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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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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김하경

  • 기사입력 : 2013-12-19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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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뭇가지 끝에서 매미가 울 때는

    땅꾼의 집 물통에 뱀을 가두곤 했다



    땅꾼이 가둬둔 살무사 뒤엉키는 소리에

    동구 밖 탱자나무 울타리까지 들썩거렸고



    살점이 찢어져라 뒤틀고 날뛰는 진동이 멈출 때

    똬리를 푼 시간들도 힘없이 늘어졌다



    포크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풀 속을 달리던 뱀

    나는 물통을 쏟아 삶의 길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시간이 지웠던 이슬방울 나뭇잎에 머물 수 없듯

    이미 정해진 시간들은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했다



    산중에 도사리던 독소가 머물고

    숲으로 돌아가지 못한 것들은 죽음과 시간을 뒤섞고 있었다



    약속 없는 약속을 지키며

    삶의 무게와 생의 꽃잎사귀가 해지는 방향으로 지던 날



    등근 무덤을 바라보던 해 내 뒤통수를 비추고

    독사의 눈동자가 반달처럼 반쯤 감겨 있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밝아지고

    반쯤 잠긴 뱀은 제 안에서 어둠만 바라본다

    -<시에> 2013년 가을호 중에서



    ☞ 지금쯤 세상의 뱀들은 모든 일을 잊고 겨울잠을 잘 것입니다. 이 시는 여름날 ‘땅꾼이 가둬둔 살무사’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쓴 시입니다. ‘물통에’ 갇힌 뱀들의 몸부림이 ‘동구 밖’까지 ‘들썩거’리게 하는 걸 느끼며 시인은 뱀들과 마음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살무사들에게서 발견한 ‘약속’이란 무엇일까요? 그들이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삶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 운명, 그게 일종의 약속일까요? 아니면 숲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일이 약속일까요? 결국 살무사들은 ‘숲으로 돌아가지 못한’채 ‘죽음과 시간을 뒤섞고’ 있습니다. 그 견딤의 시간에 뱀들은 ‘제 안에서 어둠만 바라’보고, 시인은 ‘갈수록’ ‘밝아지고’ 있습니다. 섬뜩하고도 슬픈 장면을 목격함으로써 시인이 다시 태어나는 것 같습니다. 생명에 대한 연민 때문에 아픔을 겪은 후,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초연해졌습니다. ‘이미 정해진 시간’을 그대로 살아내는 것도 약속을 지키는 일이겠지요. 계사년 한 해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시골의 집집마다 수호신으로 있었다던 집지끼미들, 자연과 함께하던 그 시절이 가끔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이주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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