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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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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떠나는 경남산책 (83) 김승강 시인이 찾은 통영 도산일주로

바닷길 되밟으며 두부장수 달려간다
1995년 겨울, 서럽고 막막했던 그때로…

  • 기사입력 : 2014-02-04 11:00:00
  •   
  • 동촌마을과 수월리 사이의 해안도로.

    유촌마을로 들어가는 길.

    양식장에서 따온 굴을 박신장에 하역하고 있는 모습.

    수월마을 입구에 있는 느티나무와 팽나무.

    하양지마을에 있는 팽나무 고목.


    희미한
    풍금소리가
    툭 툭 끊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다름 아닌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 길어다 준 일밖에 없다고
    머나먼 광야의 한복판 얕은
    하늘 밑으로
    영롱한 날빛으로
    하여금 따우에선

    -김종삼의 ‘물통’ 중에서



    나는 나에게 물었다.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 나는 나에게 대답했다. “바닷가 아낙들을 찾아다니며 두부 몇 모 사다 준 일밖에 없다.”

    바닷가 바람은 그때나 지금이나 차고 매웠다. 설을 며칠 남겨두지 않고 있었다. 두꺼운 목토시를 두르고 두툼한 장갑을 꼈지만 찬바람은 여전히 살갗을 파고들었다. 그는 북청물장수가 아니었을까?

    서부경남지방에는 한때 두부장수가 있었다. 1995년도쯤이었던가? 응답하라 1995! 그때 나는 두부장수였다. 어쩌다. 우연히. 지금 나는 자전거를 타고 바닷가를 달리고 있다. 이제 북청물장수가 없듯이 두부장수도 없다. 한때 잠시 손두부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손두부가 있지만 그때 우리가 팔던 손두부는 조금 달랐다. “계란이 왔습니다”라고 하듯이 우리는 “따끈따끈한 손두부가 왔습니다”라고 했다. 새벽에 나가 받아오면 오전 내내 김이 올라왔고 저녁까지 온기가 남아 있었다.

    지금 나는 자전거를 타고 통영 도산일주로를 달리고 있다. 그때는 아주 작은 트럭이었다. 짐칸에 실은 스티로폼 박스에서는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차가워지기 전에 빨리 팔아야 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바닷가 아낙들이 그랬다. 이맘때면 바닷가 아낙들은 대부분 박신장(剝身場)에 있었다. 박신장은 바다 한가운데 있는 양식장에서 채취한 굴을 뭍으로 옮겨와 까는 곳을 말한다.(아무래도 일본말 같다. 그렇지만 달리 용어가 없었다.) 박신장은 바닷가 해안선을 따라 흩어져 있었다. 지금 나는 자전거를 타고 통영 도산일주로를 달리고 있다. 짠 바다 내음이 생경하다.

    박신장은 규모가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었다. 작은 박신장에서는 주로 나이 많은 할머니들이 굴을 깠다. 두부를 들고 들어가면 할머니들은 몇 겹으로 껴입은 바지 안쪽 깊은 곳에서 낑낑거리며 지폐를 꺼내 건네주셨다. 큰 박신장에는 양쪽에서 마주보고 40~50여 명의 아낙들이 앉아 굴을 깠다. 모두 새벽 일찍부터 나와 일을 했다. 큰 박신장의 젊은 아낙들은 두부를 반겼다. 나는 시간을 맞춰 박신장에 도착했다. 오전 10시 무렵이었다. 새벽에 나왔으니 이제 손도 얼고 배도 고파오는 시간이었다. 나는 간장도 준비해 다녔다. 큰 박신장에서는 자기들이 간장이나 묵은 김치를 준비해놓고 기다리는 경우도 있었다. 두부를 판째로 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부를 아낙들은 간장에 찍거나 묵은 김치에 말아 먹으며 잠시 언 손을 녹였다. 이때처럼 설이 다가오면 우리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우리에게도 설은 대목이었다. 설을 며칠 앞두고는 두부를 평소의 열 배 이상은 팔 수 있었다. 선주문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지금 자전거를 타고 통영 도산일주로를 달리고 있다. 짠 바다 내음이 정겹다.

    도산면사무소에서 출발해 77번 국도에 들어선다. 얼마 가지 않아 삼거리가 나온다. 왼쪽으로 가면 해안도로가 나온다. 오른쪽 길은 가파른 오르막인데, 구천, 수월, 하양지·상양지로 바로 가는 길이다. 이 마을들은 나중에 돌아나올 마을들이다. 해안도로를 달린다. 오른쪽으로 채석장이 보인다. 채석장을 지나면 오륜동마을이 나온다. 오륜동마을에서 해안가로 내려가면 첫 박신장이 나온다. 북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도산면 해안가 마을 중에서 가장 춥다. 박신장도 그만큼 을씨년스럽다. 나는 바로 돌아나왔다. 오륜동마을에서 작은 고개를 넘으면 시야가 조금 넓어지면서 마상촌마을이 나온다. 바닷가로 내려갔다. 마상촌마을의 박신장으로 가는 길에는 항상 할머니 한 분이 누가 지나가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굴껍질을 줍고 있었다. 그때 그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마상촌마을을 나와 작은 고개를 넘으면 가오치항이 나온다. 가오치항에는 사량도여객선터미널이 있다. 여객선이 두 대 정박해 있었다. 한 대가 곧 출발하려는지 뱃고동을 길게 울렸다. 일요일인데도 등산복 차림의 등산객은 보이지 않았다. 가오치항을 나와 유촌마을로 내려간다. 유촌마을로 내려가는 길에서 바라보는 바다풍경은 그대로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두고 보아도 지겹지 않을 것 같다. 가오치항을 나오면서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왔기 때문에 유촌마을로 들어가는 내리막길이 반갑다. 유촌마을로 들어갈 즈음에는 겨울 바닷바람도 조금 누그러져 있다. 마을에 들어서자 아까 가오치항에서 사량도를 향해 출발한 여객선이 물살을 가르고 지나가고 있다. 유촌마을은 길쭉하게 뻗어 있다. 유촌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길 양쪽으로 종패들이 쌓여 있다. 굴껍질이 아니라 가리비껍질이다. 가리비껍질은 굴껍질에 비해 굴유생의 부착밀도가 좋다고 했다. 굴껍질이 30개체 정도인데 비해 가리비껍질이 40~50개체 정도 된다고 했다. 가리비껍질은 주로 중국산이고, 중국산의 경우 개당 3원 정도에 들어온다고 했다.

