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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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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 김혜연

  • 기사입력 : 2013-11-28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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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인사 계곡물소리 음각이다 솔바람 맑은 절간 앞마당 삼층석탑 석등 그림자 음각이다 저녁 법고소리 예불소리 저무는 가야산 붉은 어깨 음각이다 잠들지 말고 깨어 있어라 깨어 있어라 처마밑 풍경 음각이다 팔만대장경판 그 속에 숨어 있는 고려의 달빛도 음각이다 명부전 조사전 돌아 어진 사람들 가슴 지키는 누군가 큰 음성 또한 음각이다 그 아래 낙동강 고고한 눈빛 생각하면 내게 있어 모두 음각이다 - 시집 <음각을 엿보다> 중에서


    ☞ 시인과 함께 해인사에 간 적 있습니다. 그 가을날을 기록한 시인가 봅니다. 사찰로 오르내리는 길은 아름다웠고 일행은 행복에 겨워 감탄을 내뱉었지요. 나무그늘을 걸으며 단풍의 빛, 새소리, 바람의 촉감을 만끽하였습니다. 계곡 근처 노천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기도 했고 장경판전을 둘러보며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깨어 있어라 깨어 있어라’ 그야말로 잠들어 있던 우리들의 감각이 화들짝 깨어나는 순간이었지요.

    그런데 시인에게는 감각만 깨어난 게 아니었습니다. 가슴 속에 묻어둔 어둠이랄까 한이랄까 삶의 깊숙한 단층이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평소에 강직한 모습만 보이던 시인이 절을 다 돌아 나와 눈물을 비쳤습니다. 처음 보인 그런 모습에 우린 잠시 당황했지만 꼭 안아주고 싶었지요. 그 순간 시인은 연약한 인간이자 후회 많은 딸이자 여자였던 것입니다. 근처에 친정아버님의 산소가 있을 텐데, 그 방향을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그저 즐겁기만 했을 때, 시인에게는 모든 풍경이 음각으로 와 닿았던 겁니다.

    ‘계곡 물소리’ ‘석등 그림자’ ‘가야산 붉은 어깨’ 모든 것들이 ‘음각’으로 새겨지다가 ‘어진 사람들’ 지키는 ‘큰 음성’도 ‘음각’으로 들렸나봅니다. 그 음성은 부처님이나 관음보살 목소리, 혹은 어릴 적 보호막이 되어주신 시인 아버지의 목소리가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보호 아래 있다는 것만큼 푸근하고 든든한 일은 없을 겁니다. 경판을 한 자 한 자 새기던 사람들의 마음도 이처럼 음각의 간절함이었겠지요. 불경이 양각으로 새겨질 동안 마음은 깊게 음각으로 조각되었을 테니, ‘고려의 달빛’이 아직 ‘대장경판’ 속에 ‘음각’으로 ‘숨어’ 있나 봅니다.

    이주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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