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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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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떠나는 경남산책 (68) 김승강 시인이 자전거로 달린 마산임항선

항구로 달려가는 철길 따라
그리운 추억들 수놓입니다

  • 기사입력 : 2013-10-22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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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원시 마산합포구 월포동 고층 아파트 옆에 조성된 그린웨이.
    회산철교 부근 기찻길에서 막걸리잔을 나누는 노인들.
    옛 북마산역 뒤 철길. 포장이 되어 있지 않은 철길에선 옛 정취가 느껴진다.
    마산가도교를 지나서 만난 풍경. 색소폰 소리가 들려왔다.
    옛 북마산역이 있던 자리엔 공원이 들어섰다.


    자전거를 타고 철길을 달렸습니다.

    철길을 자전거를 타고 달렸습니다. 삼척이나 춘천, 정선, 문경, 양평, 섬진강 등에 있는 레일바이크를 탔냐구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TV에도 많이 나오죠. 오늘같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사랑하는 사람이나 가족과 함께 레일바이크를 타고 황금들판을 달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정말 눈이 부시게 푸른 날입니다. 시인은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고 했죠(서정주의 ‘푸르른 날’). 시인의 당부가 있기도 하고 하니, 철길(레일)을 자전거(바이크)를 타고 달리며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할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안성맞춤이겠군요. 그런 곳이 있습니다.

    항구로 가는 철길을 임항선(臨港線)이라고 한답니다. 항구로 이어져 있다는 뜻이겠죠. 처음 들어본 말인 것 같습니다. 아니 들어봤지만 그동안 잊고 있었던 단어인지도 모르겠군요. 우선 ‘항구로 가는 철길’이라, 무슨 시구 같지 않나요? 그런데 저는 항구로 가는 철길보다 ‘임항선’이라는 말에 꽂히고 말았습니다. 임항선이란 어느 특정 노선을 지칭하는 표현은 아니겠죠. 항구로 이어져 있는 철도노선은 우리나라에 여럿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어째서 저는 처음에 임항선이란 단어가 낯설었고 또 그 말에 꽂히고 말았을까요. 그건 아마 그 단어가 아득한 과거를 상기시키는 소리를 갖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말하자면 임항선은 그리움을 자아내는 단어였던 거죠. 철길이라는 단어도 그렇습니다. 요즘 누가 철길이라는 말을 잘 쓰나요. 그렇지만 우리가 가만히 ‘철길’ 하고 입 밖으로 말을 내뱉을 때 우리는 바로 그리운 과거로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항구로 가는 철길이 있었습니다. 아니 임항선 철로가 있었습니다. 그 끝에 분명 역이 있었겠죠. 그 역으로 기차들이 기적을 울리며 드나들었을 것입니다. 역은 항구로 이어져 있습니다. 항구에는 배가 드나듭니다. 간간이 뱃고동소리가 울렸습니다. 항구로 들어온 배가 싣고 온 화물을 하역하면 기차는 그 화물을 다시 싣고 내륙을 향해 달렸을 것입니다. 배와 기차가 공존하는 공간인 역 주변은 얼마나 번잡했을까요. 배에서 싣고 온 화물을 하역하는 부두노동자들과 배에서 내린 화물을 기차에 옮겨 싣는 역부들로 붐볐겠죠. 부두노동자와 역부들은 일을 마치면 가까운 선술집에서 함께 어우러져 술잔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술집들이 즐비했겠죠. 술집뿐이었겠습니까. 뒷골목으로 돌아 들어가면 여인숙들이 귀가하는 지아비를 기다리는 여인처럼 늦도록 불을 밝히고 거나하게 취한 사내들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배를 타고 들어온 먼 이국의 이방인이나 돌아갈 집이 마땅히 없는 부두노동자와 역부들은 여인숙을 찾아 피곤한 몸을 뉘었고 더러는 아침에 옆에서 곤히 잠든 낯선 여인을 발견하고는 했을 것입니다.

    ‘마산임항선’이 ‘그린웨이’로 거듭났다는 소식을 뉴스를 통해 들었습니다. 북마산역이 마산임항선에 속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임항선이라는 단어가 낯설어서 그런지 마산임항선이란 표현도 무척 낯이 섭니다. 그러나 북마산역이 거기 속해 있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친근해지면서 추운 겨울 따뜻한 차를 한 모금 마셨을 때처럼 몸이 조금 따뜻해지는 것 같네요. 외람되지만 나이가 조금씩 들어가면서 오감 중에서 청각신경이 더 예민해지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든 앞에 ‘북(北)’자가 들어간 말을 들을 때가 그렇습니다. 북마산역이 없어져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왜 하필 ‘북’자가 내 귀청을 때려 나를 울립니까. 임항이 그렇듯이 ‘북’도 그리움을 일깨우는 소리인 것 같습니다. 반공교육을 받은 세대라서 그런 걸까요. ‘북’ 하면 북구, 북간도, 북방, 북천 등의 단어가 떠오르고 동시에 애잔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심지어 북면이란 말을 들어도 그렇습니다. ‘북’이란 소리 속에는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래서 그리운 춥고 배고픈 시절의 애잔함이 녹아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가 저 북방 우랄알타이이족에 속해서일까요. ‘그린웨이’를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마산임항선이 완전 폐기되지 않고 그린웨이로 거듭난 것도 우리들의 이러한 정서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인 것이겠죠.

