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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떠나는 경남산책 (70) 박서영 시인이 찾은 통영비진도

고독이라는 단어도 살아있는 동사가 되는 섬

  • 기사입력 : 2013-11-05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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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인도 전망대에서 바라본 비진도
    몽돌해변
    망부석
    모래해변
    비진암
    노루여
    팔손이꽃


    -우주에 오니 뭐가 좋아?

    -고요함이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어디 살아? 저 지구 아래 집이 어디야.

    -뭐가 제일 그리워?



    영화 ‘그래비티’에 나온 대사가 생각난다. 우주에 혼자 남겨진 사람의 고독이 잘 그려진 영화다. 고독, 비진도 내항선착장에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다. 비진도에 오니 뭐가 좋아? 고요함이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자문자답의 산책이 계속되었다. 나는 멸종된 여행 비둘기처럼 섬에 깃든 것이다. 이곳에서 나는 익명이다. 다 씻어내고 투명해져서 돌아가야 한다.

    비진도에 가면 팔손이꽃 군락지를 볼 수 있다고 했다. 꽃은 가을에서 겨울까지 핀다고 했다. 내항 선착장에 내리자마자 “지금 팔손이꽃 피었습니까?”하고 물어봤다. 돌아오는 대답이 이랬다. 팔손이도 꽃을 피우는가요? 그이는 팔손이에 관심이 없다 보니 꽃이 피는지조차 몰랐다고 했다. 가까운 사람은 모르고 먼 곳에 사는 사람은 알고 찾아왔다.

    거리가 무슨 상관이랴. 궁금하고 그리워하면 연락하게 되고 또 찾게 된다. 비진도 팔손이 군락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어쩌다가 팔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옛날 남쪽나라에 ‘바스바’라는 공주가 있었는데 열일곱 생일에 쌍가락지를 선물로 받았다. 시녀가 방을 청소하다가 양손의 엄지손가락에 각각 하나씩 반지를 껴봤는데 반지가 빠지지 않았다고 한다. 반지를 잃고 슬퍼하는 공주를 위해 반지를 훔쳐간 사람을 찾았는데, 시녀는 엄지손가락을 감춘 채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천둥번개가 치고 벼락이 떨어져 시녀가 팔손이나무로 변했다는 것이다. 꽃말이 ‘비밀’이다. 팔손이꽃이 피어 있다. 비진도 사람은 못 보았다고 했지만 나는 팔손이꽃을 찰칵찰칵 마음에 담았다.

    내항에서 30여 분을 걸어 외항마을에 닿았다. 비진도는 안섬과 바깥섬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연결된 길을 사이에 두고 해 뜨는 쪽은 몽돌해변이고, 해 지는 쪽은 은빛 모래해변이다. 모래 위에 새의 발자국들이 깊이 나있다. 손바닥을 대본다. 내 손보다 작다. 무슨 새일까. 세 개의 발가락을 모래 위에 쿡쿡 찍으며 어디론가 바삐 간 것 같다. 새의 발자국을 따라 걸으며 도착한 곳은 바다 백리 길 중의 하나인 산호길 입구다. 통영은 한려해상국립공원을 대표하는 ‘바다 백리 길’을 조성했다. 미륵도, 한산도, 비진도, 연대도, 매물도, 소매물도 등 섬 여섯 개를 둘러볼 수 있는 바닷길이다. 선유봉에 오르는 길은 ‘산호길’로 불린다. 비진도의 바다가 산호처럼 푸르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산호길 코스는 외항선착장에서 시작하여 미인도 전망대, 선유봉, 비진암으로 이어져 있다.

    바다 백리 길은 새로 만든 길이 아니라 섬사람들이 다니던 길을 그대로 살려놓았다고 한다. 걷다 보니 당단풍 아래 잠시 쉬고 있던 새가 놀라 날아가 버린다. 그 옆으로 각시투구꽃 군락이 펼쳐져 있다. 보라색과 파란색이 묘하게 섞여 있는 꽃이다. 우연히 마주친 각시투구꽃을 떠나지 못하고 그 곁에 한참 머물렀다. 기다리거나 일부러 찾아 나서지 않았는데도 누군가와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이 섬에 익명으로 깃든 나 역시 그렇다. 나와 나의 우연한 마주침. 낯선 풍경 앞에서 나는 이방인이 된다.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당신이 어딘가에 있기 때문에 외롭다는 것을 문득 깨닫는다. 당신이 사는 곳이 이쪽이든, 저쪽이든. 당신의 말 한마디, 당신의 표정, 당신의 눈빛이 나를 외롭게 한 정체였다니!

