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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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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 기사입력 : 2014-01-02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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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중동(靜中動)이다. 빗물 고인 돌확에 하늘빛 젖어드는 사이 흰 구름 살포시 제 몸을 적신다. 잠시 타는 목을 축이던 서산의 해는 긴 밤을 흘리고 사라져간다. 어둠에 빠져버린 웅덩이에서 달은 또 한 번 떠오른다. 자연과 어우러져 빚어내는 돌확의 풍경에는 허허로운 운치의 노래가 흐른다.

    돌확은 살아있는 추억의 화석이다. 나보다 먼저 고향집에 생겨나 지금까지 한자리에 망부석처럼 머물러 있다. 시골농가 개조바람을 타고 여기저기 헐고 고쳐도 돌확은 처음 있던 그대로다. 정들 틈도 없이 빨리 변해가는 시대에 그대로인 모습을 보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돌확을 볼 때마다 잊힌 날들을 재회하는 기분이 든다. 이미 돌확은 무정한 한 물건이 아니다. 고향집에나 내 마음에나 정겨운 한 존재다.

    긴 세월 사람의 손길이 머문 것은 오래된 사람이 주는 정감과 다르지 않다. 귀밑머리 새치 같은 푸릇푸릇한 이끼가 돌확을 빙 둘러치고 있다. 늙은 아낙의 축 처진 뒤태처럼 주저앉은 느낌이 드는 것도 세월의 자국이다. 삶의 손때가 하나의 색이 되었다. 세상만물에 청춘이 지나간 흔적이란 비슷하기 마련이다. 돌확은 서서히 자연의 한 풍경으로 녹아들어간다.

    좋아진 시절은 자꾸 정든 것을 앗아간다. 눈비 걱정 없이 실내에서 버튼 하나면 해결되는 세상이다. 편리한 전자제품에 익숙해진 생활패턴이 돌확의 몫을 야금야금 빼앗았다. 시골마을을 다녀가는 골동품 수집가들은 뒷방노인처럼 적적하게 세월을 나고 있는 고향집 돌확에다 눈독을 들인다. 가끔 도심 음식점 뜰에 잘 가꾸어둔 조경용 돌확을 볼 때면 정든 시골집을 떠나온 객지살이 신세 같은 괜한 감정을 느낀다.

    돌확의 멋은 거친 진솔함이다. 손에 쥔 몽돌로 일일이 찧고 빻는 더딘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기계가 흉내낼 수 없는 투박한 맛을 자아낸다. 열무김치의 알싸하면서도 시원한 맛을 내는 홍고추는 돌확에 짓이겨야 그 모양이 더욱 맛깔스럽다. 특히 툭툭한 들깨토란국을 끓일 때 돌확에다 들깨를 빻으면 고소한 향이 한층 더 진하게 톡톡 터져 나온다. 비록 정교함은 떨어지지만 오히려 성글고 거칠어 재료 고유의 맛과 향이 잘 남아있다.

    아무리 좋은 돌확도 혼자서는 별 소용이 없다. 바늘과 실처럼 따라다니는 동글동글한 몽돌이 있어야 제 몫을 한다. 돌확과 몽돌이 만나 티격태격 살점을 떼어내듯 끊임없이 부딪치지만 깊은 맛은 바로 거기에서 생긴다. 시간이 흐를수록 득득거리는 소리는 점점 순일해지고 뻑뻑한 마찰은 어느덧 리듬을 탄다. 더께조차 매끄러워진 세월 앞에 돌확은 무엇이든 노래로 화답한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인연을 맺고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돌확의 속성과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마모되면서 서서히 부드러워지듯 사람의 관계 역시 각자의 모난 목소리를 깎아낸 후에야 화음을 이룰 수 있다. 인생의 돌확에서 함께 운명을 만들어가는 부부를 생각한다. 부부로 살아간다는 것은 맞바람처럼 부딪치는 삶 속에서 서로의 아집을 조금씩 허무는 수행이다. 제 목소리 더 크게 내지르는 젊은 날의 기싸움이 늘그막 등 긁어주는 소리로 가는 긴 여정, 부부는 따로 또 같이 인생의 맛을 버무려내는 인연이다.

    돌확처럼 더디지만 순박한 멋이 그리운 시대다. 순식간에 곱게 갈아만 버리는 분쇄기처럼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일도 빠르기만 한 세상이다. 제 속 좀 긁힐지언정 사람 본연의 향기와 연민을 깨우칠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돌확의 철학이 아쉽다. 삶의 체취가 묻은 물건이 주는 정겨움을 잘 모르는 세대는 손맛도 들기 전에 유행을 좇아간다. 편의와 속도에 치중하는 요즘 사랑하고 살아가는 사람의 일들에서 세월의 향기가 점점 사라져간다.

