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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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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한 작가의 인도 아요디아에서 김해까지 ⑪ 영원한 사랑의 도시, 김해

서로를 마주 보던 그들은 영원한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

  • 기사입력 : 2013-12-11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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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락국 김수로왕비릉. 분산에서 구지봉으로 내려오는 곳에 있고 왕비릉 앞 누각에는 파사석탑이 보존돼 있다.
    김해종합관광안내소. 경전철 박물관역에서 하차하면 된다. 가야의 설화와 김해의 상징적인 문양을 가미한 종탑과 함께 있다.
    가야의 길에는 철기문화를 꽃피웠던 강력한 가락국의 기마상, 춤추는 시계탑 등 각종 조형물을 테마별로 조성해 놓았다.



    은하사가 있는 신어산을 내려오니 이내 해가 어둑해진다. 수로왕릉 옆에 자리한 한옥 체험관 툇마루에 앉아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인도의 아요디아를 향하기 전에는 뜨거운 해를 피하지 못했고 저녁이면 종일 비가 내리고 별도 보이지 않았었다.

    인도의 아요디아를 출발한 지 한 계절이 지났다. ‘Forever romance road’의 끝, 김해의 가을밤은 유성이 쏟아져 내릴 듯 별들이 총총했고 김해 한옥체험관은 더욱 고적한 느낌이 들었다.

    초목도 바짝 말려버릴 것 같았던 여름 한낮의 뜨거운 태양도 물러나 이제는 김해 한옥체험관 툇간에 놓인 마룻바닥에서 올라오는 바람조차도 덮지 못했다. 장독대가 놓인 곳에 달빛을 받은 낙엽이 찬바람에 뒹굴었다.

    기쁨, 환희, 고독감과 쓸쓸함…. 숙소 툇마루에 잠시 앉아 있노라니 감각적인 요소들이 깨어나고 마음은 가을바람에 실려 흔들린다. 여행자들은 마른 낙엽 하나에도 마음이 움직인다. 부는 바람에도 두 팔을 벌리고 한낮의 햇살에도 세상을 다 가진 듯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든다. 밤이면 달에게도 별에게도 말을 건다. 때론 경이롭고 신비스러운 사원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2000년 전 죽은 이에게도 말을 건다. 여행자의 마음은 다 그럴 것이다. 그러할진대, 영원한 사랑의 화신이 되어버린 여인이 남긴 발자취를 따라 그녀의 혼이 이끄는 대로 여행을 하는 것이 얼마나 신비스럽고 경이로운 체험인가. 그것도 그녀가 남긴 흔적인 신령스러운 두 마리 물고기 문양을 이정표 삼아 여행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허황옥 공주의 이야기처럼 김해의 역사는 가야의 역사이고 신비롭고 경이로운 사랑이 남긴 설화의 역사이다. 그뿐 아니라 가야 시대의 신화와 설화들은 오늘날 현대를 사는 김해의 문화를 만들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42년 가락국의 시조인 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나라를 세웠다는 건국 신화가 있다. 수로왕의 탄강 설화는 대한민국 국민이면 모르는 이 없는 이야기다. 낙동강을 내려다보는 무척산 정상 가까이 있는 천지 역시 수로왕의 설화가 깃들어 있다. 지금의 수로왕릉이 자리 잡고 있는 곳에 처음 묘를 만들기 위해 가락국의 수로왕(首露王)의 묏자리를 파다 물이 나와 김해 고을 가운데 가장 높은 이 무척산(無隻山)의 산마루에 못을 파니 왕릉 자리의 물이 말라 국장(國葬)을 치를 수 있었다는 무척산 천지 설화가 있다. 그리고 봉황대의 황세 바위에 얽힌 가야 시대의 황세와 여의낭자 이야기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다가 서로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영원한 사랑을 이루는 슬픈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처럼 김해는 신비로운 2000년 전의 설화로 가득하고 그것은 영원한 사랑의 도시 김해를 찾는 여행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김해시는 김해공항에서부터 꼬마기차, 경전철을 타고 이동해 가야 유적지를 쉽게 돌아 볼 수 있게 연계를 해놓았다. 수로왕릉역을 빠져나와 봉황교를 넘으면 바로 김해도서관이 보인다. 이방인이 처음 여행지에서 접하는 것은 첫인상으로 매우 강한 인상을 남긴다. 수로왕릉역에서 내려 처음 눈에 들어오는 김해도서관은 수준 높은 교육도시 같은 느낌이 들어 매우 깊은 인상을 남긴다. 김해의 교육 문화 수준을 한눈에 보여주는 것 같아 품격 있는 도시로 느껴지는 것이 첫인상이다.

    수로왕릉에서 나와 봉황교를 건너니 우측으로 봉황동 유적이 바로 펼쳐졌다. 왕궁 터로 추정되는 일대는 공원으로 조성돼 있었다. 옛 가야인의 고상가옥을 재현해 고대 가야 시대의 생활 모습을 볼 수 있게 옛집과 포구가 재현됐다. 회현동 패총도 내부를 단층으로 볼 수 있게 만들어놓아 패총의 놀라운 단면을 볼 수 있었다. 또한 가야의 우수한 철기문화와 강력한 군사력을 보여주는 기마무사상도 재현해 놓았다.

    다시 길을 가로질러 김해도서관을 기점으로 해반천을 따라 깔끔하게 조성된 가야의 거리를 따라 걸으니 무쇠로 만든 무기를 가지고 철갑을 입은 기마병이 용맹스럽고 일사불란하게 대오를 맞추어 달리는 모습이 보인다. 따가닥. 따가닥….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창과 방패를 든 병사들이 뒤를 따랐다. 그들이 달리는 기마상 곁으로는 해반천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가야의 거리는 이처럼 일찍이 찬란한 철기문화를 꽃피웠던 강력한 고대왕국 가락국의 문화를 용맹스러운 기마상, 춤추는 시계탑 등 각종 조형물을 테마별·단계별로 조성해 놓았다. 가야의 거리는 이처럼 문화 활동의 공간 및 시민 교육의 공간 속에 소나무 외 초화류가 즐비한 거리로, 가야 문화의 전통에 기반을 두고 개성 넘치게 잘 가꿔 놓았다.

