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20일 (토)
전체메뉴

[경남비경 100선] (47) 함안 악양루에서 본 겨울 일몰

그날의 해가 남긴 붉은 흔적

  • 기사입력 : 2014-02-06 11:00:00
  •   
  • 해질 무렵 함안군 대산면의 악양루에 올라서면 굽이쳐 흐르는 남강을 배경으로 해가 떨어지는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해가 지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옛 선비들은 산 중턱 아주 조그마한 공간에 정자를 왜 세웠을까’ 했던 생각은 금세 사라진다./김승권 기자/


    오늘도 어김없이 해는 뜨고 또 진다. 때문에 모든 일출과 일몰은 동일하게 보인다. 2년 전, 함안 악양루에 올라 일몰을 바라본 일이 있다.

    가을이 한창이라 바람은 선선했고 둥글고 완만한 해는 만물을 자애롭게 비추며 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1월 말, 다시 악양루에 올라 겨울 일몰을 바라보았다. 서서히 기운을 다하는 붉은 해는 그러나 2년 전 그날의 해는 아니었다.


    1.

    지난해 8월 그는 이승을 떠났다. 사람의 마지막은 생전의 모습과 무섭도록 닮는다더니, 자식들 다 모이기를 기다린 후 큰소리 한 번 없이 차츰차츰 숨을 잃었다. 염천의 한가운데였고, 그의 생일과 마침맞게도 일주일 차이였다. 그것을 두고 친지들은 ‘사람이 온 날 가까이 돌아가면 천수를 다 누린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는 1929년 태어났다. 일제시대에 드물게 상업고교와 대학을 마쳤고 반평생을 시골학교에 재직하며 교장을 끝으로 물러났다. 젊은시절 이야기를 가끔 했는데, 학도병 모집에 혈안이 된 순사들을 따돌리려 밤길을 조심했다는 것, 금융조합에 들어가 매일 손때에 전 돈을 세다 ‘이렇게 살기 싫다’는 생각에 대학을 가기로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손주들은 늙고 야윈 그에게서 가늠할 수 없이 깊은 인생의 연륜을 느꼈다. 그 시대 부모들이 그렇듯, 그의 인생 후반부도 자식들을 위한 희생이 전부였다. 학교가 쉬는 주말에는 일꾼들을 데리고 아내와 함께 전답을 일궜다. 주로 푸릇푸릇한 감이 먹음직스럽게 잘 익도록 보살펴 내다팔았는데, 이것이 다섯 남매를 번듯하게 키우는 밑천이 되었다.



    2.

    2012년 9월, 그는 완연한 80대 노인이었다. 가는귀가 먹었고 지팡이 없이는 한 자리에 오래 서 있지 못했다. 그나마 눈은 나쁘지 않아 점심을 먹고 나면 나른한 햇살을 쬐며 신문을 읽는 것이 낙이었다. 그는 어느 주말 다니러 온 큰손녀에게 신문 한 장을 내밀며 ‘여기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큰 결단이라도 내린 듯한 표정이었다. 손녀는 기다렸다는 듯 그러자며 웃었다. 그는 젊디젊은 손녀의 웃음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30여 년 전, 할애비가 되는 경이로운 기분을 느끼게 한 첫 손녀였고 대학이며 소학이며 온갖 고전을 펼쳐들고 며칠을 고심한 끝에 이름을 지어 붙인 아이였다. 그래서였을까, 쉽게 나들이 이야기를 꺼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손녀에게 내민 신문 지면에는 남강과 함안천이 만나는 지점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함안 뚝방의 풍광이 몇 컷의 사진으로 실려 있었다.



    3.

