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7월 16일 (목)
전체메뉴

작가와 떠나는 경남산책 (81) 김참 시인이 찾은 함안 군북면

낯선 곳에서 되살아난 어릴적 고향마을의 기억
일부러 찾은 적 없고 아는 이도 없는 곳, 함안
조용하고 한적한, 1970~80년대 분위기의 마을

  • 기사입력 : 2014-01-21 11:00:00
  •   
  • 함안군 군북면에 있는 도로변의 비석들.
    경상우수군절도사 조공신도비.
    어계 조려 선생의 생가.
    어계 생가의 오백년 된 은행나무.
    마애사 가는 길에 들른 마을에서 본 슬레이트를 얹은 시골집.


    작가와 떠나는 경남산책

    함안, 일부러 찾아간 적도 없었고 별로 갈 일도 없는 곳. 친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친구나 지인이 있는 곳도 아닌 곳. 어쩌다 고속도로를 따라 달리다 마주치게 되는 함안 인터체인지 안내표지판. 고속도로가 막혀 국도를 타고 지나간 적은 있던 곳. 함안은 나에게 그런 곳이다. 함안 하면 생각나는 것은 수박이다. 지난여름에 냉장고에 넣어두고 두고두고 먹었던 함안 수박의 시원한 단맛이 생각난다.

    함안 톨게이트에서 빠져나와 국도를 따라 달리다가 한적한 마을을 만난다. 마을을 지나 조금 더 가니 길 저편에 기와집 한 채가 보인다. 기와집 앞으로 가보니 함안 조씨 의열비가 있다. 첫 문장을 읽어본다. ‘함주(咸州)는 예부터 충의와 효열의 고장으로 이름난 고을이다’라고 쓰여 있다. 단종 때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켰다는 어계 선생의 이름도 보인다. 어계 조려 선생은 단종을 위해 수절한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단종이 세조에게 선위하자 함안으로 돌아와 서산 아래에 살았다고 한다. 이 서산을 후세 사람들은 백이산으로 불렀다. 어계는 벼슬을 하지 않고 낚시로 여생을 보냈기 때문에 스스로 어계라는 호를 붙였다고 한다.

    차를 몰고 정한 곳 없이 이리저리 다니다 보니 길옆에 제법 큰 학교가 보인다. 군북고등학교다. 겨울방학 기간이라 학교는 조용하고 운동장엔 아무도 없다. 학교뿐 아니라 학교 근처에 있는 마을도 조용하다. 학교 근처의 마을은 1970~80년대 소읍의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추워서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지 마을엔 행인이 거의 없다. 좁은 도로 위로 차들도 어쩌다 한 대씩 지나간다. 학교 옆에서 잠시 멈춘 것은 길가의 비석들 때문이었다. 도로변의 비석들은 비석들이 있을 법하지 않은 곳에 서 있다. 고색찬연한 비석 몇 개가 나란히 서 있는 터는 도로와 바짝 붙어 있다. 도로와 이렇게 가까이 붙은 비석들은 처음 본다. 하나도 아니고 다섯 개가 나란히 붙어 있으니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듯하다.

    오래된 비석 옆에 흔히 있을 법한 안내표지판 같은 것도 없다. 가까이 가서 누구의 비석인지 보니 인천 이씨의 비석이다. 인천 이씨는 김해 허씨에서 갈라져 나왔다. 김해 허씨는 김해 김씨의 시조인 수로왕의 둘째 아들이 어머니 허황후의 성을 받은 것이다. 나는 김해 김씨다. 김해 허씨와 김해 김씨는 뿌리가 같아서 결혼도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어릴 때부터 들으면 자라왔다. 나는 십 년 동안 구지터널을 지나 학교와 집을 왔다갔다 했다. 구지터널 위에 구지봉이 있고 그 아래 시조 할머니인 허황후의 묘지가 있다. 생각해보니 수로왕비릉엔 부산에 살던 중학생 시절, 사생대회 때 딱 한 번 가본 적이 있고 김해에 살았던 십오 년 세월 동안은 단 한 번도 찾아가 본 적이 없다. 김해 김씨도 아닌 인천 이씨 비석 앞에서 이런 생각을 해보니 씁쓸한 기분이 든다.