    ‘마산항 제1부두선’이라고도 불린 마산임항선은 1905년 마산선 삼랑진~마산포 구간이 개통하면서 영업이 시작되었는데, 경전선 마산역에서 마산항까지 총연장 8.6㎞에 이르는 철도노선을 말한다고 합니다. 임항선은 화물전용 노선으로 전환되기 전에는 인근 농촌에서 마산으로 통학하는 학생, 북마산역과 어시장 등으로 물건을 팔고 사러 나오는 상인들의 주요 교통수단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1977년 석전동에 통합 마산역이 신축되어 여객기능이 이전되면서 직통 형태의 선형으로 도심외곽으로 이설되었고, 이후 마산항으로 석탄이나 군수물자 등을 운반하는 화물전용 철도노선으로서 기능을 하다가, 그마저도 활용도가 떨어지면서 2011년 2월에 폐선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한편 그린웨이는 월포동 마산세관 맞은편에서 시작해 합포구청을 거쳐 3·15의거탑, 몽고정, 옛 북마산역, 석전사거리를 지나 석전동 개나리맨션까지 5.5㎞ 구간을 말한다고 합니다.

    선형으로 나타낸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표정을 보았다고나 할까요. 그린웨이 5.5㎞는 여러 가지 표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현대사의 단면을 상징할 수 있는 표정이 있는가 하면, 개발했다고 하지만 아직도 근대사의 표정이 남아 있는 구간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고층아파트가 들어서 있는 마산세관에서 합포구청 구간에서 현대사의 표정을 읽었다면, 회산철교 부근에서는 근대사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근대사의 표정은 회산다리 부근의 전통시장이 자아내는 분위기도 있겠지만, 일요일이라 그런지 나이 지긋한 노인분들께서 다른 구간과 달리 포장이 되지 않은 기찻길에 모여앉아 막걸리잔을 돌리고 계신 정겨운 광경에서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회산다리 부근은 전통시장의 분위기를 오랜만에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잠깐 노선을 벗어나 시장에 들러 과일과 저녁 찬거리를 산 것은 그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마산세관에서 출발하면서 제일 궁금했던 것은, 마산가도교 아래쪽 ‘유리집들’의 분위기가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젊을 때 그쪽으로 지나갈 때마다 거부할 수 없는 어떤 힘이 저의 시선을 끌었고, 실제로 한번 그 안으로 들어가 보기도 했으니까요. 예상했던 대로 비교적 정리가 잘되어 있었습니다. 3·15의거탑 건너편 일대는 주차장으로 정비되어 있었습니다. 돌아오다 들어가 봤는데, 유리집들은 여인숙이란 똑같은 크기의 작은 간판을 일제히 내걸고 낮임에도 잠들어 있었습니다.

    한 시 방향으로 3·15의거탑을 바라보며 마산가도교를 건너자 오른쪽 주택가 어디에선가 색소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요즘엔 색소폰 소리야 여기저기서 자주 들을 수 있지만 철길에서 듣는 색소폰 소리는 더 정겨웠습니다. 색소폰 소리는 자전거를 타고 철길을 달리는 나를 환영해주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색소폰 소리를 뒤로하고 더 달려나가자 건널목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건널목에서는 자동차를 만나면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옛날이라면 자동차들이 기차가 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했겠죠. 조금 더 가자 마침내 옛 북마산역이 있던 곳이 나왔습니다. 옛 북마산역 부근의 철길은 포장이 안 되어 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에서 그렇게 한 모양이었습니다. 옛 북마산역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더군요. 공원 중앙에는 작은 기념관 같은 건물이 있고, 그 이마에는 북마산역이란 글씨가 쓰여 있었습니다. 기념관 안에는 북마산역의 역사를 말해주는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중년의 남녀 몇 쌍이 의자에 앉아 옛 북마산역에 얽힌 추억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 본 곳을 어른이 되어 가보면 너무나 작게 보이는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옛 북마산역이 그대로 있었다 해도 그랬을까요. 옛 북마산역이 작은 기념관으로 바뀐 것이 조금 섭섭했습니다만, 그대로 있었다 한들 지나간 세월까지 잡아둘 수야 있었겠습니까.

    눈이 부시게 푸른 날이 아쉽게 저물고 있습니다. 시인의 당부대로 철길을 달리는 내내 당신을 그렸습니다. 어디선가 국화향이 나네요. 지금 항구는 시인이 좋아한 국화향으로 가득합니다. 머지않아 국화향을 좇아 많은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겠지요. ‘기찻길 옆 오막살이집’이 그리운 저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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