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3월 29일 (금)
전체메뉴

작가와 떠나는 경남산책 (80) 김승강 시인이 찾은 산청 백마산

강가에서 목 축이며 숨 고르는 백마
그 위에 오르니 천하가 내것 같구나

  • 기사입력 : 2014-01-14 11:00:00
  •   

  • 위용 넘치는 백마산(왼쪽)과 적벽산 그리고 경호강 물줄기.
    백마산 망춘대에서 바라본 풍광.


    지리산서 발원해 산청으로 흐르는 경호강가에서
    백마가 잠시 쉬며 한 해를 내달릴 준비를 한다

    말 뒷굽 부분에 있는 입구에서 산을 오른다
    무릎 부분선 백마사, 허벅지쯤에선 숲길이 나온다

    백마의 잔등 위 망춘대에서 풍광을 내려다보다
    영웅호걸이 쟁투하던 시대의 천하를 상상해본다



    2014년 갑오년 새해가 밝았다. 올해는 말띠 해다. 그것도 60년 만에 돌아오는 청말띠 해란다. 그런데 청마(靑馬)가 있었나. 그래, 있었지.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는 깃발의 시인 청마(靑馬) 유치환. 좀 썰렁했나. 내친 김에 이렇게 말하면 어떨까. “나는 청마를 타고 백마산을 올랐다.” 여기서 청마는 나의 푸른 자전거를 말한다. 물론 백마산은 자전거로 오를 수 없다.

    청마가 우리 안에 있다면 백마는 우리 밖에 있다. 청마는 탈 수 없다 해도 백마는 탈 수 있다. 나아가, 오늘 당장 백마는 탈 수 없지만 백마산은 탈 수 있다. 나는 나의 푸른 자전거를 싣고 산청군 신안면 원지에 있는 백마산을 향해 달렸다.

    백마산의 위용은 여전했다. 예전에도 느꼈지만, 백마산의 백마는 달리고 있는 백마라기보다는 백리를 달려온 뒤 다시 백리를 달리기 위해 잠시 물가에서 물을 마시며 숨을 고르고 있는 백마를 연상하게 했다.

    지리산에서 발원해 백마산 옆쪽으로 흐르는 경호강은 그러한 연상을 부추겼다. 달리는 말 잔등은 올라탈 수 없다. 멈추어 서 있는 말 잔등을 올라타야 한다. 한 해를 달려온 백마가 또 한 해를 내달리기 위해 잠시 강가에서 목을 축이며 쉬고 있다. 말에 올라타려면 지금 올라타야 한다.

    원지는 진주에서 1006번 국도를 타고 산청 방향으로 가다 보면 진주~산청 간 중간 지점에 위치에 있다. 진주 쪽에서 내려오는 양천과 산청 쪽으로 내려오는 경호강이 원지에서 삼각주를 이루면서 합류해 진주 남강으로 흘러간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 했던가. 지리산에서 발원해 내려온 경호강의 물살은 원지에서 양천과 합류하기 직전에 크게 휘어지면서 산이 멀리 물러나 있는 오른쪽으로는 넓은 들판을, 산이 바로 옆에 있는 왼쪽으로는 산의 옆구리를 쳐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남겼다. 경호강의 물살에 옆구리를 맞은 산이 바로 백마산이다. 경호강의 물줄기를 경계로 들판 쪽이 단성면이고 백마산 쪽이 신안면이다. 원지는 신안면에 속한다. 경호강으로 나누어진 원지와 단성은 단성교로 연결되어 있다. 백마산의 위용은 높이가 아니라 그 형상과 자태에 있다. 그 형상과 자태를 보고 옛날 그 누군가는 백마산이라 이름 붙였을 것이다. 높이는 286m에 불과하지만 그 한쪽 옆구리, 특히 망춘대는 거의 직벽이고 정상 능선은 영락없이 말 잔등처럼 평편하다.

    원지강변로를 타고 산청으로 가다 보면 백마산까지 못 가서 백마산과 나란히 강변로를 끼고 적벽산이 가파르게 솟아 있다. 중국 삼국시대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이 조조의 대군을 적벽에서 크게 무찔렀다고 하는 적벽대전에서 따온 이름인 듯하다. 적벽산이 중국의 적벽과 비슷한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높이가 166m에 불과한 적벽산도 백마산 못지않은 위용을 자랑한다. 경호강 물줄기를 거슬러 직벽의 적벽산 아래를 지나가는 원지강변도로를 지나가 보면 그 위용을 실감할 수 있다. 그 옛날 백마산이란 이름을 지었던 바로 그가 적벽산이란 이름도 지었을 터. 처음 두 산을 마주하고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한 사내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행색은 비록 초라하지만 눈동자가 총명하게 빛나는 한 사내.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한 사내. 당대의 난세를 평정해 줄 한 사내.