    정처 없는 여행에서 바짝 마른 하천을 만난다. 파란색 표지판에 모로천이라고 적혀 있다. 재미있는 이름이다. 마른 내에는 마른 풀들이 빽빽하게 서 있다. 마른 풀들을 모아 불을 지피고 손을 녹여보고 싶지만 마음뿐이다. 요즘은 함부로 불을 놓을 수 없는 세상이다. 어린 나는 불장난을 좋아했다. 외가의 부뚜막이 내 불장난의 주된 공간이었지만 나는 친구들과 감자며 고구마 땅콩 따위를 추수 끝난 논에서 구워 먹곤 했다. 고백하건데 생각 없이 놓은 불 때문에 낭패를 볼 뻔했던 일도 있다. 무전병으로 근무하던 이십여 년 전 부대 근처에 있던 산의 폐쇄된 OP에 중계하러 갔다가 언 손을 녹이려고 중계소 근처 공터에 솔잎과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붙이고 잠시 한눈파는 사이 마른 풀에 불이 옮겨 붙었던 것이다. 나는 혼비백산했다.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정신 없이 불을 껐다. 다행히 불이 잡혔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불이 크게 번질 뻔했다. 운이 나빴으면 중계소뿐만 아니라 산을 홀랑 태워먹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나는 군법에 따라 영창을 갔을 것이고 군대생활을 좀 더 길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불현듯 무전병 선후임 사이였던 정연종, 김창균, 송봉호, 김도훈 이런 이름들이 생각나는 오후다.

    모로천 안내표지판 옆에 갈색 표지판이 보인다. 갈색 표지판은 문화재가 있는 곳을 알려준다. 방어산 마애불과 어계 생가까지 남은 거리가 적혀 있다. 마애사를 찾아가는 길에 사당처럼 보이는 건물이 보인다. 경상 우수군절도사를 지낸 어계의 손자 조공의 신도비다. 조공신도비 앞에서 잠깐 쉬는 동안 사당 기와지붕 아래 그려진 선명한 단청에 한참 눈길이 간다. 사당 지붕 너머 제법 멀리 보이는 언덕에 기와집 몇 개가 보이는 마을이 있다. 나는 이상하게 기와집에 끌린다. 마애사 행은 포기하고 마을로 들어 가본다. 어린 시절 내가 살았던 마을과 비슷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다. 길게 이어진 돌담이 마을의 뼈대를 이루고 있고 그 돌담들 안에 슬레이트 지붕과 슬라브 지붕을 얹고 있는 집도 보인다. 돌담 안에 밭이 있는 것이 독특하다. 좁은 길 옆 블록 벽엔 담쟁이가 가득 붙어 있다. 돌담 너머 기와집도 보인다. 기와집 근처에 가본다. 문화재인 것 같기도 하고 민가인 것 같기도 하다. 사진을 몇 장 찍고 골목을 따라 내려온다. 좁은 골목과 돌담 안의 집들이 어릴적 고향마을을 연상하게 한다. 참으로 묘한 기분을 들게 하는 마을이다.

    마을을 빠져나와 어계 생가를 찾아가는 길에 잠시 멈추어 들판을 검게 물들이고 있는 까마귀 떼를 본다. 새는 자유와 상승을 상징하지만 여러 마리의 새가 지니는 의미는 다르다. 새떼들은 악(惡)을 상징한다. 히치콕의 영화 ‘새’가 생각난다. 오래전에 본 영화지만 히치콕 영화의 이미지들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잘 지워지지 않는다. 하늘을 검게 물들이며 날아오르는 수백 마리의 검은 까마귀들이 사신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많은 까마귀를 지척에서 본 적은 없다. 내가 다가가자 까마귀들은 땅을 박차고 올라 제법 멀리 떨어진 검은 전선 위에 차례로 내려않는다. 이상하게도 그 많은 까마귀들 가운데 우는 놈은 한 마리도 없다. 전선 위에 앉은 검은 신사들을 뒤로하고 어계 생가로 출발한다.

    어계 생가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거대한 은행나무다. 은행나무야 키가 큰 편이지만 고택을 지키는 은행나무는 너무나도 크다. 은행나무 앞의 안내판을 보니 생가를 지키는 은행나무는 수령이 오백 년이 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엔 천 년이 넘은 은행나무도 있다고 하는데, 그 나무는 도대체 얼마나 큰지 궁금해진다. 은행나무 중간에 커다란 새집이 몇 개 보인다. 큰 나무에는 큰 새들이 둥지를 치는가보다. 인간과 비교하면 나무는 참 오랜 세월을 산다. 나무가 오래 사는 이유는 동물과 세포조직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나무가 장수하는 것이 한곳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움직이지 않는 삶의 생태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함안 조씨 문중에서 관리하는 어계 생가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지금은 재실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문이 닫혀 있어서 생가의 내부를 구경할 수 없어 아쉬웠지만 지붕에 얹혀 있는 기와들과 지붕을 받치는 기둥과 오랜 세월을 견뎌온 문을 바라보며 아쉬운 마음을 달랜다.

    고개를 들어 은행나무를 올려다본다. 흰 구름이 낮게 드리워져 있긴 하지만 하늘은 참 깨끗하고 파랗다.

    글·사진= 김참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이종훈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