    살아가는 동안 한 사람을 오래도록 곁에 두는 것은 큰 행복이다. 고향집 돌확처럼 묵은 정에 젖어 살던 노부부의 모습이 꿈 같다. 평생 부엌에는 얼씬도 안 하시던 아버지도 들깨토란국만큼은 공을 들여야 제맛이라며 몽돌을 쥐시었다. 자식들 위해 돌확 앞에 앉아 주거니받거니 아옹다옹하던 옛 시간들이 눈에 선하다. 노년의 소소한 정은 돌확과 몽돌이 짝을 이루어 터뜨리는 들깨처럼 알콩달콩 살가웠다.

    수없이 부대끼는 만큼 사람은 서로 은근히 닮아가는 구석이 생기는 것 같다. 돌확의 육중한 무게감만 느껴지던 아버지는 서서히 유순해지고 어머니는 되레 무던해지셨다. 언제부턴가 어깨 낮아진 아버지에게서 온화한 어머니가 보였다. 인생의 까칠한 돌확에서 초피처럼 혀끝 싸한 기억도 고추처럼 눈 매운 사연도 함께 견뎌온 부부의 일생, 숱한 우여곡절의 따가운 양념들이 간간한 연륜이 되어 삶의 그림자로 잘 배어들었다. 60년 해로한 노부부는 서로에게 오래된 풍경이 된다.

    세월의 풍상은 고풍스러운 빛으로 돌확에 물들어간다. 자연에 잘 어우러지는 그 예스러운 멋 때문인지 최근 부레옥잠이나 수련을 키우는 연못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돌확은 소리를 잃은 대신 생명을 품어 키우는 아름다운 하나의 터전으로 거듭났다. 돌확이 몽돌을 만나 부르던 노래도 한 시대를 풍미하는 유행가처럼 지나갔구나 싶다. 문득 잊혀가는 그 소리가 그리워지면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인 고향집 돌확이 아른거린다.

    늦가을, 돌확의 긴 침묵이 깨어난다. 온 가족이 모여 김장하는 날이면 돌확에서 갈아낸 어머니손맛 들깨토란국이 별미로 등장한다. 울퉁불퉁 어머니 손마디를 닮은 토란을 긁어놓고 돌확에다 들깨를 붓는다. 팔 힘 부치는 어머니를 대신해 몽돌을 쥐었다. 전과 달리 손아귀에 쏙 들어오는 느낌에서 빠져나간 세월을 본다. 몽돌을 쥐는 이 싱거운 행위조차에서도 아버지의 빈자리는 크다. 우묵한 돌확에 먹먹한 그리움 한 줌, 후회 한 움큼을 담는다.

    돌확의 울림이 유난히 크다. 드르륵 드르륵 소리가 가슴속 밑바닥을 후벼 파는 것 같다. 병석에 계신 아버지에게 바락바락 내질렀던 부끄러운 내 목소리가 들린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꼼짝할 수 없는 돌확처럼 가만히 누워 자식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만 계셨다. 혼자 힘으로 살아온 양 큰소리치는 딸의 서툰 억지가 아버지 속을 얼마나 긁었을까, 좀처럼 닳을 것 같지 않은 돌확처럼 단단한 아버지도 하고픈 말을 삭이시느라 그 속 얼마나 문드러지셨을까 싶다.

    으깨진 들깨에 물을 부으니 서글픈 눈물처럼 질척거린다. 어느 한때의 회상이 뿌옇게 이지러진다. 천주머니에 담아 국물이 숭숭 빠져나올 때까지 볼끈 짠다. 마음에 맴돌던 잔상도 질끈 묶어 걸러낸다. 모든 것들은 머물다 떠나간다. 돌확의 운치가 여백에서 우러나듯 어쩌면 살아가는 일도 비움의 철학인지도 모르겠다.

    돌확의 공에 어머니 손맛까지 더해진 토란국 맛은 김장철의 구수한 추억이다. 둘러앉은 식구들의 숟가락 바쁜 손놀림이 걸쭉한 고소함을 더한다. 물컹물컹한 토란에 들깨향이 잘 스며들었다. 고향집에서 만들어 먹는 맛을 똑같이 따라해 보겠다는 야무진 포부가 애당초 꿈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정녕 그 비결은 돌확의 비밀에 부친다.

    세월도 앗아가지 못하는 것은 돌확의 질박한 정취다. 소리에도 맛이 깃들어 있는 돌확의 오묘한 조화다. 아무래도 해마다 들깨토란국을 졸라야겠다. 자식들 먹일 생각에 어머니 실없는 콧노래라도 흥얼거리게, 돌확의 소리 가을처럼 깊어가게, 그 삶의 노래 멈추지 않게.