    그는 손녀가 내미는 손과 지팡이에 의지해 악양루에 올랐다. 다리가 후들거려 걸음을 정확하게 디딜 자신이 없었다. 손녀는 차를 몰아 오면서 ‘악양루’에 오르면 뚝방과 남강물을 훤하게 볼 수 있다고 그를 설득했다. 악양루에 오르는 비탈길은 젊은 사람이라면 순식간에 오를 짧은 거리였지만 그에겐 다섯 걸음을 떼면 한참을 쉬어야 하는 긴 여정이었다. 남강과 함안천이 만나는 물목 위 절벽에 자리 잡은 악양루는 함안군과 법수면, 대산면을 연결하는 지방도를 따라가다 악양 벌판이 끝나는 지점에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1857년에 건립됐다 6·25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복원했으며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팔작지붕을 이고 있었다. 중국의 명승지인 ‘악양(岳陽)’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말에 그는 옛 시인들이 칭송하던 중국 악양도 이곳과 같이 앞으로 너른 들과 강이 펼쳐지고 뒤로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서 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4.

    그는 고요한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쪽으로 자굴산, 한우산, 좌측으로 여항산, 봉화산으로 이어지는 산맥이 한눈에 보였다. 그 밑으로 가을바람을 맞아 더욱 푸르게 피어나는 배추밭이 보이고 은은한 색깔의 구절초와 국화가 핀 뚝방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손녀는 이곳에서 ‘처녀 뱃사공’ 노래가 탄생했다고 했다. 6·25전쟁이 막 끝난 1953년 유랑극단 단장인 윤부길(가수 윤항기, 윤복희의 부친)이 함안 가야정에서 공연을 마치고 악양루 근처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때 악양 나루터에 노를 젓는 처녀뱃사공의 사연을 듣게 된다. 군에 가 소식이 끊긴 오빠를 대신해 노를 저어 길손을 넘겨주면서 오빠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는 것. 이후 윤부길이 이 이야기를 토대로 가사를 쓰고 한복남이 곡을 붙여 1975년 황정자가 부른 ‘처녀뱃사공’이라는 명곡이 탄생했다. 곡조를 모르는 손녀는 시를 낭독하듯 노랫말을 읊었다.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에 스치면/ 군인간 오라버니 소식이 오네/ 큰애기 사공이면 누가 뭐라나/ 늙으신 부모님은 내가 모시고/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



    5.

    2014년 1월 말, 다시 악양루에 오른다. 그 누구와도 아닌 홀로다. 오후 4시 반 일몰 가까운 해거름이다. 차가운 바람을 얼굴에 맞으며 바윗길을 올라 아무도 없는 악양루에 앉았다. 오르는 길은 5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지팡이도 부축도 필요없다. 시침이 막 5시를 지나자 붉게 물든 해가 서서히 타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곤 산 너머로 순식간에 사라진다. 주홍과 보라, 푸른색이 오묘하게 뒤섞인 에메랄드 빛 여운을 남기며. 하지만 진공과 같은 침묵 속에서 담담히 어둠을 맞고 있는 저 해는 지난날 그 해는 아니다. 너른 함안 들판 위에 천천히 내려앉던 그날의 해보다 훨씬 붉고 단단하고 단호하다. 지난 세월이 수많은 것들을 변화시켰듯 봄과 여름, 가을의 응축된 에너지를 품은 해는 이전과는 사뭇 달라져 있다.



    △취재 후기

    2년 전 함께 함안 악양루에 오른 것이 할아버지와의 마지막 나들이가 될 줄은 몰랐다. 그해 겨울부터 할아버지는 자리보전을 시작했다. 때문에 개양귀비가 피고 갯버들에 연둣빛 물이 오르는 계절에 다시 오자는 약속은 영영 지키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지키지 못한 약속이 그것 하나뿐이겠냐만은 ‘함안’이라는 지명을 들을 때면 가슴 한쪽이 저릿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과 같이 서럽게 차가운 겨울 일몰도 아니었는데 할아버지는 그날 일몰 속에서 ‘처녀뱃사공’ 가사를 들으며 우셨다. 2년이 흐른 오늘, 악양루에서 일몰을 본다. 인생의 한낮을 사는 손녀가 미처 보지 못한 이 겨울 일몰을, 할아버지는 그날 보셨던 걸까. 따라서 그날의 울음은 다가올 당신의 혹독한 겨울을 자위하는 눈물이었을까. 그러나 이것만은 아셨으면 한다. 해가 어둔 땅 밑으로 지는 이유는 반대편 어느 드넓은 육지와 바다 위에 다시금 이글거리며 떠오르기 위함이라는 것을.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김유경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