    연지공원이 있는 쪽으로 가야의 길을 따라 10여 분 조금 올라가니 대성동 고분박물관이 나온다. 고분박물관은 대성동 고분 아래 오래된 비밀을 간직한 채 하나의 유성처럼 푸른 빛깔을 내고 있다. 박물관은 고분에서 수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 소개하고 고대 가야의 사회 문화상을 재미있고 알기 쉽게 조성해놓았다. 그 옆으로는 집단묘지로 추정되는 대성동 고분이 구릉처럼 펼쳐졌다. 고분에서는 북방 관련 유물들과 일본 관련 유물들 그리고 금관가야가 철의 왕국이었음을 입증하는 유물들이 다량 출토됐다고 하는데, 주변을 산책로로 연계를 해놓아 비밀스러운 고대왕국의 역사의 현장은 급속도로 변하는 현대에 사는 이들 곁에서 공존하고 있었다.

    대성동 고분이 끝나는 곳까지 걸어가니 가야의 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킨다는 의미로 가야의 설화와 김해의 상징적인 문양을 합친 종탑이 우뚝 서있는 김해종합관광안내소가 나를 반겼다. 부산 경남 경전철로 온다면 박물관 역에 내려서 해반천을 건너면 만나는 첫 번째 관문인 것이다. 나는 시내 관광지도를 하나 집어 들고 국립박물관으로 향했다. 박물관은 연지교 방향으로 멀지 않았고 구지봉을 머리에 이고 그 아래 자리 잡고 있었다. 박물관은 역사의 도시 박물관답게 전시물들이 잘 구성되어 있었다. 선사시대의 유물부터 가야 문화를 대표하는 금관가야 유물이 전시돼 있고 고대 생활상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전시돼 있었다.

    국립박물관 뒤로 구지봉으로 올랐다. 200여m 남짓한 동네 뒷산처럼 보이는 작은 동산이지만 역사적으로 국문학적으로 ‘구지가’의 산실인 만큼 탄강 설화와 함께 김해에서 가장 중요한 곳으로 평가되고 있다고 하니 지나칠 수가 없었다. 42년 하늘에서 황금알이 내려와 수로왕이 탄생했고, 백성들의 추대로 왕이 되었다는 가야의 건국신화를 간직한 곳이다. 또한 구간과 백성들이 수로왕을 맞이하기 위해 이곳에서 춤을 추며 불렀다는 한국 최초의 서사시 ‘구지가(龜旨歌)’로도 유명한 곳이다. 한 곳 한 곳 김해 도심에 몰려있는 비밀스러운 고대왕국의 도시를 살피다 보니 김해는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국립박물관과 고분박물관 등을 보는 것만으로도 역사도시로서의 김해의 품격 있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 내 발길은 이역만리 길을 떠나 영원한 사랑의 결실을 맺고 김해의 땅에서 왕비가 되어 영원한 사랑의 화신으로 잠든 김수로왕비릉으로 발길을 옮겼다.

    허황옥 공주는 서역 땅에서부터 공주의 신분으로 길을 떠나 멀고도 험한 길을 걷고 우마차를 탔다. 때론 설산을 넘었다. 배에 빨간 깃발을 매달고 양자강의 무서운 급류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 바다를 만나고 풍랑을 헤치고 가야로 향한다. 그 험난하고 고단한 길을 지나 이역만리 가야까지 왔다. 그리고 김수로왕을 만난다. 인도의 아요디아부터 김수로왕릉의 정문 납릉의 문설주에까지 새겨진 두 마리 물고기처럼 그들은 높지도 낮지도 않게 서로를 마주 바라보면서 평등하고 존중하면서 영원한 사랑을 이루었다. 가락국기에 의하면 수로왕은 정사에 있어서도 그녀와 사랑의 결실을 맺은 이후 활약은 더 빛난다. “나라를 다스리고 집안을 가지런히 하며 백성 사랑하기를 자식같이 해서, 그 교화가 엄하지 않고 정치가 엄하지 않아도 저절로 다스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의 이야기는 2000년 전의 영원한 사랑의 화신이 되었고 지금까지 산자들의 이야기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았다.

    허황옥 공주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의 아요디아를 출발한 지 한 계절이 지났다. 11월, 김해의 푸른 하늘과 맑은 가을 공기는 잿빛 하늘의 서울과 달랐다. 공기는 맑고 바람도 시원했고 햇살도 풍요로웠다. 소박하게 낮은 돌담에 둘러싸인 그녀의 무덤은 변한 게 없었다. 그녀가 풍랑을 만나 배의 균형을 잡기 위해 싣고 왔다는 파사석탑도 그대로였다. 아요디아에서부터 김해에 이르기까지 ‘Forever romance road’의 두 마리 물고기들이 만감을 교차시키며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뜨거운 한여름에 태양을 피하지 못하고 숨죽인 그녀에게 말을 걸었던 것처럼 그녀의 무덤 앞에서 다시 말을 걸었다. 기쁨, 환희, 고독감과 쓸쓸함…. 감각적인 요소들이 다시 깨어났다. 그녀의 숨결이 느껴지고 여리고 고운 목소리가 가을 오후의 미풍에 실려 귓전을 맴돌면서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로 성은 허(許) 씨,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살입니다.”


    글·사진= 남기환(사진작가·여행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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