    유촌마을을 나와 평편한 길을 한참 달린다. 갈수록 지나가는 차량이 줄어드는 것 같다. 길 건너 산 쪽으로 매봉산과 봉화산 등산로 입구를 알리는 안내판이 보인다. 오른쪽으로는 바다가 점점 더 넓어지고 있다. 조금 더 가자 왼쪽에 작은 폐교가 나왔다. 정문에 도산예술촌이란 명패가 붙어 있다. 안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희미한 풍금소리가 툭 툭 끊어지고’ 있는 듯했다. 폐교 바로 아래에 있는 마을이 동촌과 서촌마을이다. 폐교에서 바라보니 마을에 햇살이 가득하다. 오른쪽 산 아래로 바닷가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역시 바닷가에 박신장이 있다. 따뜻해서 그런지 규모가 엄청나게 크다. 부두에서 양식장에서 채취해온 굴을 하역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하역작업을 뒤로하고 다시 일주로에 들어선다. 일주로에 들어서자마자 바닷가 쪽으로 큰 건물이 보인다. 통영경찰수련원이다. 수련원에서 수월리로 이어지는 길은 전에는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았다. 수련원에서 시작해 완만한 고갯길이 이어지는데, 그 고갯마루에서 나는 싸간 도시락으로 드넓은 남해바다를 보며 점심을 먹고는 했다. 나는 동·서촌마을에서 수월리로 이어지는 길을 내 마음속의 가장 아름다운 길 중에 하나로 새겨두고 한 번씩 꺼내보고는 했다. 예전에 내가 그랬듯이 고갯마루 전망대에 도착하자 산불조심 아저씨가 막 점심식사를 마치고 일어섰다.

    수월리는 처음 발견했을 때 나는 내 마음속의 가장 아름다운 마을의 하나로 새겼었다. 그러나 오늘은 어쩐 일인지 그때만큼은 나에게 감동을 주지 못했다. 수월슈퍼와 수월보건소는 을씨년스러웠고 그 유명한 방풍숲은 빠지기 시작하는 내 40대의 머리숱만큼이나 성글게 보였다. 수월에서 왼쪽 길로 올라가면 구천이 나오고 구천을 지나면 처음 출발한 곳으로 바로 갈 수 있다. 왼쪽 길로 가지 않고 오른쪽 길을 타고 해안선을 따라 돌아가면 상양지, 하양지마을이 나온다. 나는 하양지마을의 팽나무 고목을 잊지 못한다. 어느 날 그 나무 오른쪽 옆에 있는 슈퍼에서 잠시 쉬면서 막걸리를 한 병 사 마신 뒤 갑자기 울컥해서는 보고 싶은 친구에게 공중전화로 전화를 했던 기억이 있다. 짧은 겨울날은 저물기 시작했고 햇빛은 엷어져갔다. 갈 길이 막막했고 그래서 서러웠다.

    하양지와 구천 사이에 지름길이 새로 나 있었다. 지름길이라 고개가 높아 자전거에서 내렸다. 구천마을을 나와 다시 해안선을 따라 호곡마을로 들어갔다. 호곡마을을 끝으로 내 옛적 도산일주로 두부장수 길 위의 박신장은 자취를 감춘다. 전에는 호곡마을로 들어가는 길도 비포장이었다. 길을 넓혀 포장을 했다. 호곡마을에서는 다시 돌아나와야 했는데, 호곡마을 너머로도 새로 해안도로가 나 있었다. 호곡마을에는 통영잠포학교가 들어서 있었다. 특수학교였다. 호곡마을을 돌아 나와 범골마을로 들어갔다. 범골마을 뒤를 올라가면서도 자전거에서 또 내려야 했다. 범골마을 뒷산을 넘어가는 길은 처음 도산일주로가 시작될 때 분기되었던, 구천마을과 수월리로 바로 이어지는 길과 합류하는데, 왼쪽으로 가면 구천과 수월리로 바로 가는 길로 이어지고 오른쪽으로 가면 도산일주로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온다.

    내 작은 트럭 짐칸에는 아직 두부가 남아 있었을 것이다. 짧은 겨울 해는 뉘엿뉘엿 기울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두부장수인 나의 ‘두부 몇 모’는 물장수인 그의 ‘물 몇 통’에 견줄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시대는 다르지만 그에게도 나에게도 그것은 ‘그때 그 일’이라는 것이리라.

    글·사진= 김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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