    우주에서 지구를 보면 창백한 푸른색이라고 한다. 창백하고 푸른 우리의 얼굴, 그것이 지구다. 색색 숨을 쉬는, 따뜻한 태양과 서늘한 달을 가진 얼굴에 대해 알고 있다. 낮과 밤의 두 얼굴이 서로를 그리워한다. 백야의 시간처럼 밤에도 태양이 가라앉지 않는 환한 도시에서 나는 왜 자꾸 당신을 떠나고 싶어 했을까. 조금 더 오래 기다리지 못했을까. 망부석이 되지 못했을까.

    비진도 망부석 전망대에는 이광석 시인의 ‘망부석’과 박경리 선생의 ‘산다는 것’이라는 시가 나란히 있다. 두 편의 시를 읽다가 뒤돌아 하늘을 본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망부석이 보인다. 흰 얼굴에 코가 유난히 오똑한 바위가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무지개를 타고 비진도에 내려온 선녀가 한 남자를 사랑하여 살다가, 남자가 풍랑으로 돌아오지 않자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망부석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바위다. 망부석 전망대를 조금 지나면 아무리 흔들어도 내 힘으로는 흔들리지 않는 ‘흔들바위’가 있다. 선녀가 홀로 남은 어머니를 위해 밥그릇 모양의 돌을 내려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바위다. 비진도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섬이다.

    미인도는 비진도의 또 다른 이름이다. 미인도 전망대는 망부석의 머리에 해당하는 곳인데 그곳에 앉아 바라보는 비진도는 가슴가리개 모양이다. 북쪽 섬과 남쪽 섬이 봉긋하게 솟아 있고, 그 두 개의 섬을 해변이 이어주고 있다. 그래서 비진도에 들면 넉넉한 어머니의 품에 안기는 것 같다고 하는데, 어떤 사내에게는 사랑하는 여자의 품에 안기는 것 같기도 하겠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자신의 외로움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드는 기분이 들기도 하겠다.

    선유봉 전망대에서 보는 비진도의 뒷모습은 더 넓고 아득하다. 주변에 빨간 열매를 주렁주렁 매단 천남성이 많다. 천남성은 독초라고 한다. 독이 있는 것들은 저렇게 예쁘고 화려하다. 그러나 독은 독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말도 있더라. 풀은 두루미를 닮았지만 열매는 곤충이 알을 쏟아놓은 것 같다. 어느 깊어가는 계절에 나는 마음의 독을 다스리지 못해 저리 붉은 심장으로 운 적이 있었지. 그때 나는 독을 독으로 다스리지 않고 사랑으로 다스려야 견딜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걷다 보니 해안의 깎아지른 절벽 위에 ‘노루여’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바위 절벽이 바다와 맞닿은 곳이 마치 허우적거리는 노루의 발처럼 생겼다. 선유봉 일대에는 노루가 많이 살았었는데 노루가 벼랑에 떨어지면 사람들이 바다에서 노루를 건져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노루여 옆이 설핑이치라는 곳이다. 눈보라가 휘날리면 바다로 쑤욱 나간 기암괴석이 은백색이 된다는 뜻의 설핑이치는 설풍치라고 불리기도 한다. 눈과 바람을 가장 많이 맞는다는 뜻의 설풍치는 아래 수포마을에 닿아 독특한 이름의 ‘슬픈치’로 바뀐다. 슬픈치! ‘치’의 한자가 ‘거미 치’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바람에 날리는 거미의 집처럼 위태로워서일까. 절벽이 거미의 다리처럼 길다는 뜻일까. 수포마을엔 사람이 살지 않는다. 비진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하나 있지만 문이 잠겨 있다. 아무도 살 수 없는 곳이어서 슬프다는 말인가. 아무튼 ‘슬픈치’는 슬프다. 비진암 뒤로 대낮에도 컴컴한 동백숲이 이어진다. 갑자기 한 무리 새들이 날아오른다. 설마 너희들 동박새니? 그렇단다. 외로운 사람은 원래 혼자 묻고 혼자 답한다. 새떼들이 흩어져서 날아가 버린 숲이 다시 고요해진다. 감정도 움직이고 달아나고 흩어진다. 이 섬에서는 고독이라는 단어도 살아 있는 동사다.

    다시 외항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니 게스트하우스가 보인다. 6시 30분. 벌써 캄캄하다. 도시에서처럼 백야의 시간을 꿈꾼다는 건 이 섬에서 불가능하다. 비진도의 태양은 제 시간에 맞춰 가라앉는다. 겁(怯)이라고 했나. 일찍 찾아온 어둠이 두려워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다. 비진도는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긴 밤과 고요함을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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