    한 사내가 있었다. 허리에 검 하나만 차고 있을 뿐 차림새는 참으로 초라했다. 눈썹은 짙고 입술은 붉었으며 눈동자는 총명해 보였고 뺨은 두툼했다. 늘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어 저속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나이는 스물대여섯. 그는 수풀 속에서 무릎을 끌어안은 채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물은 유구하게 흐르고 미풍은 상쾌하게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삼국지’ 중에서

    경호강과 양천이 합류하는 넓은 삼각주에서 나는 말 대신 자전거를 타면서 황하 상류에서 내려오는 낙양선을 기다리는 역사 소설 속의 한 사내를 생각했다. 경호강 물줄기와 적벽산과 백마산의 위용은 나를 그러한 상상의 세계로 이끌기에 충분했다. 뿐만 아니라 백마산 망춘대에서 내려다본 풍광은 나에게 영웅호걸이 쟁투하던 시대의 천하를 연상케 했다.

    나는 지금 적노의 잔등 위에서 천하를 내려다보고 있다. 경호강 건너편 단성 들판은 장수들이 탄 말들이 달리면서 일으키는 먼지로 자욱하다. 방금 장비는 장팔사모를 휘두르며 적진을 향해 돌진해 나갔다. 내 옆에는 수염을 길게 내려뜨린 관우가 한 손에 청룡언월도를 들고 언제나 그렇듯 무심한 표정으로 천리마 위에 우뚝 올라앉아 있다. 들판에서 장비가 적의 장수들과 경합을 벌이고 있는 광경을 보고 있던 내 눈길은 한순간 경호강과 양천이 합류하는 원지의 삼각주로 옮겨간다. 나는 생각한다. “천하대세는 나뉜 지 오래되면 모이고 모인 지 오래되면 나뉜다.”(‘삼국지’의 첫 문장)

    자전거에서 내려 백마산에 오른다. 백마산은 말의 뒷굽에 해당하는 곳에 입구가 있다. 옛날 자동차길이 없던 시절에는 백마산으로 접근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근대에 들어와서야 가능해졌겠지만, 옛날 같으면 가파른 바위산인 적벽산 아래로 길을 낸다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더구나 한쪽으로는 거센 강물이 흐르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오른쪽으로 적벽산을 끼고 원지강변도로를 달리다 보면 자칫 입구를 놓치는 수가 있다. 적벽산과 백마산 사이로 작은 길이 나 있고(이전에는 작은 다리를 건너갔는데 지금은 위쪽으로 원지를 우회하지 않고 바로 산청으로 가는 길을 이어주는 고가도로가 놓이면서 작은 다리는 폐쇄되고 옆쪽으로 길이 나 있었다.) 그 길로 들어서면 바로 백마산 등산로 입구가 나온다.

    말의 무릎 부분에 해당하는 곳에는 절이 하나 있다. 백마사다. 겨울 백마사는 조용했다. 풍경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백마사 뒤쪽 시누대숲에 숨은 바람은 숨죽인 채 일어날 줄 몰랐다. 방금 백리를 달려와 쉬고 있는 말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말 허벅지쯤에는 왼쪽으로 숲길이 나 있었다. 표지판에는 망춘대라고 쓰여 있었다. 그렇다. 망추대가 아니라 망춘대여야 한다. 한 해를 달려와 새해를 맞았으니 봄은 멀지 않았으리. 망춘대에서 경호강과 단성 들판을 바라보며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다. 말 엉덩이 부분에 도착해 보니 물웅덩이 같은 것이 있다. 산꼭대기 부근에 웬 물웅덩이. 물은 없다. 있을 리가 없다. 지도에는 연못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그 연유가 궁금했다. 인터넷의 한 블로그에 올라온 글을 보고 그 연유를 짐작해 본다. “6·25동란 때 적벽산 아래의 신안지서(현 지구대)의 전투경찰과 건너편 백마산에 주둔한 인민군과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밤이면 마치 불꽃놀이를 방불케 했다.” 아마 그 당시 병사들이 마실 식수를 모아두었던 곳이 아니었겠나 하고 짐작해 본다. 백마산이나 적벽산은 전투 시 최후의 보루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경호강의 물살은 더 이상 물러설 자리를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은 적의 접근을 차단하는 데 유리했을 것이다. 정상 능선은 예상했던 대로 말 잔등처럼 평편했다. 정상 부근의 바위에서는 여기저기서 인위적으로 판 홈들이 발견되었다. 그것도 앞서 말한 지난 역사의 흔적일 터.

    아까 백마산 입구는 자칫 놓치기 쉽다고 말했는데, 백마산이 병풍 역할을 해서 백마산을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나오는 마을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중에 산성마을이 있다. 백마산 발치에서 백마산으로 오르지 말고 바로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얼마 가지 않아 산 쪽으로 난 길이 나오는데, 산성마을로 올라가는 길이다. 백마산 정상을 밟았다 말고삐를 잡고 오른쪽으로 내려오면 만날 수 있는 마을이다. 내려오면서 보니 산성마을은 거센 바람이 수시로 일어나고 영웅호걸이 부침하는 단성 쪽의 들판과 달리 세상의 흥망성쇠와는 무관한 듯 조용하고 평안해 보였다. 아직 날이 저물기에는 이른 시각이었지만 산성마을의 집들에서 저녁밥을 짓는 연기가 굴뚝으로 모락모락 올라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은 비단 하산길이어서 뿐만 아니라 백마산이 드리운 그늘이 마을로 길게 내려와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글·사진= 김승강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이종훈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