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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포럼] ‘사회적 자본’의 벽을 넘어- 백승종(한국과학기술대학교 대우교수)

  • 기사입력 : 2014-01-16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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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인간 사회의 성격을 꿰뚫어보았다. 그가 사용한 ‘사회적 자본’이라는 용어만 해도 그렇다. 파리 중산층 자녀들에게 소르본 대학교의 졸업장은 출세의 날개를 달아주지만, 시골 농부의 자녀들에게는 별 쓸모가 없다는 말이다. 같은 조건이라도 사회적 자본 여하에 따라 성취도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조선후기 서울의 명문가인 ‘경화세족(京華世族)’들은 대대로 습득한 시험비결에 힘입어 수월하게 문과에 급제했다. 그들은 노른자위 벼슬만 지내며 부귀영화를 누렸다. 시골 수재들이 죽을힘을 다해 시험에 합격하고도 좌절한 것과는 딴판이었다.

    과거시험 자체는 상당히 공정했다. 조선후기의 정규시험에서 평안도 출신 문과 합격자가 많았다는 사실이 증명하는 바다. 문제는 그들의 행운이 합격에 그치고 말았다는 점이다. 그들의 벼슬은 기껏해야 성균관 전적(典籍) 또는 시골의 현감이나 군수였다. 하릴없이 고향에서 벼슬을 기다리다 죽는 사람도 많았다. 그들은 조선사회의 ‘용’이 되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사회 부조리에 가장 적극적으로 항거했어야 할 사람들이 그들이었으나, ‘용’이 될 행운을 기다리느라 조직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사태는 개선되지 않았다.

    그 당시 과거시험에 응시하는 수험 인구는 50만 명도 넘었다. 시험지옥이었다. 많은 선비들은 스트레스로 인해 치질과 위장병에 시달렸다. 서울의 젊은 선비 유만주도 그렇게 병고에 시달리다 34세에 요절했다. 그래도 그는 ‘흠영(欽英)’이라는 일기책을 남겨 후세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으니 다행이었다.

    문제는 있었지만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은 높이 평가할 만했다. 서양 여러 나라는 프랑스혁명(1789)이 일어난 다음까지도 그만큼 공정한 인재등용 방식을 발견하지 못했다. 조선사회가 ‘능력 본위’로 인재를 뽑아 썼다는 사실은 길이 기억할 일이다.

    조선시대에는 총 1만4620여 명이 문과에 급제했다. 해마다 30명 정도 합격한 셈이었다. 그들은 대체로 20∼30년씩 과거 공부에 정진했다. 두세 살 때부터 말과 글을 동시에 배우기 시작했다는 선비들도 많았다. 조기교육 열풍도 셌고, 시험 열기도 뜨거웠다.

    예외도 없지 않았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은 과거시험을 보이콧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 집안은 노론 중에서도 영조와 뜻을 달리한 ‘청명당(淸明黨)’ 계열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박지원으로서는 영조의 조정에 나아가기가 불편한 노릇이었다. 그가 백지 답안을 내는 등의 기행을 벌인 것은 정치적 고뇌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조선후기에는 과거시험과는 거리가 먼 인재들이 다수 등장했다. 내가 ‘평민지식인’이라 부르는 이들인데, 최제우(1724∼1764)와 강일순(1871∼1909)이 대표적이었다. 그들은 동학과 증산교를 비롯한 신종교 운동을 통해 ‘후천개벽’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조선사회에 선사했다.

    1894년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과거제도는 폐지됐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여전히 고시천국이다. 현재의 ‘고시’는 물론 서양의 고등고시제도를 본뜬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제도는 19세기 영국 사람들이 중국의 과거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유럽 각국은 식민지 인도에서 처음 실시된 이 제도의 장점에 놀랐다. 중국과 한국도 그 제도를 역수입했다.

    고시에 이어 ‘언론고시’와 ‘임용고시’까지 등장해 우리 젊은이들은 시험지옥에 산다. 대기업의 취업문도 바늘구멍이다. 경쟁이 심할수록 ‘사회적 자본’은 위력을 발휘한다. 대학입시만 해도 할아버지의 재력과 어머니의 정보력이 필수적이라는 말이 유행한 지 오래다. 한국사회, 이대로는 어렵다. 세습적인 ‘사회적 자본’의 위력을 줄일 방법이 있어야 한다. 공교육의 질을 높이고,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다양한 인재선발의 방법을 모색할 때다.

    백승종 한국과학기술대학교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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