    당선 소감 - 수필은 삶에서 길어 올리는 깊은 사색

    그럴 리 없겠지만 행여나, 분에 넘치는 꿈인 줄 알면서도 혹 언제쯤일까.

    ‘마지막 잎새’처럼 달랑대는 달력을 하릴없이 바라보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실내온도를 3, 4도는 높여준다는 에어캡 단열시트 열풍에 일명 그 ‘뽁뽁이’를 창문에 붙이던 날 당선통보를 받았습니다.

    ‘신춘문예 당선’, 그 순간 가슴속 기온은 순식간에 상승했지요.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면 뽁하고 터지는 뽁뽁이처럼 그때 제 심장이 바로 그러했다고나 할까요. 어떤 단열재로 애써 무장하지 않아도 이 겨울을 거뜬히 날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기분, 햇살 아래 눈 시린 하얀 눈꽃 같은 찌릿한 기쁨이었습니다. 이제 이 겨울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그해 겨울’이 되었습니다.

    아직 설익은 글을 예쁘게 봐주시고 신춘문예 당선이라는 과분한 이름표를 붙여주신 경남신문사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앞으로는 제 삶의 온도뿐만이 아니라 주위도 따뜻하게 덥히는 사람이 돼라는 뜻으로 알고 글쓰기에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한 발 한 발 정직한 방법으로 길을 걷듯 수필은 한 올 한 올 삶에서 길어 올리는 깊은 사색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서두르지 말고 찬찬히 잘 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다독여주신 이규식 교수님 감사합니다. 이 지면을 빌려 김윤숭 관장님께도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끝으로 그 이름만으로도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가족들과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1973년 함양 출생 ● 부산대학교 졸업 ●지리산문학관 운영위원 ●계간 <시낭송〉편집장.




    심사평  - 유려한 문장 솜씨, 독특한 비유법 돋보여

    글은, 특히 수필은 문장이 생명이다. 먼저 물 흐르듯 막힘 없이 술술 잘 읽혀져야 한다. 잘 읽혀진다는 것은 문법에 맞는 정확한 문장이라는 말이다.

    자신의 신변과 심정을 솔직히 토로하는 글이 수필이고 보면 작위적이 아닌, 가슴으로 써야 할 것이다. 비록 사소하고 평범한 소재일지라도 철학을 동반한 지식과 감흥, 지성과 감성의 조화로운 융합이 있다면 독자들에게 더 큰 공감과 감동을 전달할 수가 있을 것이다.

    심사위원의 손에 들어온 작품은 200여 편이었으며 대체로 가족사를 다룬 수필이 대부분이었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회억하며 그리워하는 내용이라든지, 함께 지낼 땐 몰랐으나 직장으로 인해 먼 곳으로 떠난 형제의 끈끈한 정 이야기는 영혼에 잔잔한 울림을 줄 뿐 아니라 가슴을 아리게 하였다.

    지극히 사소한 일로 가족이 해체되고 해결책도 강구하지 못해 전전긍긍만 하는 답답한 문장이 전개될 때는 더 이상 읽을 수 없었다. 수필을 고된 일상으로부터 탈출하는 데 쓰이는 도구로 착각한 글도 적지 않았다.

    체험한 것을 그대로 적는 것만으로는 수필이 될 수가 없다. 어떻게 형상화시키느냐에 따라서 문학의 향기가 나는 것이다.

    문장의 정확성, 구성의 효율성, 주제의 통일성, 작품의 감동성, 소재의 참신성을 염두에 두면서 고른 작품은 ‘달의 시간’, ‘틈’, ‘돌확의 노래’ 등 세 편이었다.

    ‘달의 시간’은 글쓴이가 성격이 유한 탓인지 문장이 나긋하였다. 흔히 감동이라고 말하는 가벼운 떨림이 있었지만 문장 중의 몇몇 낱말이 어색하게 사용된 흠이 드러났다.

    ‘틈’은 여성 특유의 섬세한 표현과 묘사가 돋보였지만 전개의 지나친 작위성, 단락의 구분이 정확하지 못한 점들이 아쉬웠다.

    당선작 ‘돌확의 노래’는 비록 관념적인 문장이 몇 군데 있었으나 전면에 흐르는 유려한 문장 솜씨와 독특한 비유법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시(詩)에서 함축 상징 비유 압축 리듬을 차용해 오기도 하였다. 주제 설정이나 작품 구성의 유기적 견고성이 흠잡을 데가 없었으며 사건을 끌고 가는 기교도 구성도 뛰어난 작품이었다.

    더 큰 성취를 위한 고뇌의 시간이 이어지기를 빈다. <심사위원 정목일·강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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