오는 음식과 차를 즐기며, 미쉬라 씨와 담소를 나눴다. 늦은 밤 궁전 뜰을 산책하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낮에 본 두 마리 물고기가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하늘에는 허황옥 공주가 영원한 사랑을 찾아 가야로 가는 길을 인도해 주듯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아요디아의 밤은 그렇게 깊어 갔다.

    언젠가 인도여행 중 누군가 내게 “바라나시를 보셔야 진정한 인도를 봅니다”라며 바라나시를 꼭 가 볼 것을 권유한 적이 있었다. 내가 본 아요디아는 바라나시보다 인도다웠고 종교적이었다. 누가 나에게 가장 인도다운 곳을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아요디아를 보셔야 진정한 인도를 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글·사진=남기환(사진작가·여행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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