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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떠나는 경남산책 (85) 박서영 시인이 찾은 삼천포 대방진 굴항

꼭꼭 숨겨둔 ‘비밀의 귓바퀴’

  • 기사입력 : 2014-02-18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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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방진 굴항
    마을의 수호신 굴항 느티나무
    굴항을 끼고 있는 대방마을
    굴항 산책로


    담배 문 손등으로 비가 시린데 말이지

    갯가로 시집 간 딸아이 웅크린 등에도 이 찬비 떨어지겠고 말이지

    쉐타 팔짱 너머, 널어놓은 가재미 도다리나 멀거니 내다보겠지

    - 김사인 ‘三千浦’ 중에서


    비가 쏟아지는 날 삼천포에 가고 싶었다. 처량하게, 서럽게 낡은 여인숙 처마 밑에 서서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이라도 보고 싶었다. 왠지 삼천포에 가서 비 내리는 하루를 건너보고 싶었다. 코발트빛 구름이 짙게 깔려 있어 빼내 버려야 할 서러운 감정을 버리지도 못한 채 삼천포로 떠났다. 어젯밤 김사인 시인의 ‘三千浦’를 읽은 것도 화근이었다. 자다가 몇 번이나 창문을 열고 닫았는데, 오늘 아침 몇 방울의 비가 흩어지더니 멈췄다. 저 구름이, 저 구름이 점점 무거워져, 저 덩어리가, 저 덩어리가 점점 커져서 속을 펼쳐 보이길 기대하며 국도를 달려왔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비를 품은 구름과 함께 달려온 느낌이다.

    삼천포항에 앉아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따글따글 아줌마 파마를 한 그녀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미리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냐고. 꽃무늬 양말에 운동화까지 구겨 신은 걸 보니 마음이 급하긴 급했던 모양이다. 그녀는 내 고등학교 동창이다. 국문학도였고 글을 잘 썼지만 사랑에 빠진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지도 않은 채 시집을 가버렸다. 학보사 편집을 하며 데모행렬에도 열심이었다. 그러던 그녀가 삼천포에 시집와 지금까지 삼천포에 살고 있다. 남편은 어부가 아니라 농부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소를 키우고, 밭일을 하러 간다. 나보다 더 문학에 열정을 투자하며 꿈을 키웠던 그녀다. 그녀와는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다. 어떻게 알았는지 어느 날 문득 내게 연락을 해온 그녀가 처음엔 불편했었다. 삼천포에서 창원까지 나를 만나러 왔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이십 년 만에 만났던 것이다. 커피전문점에서 두어 시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우리가 함께 공유한 추억이 참으로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동안 잊고 살아왔던 이야기들. 나도 어느새 추억을 되짚어보고 있었다. 그녀는 자꾸 ‘나이’ 이야기를 했다. ‘옛날’ 이야기를 했다. 나는 여전히 불안정하고, 그녀는 생활인으로서 안정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또 일 년이 흘러 나는 삼천포에 와서 그녀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시를 쓴다는 일이 시간에 가슴을 얹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손 하나로는 발 하나로는 어림없지. 그녀가 말했다. 차갑고도 따뜻한 말투에는 우정이 묻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초등학교에서부터 이십대 중반까지의 시간을 공유하고 있는 사이였다. 그럼에도 나는 처음 그녀가 내게 연락을 해왔을 때 반말이 나오지 않아 곤혹을 치러야 했다. 이제 문학은 그녀에게는 추억이 되었고, 나에게는 현실이 되어 있다.

    대방진 굴항, 이름이 특이하지 않아? 여긴 인공 항구야. 밖에서 볼 때는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설계된 군사기지인 셈이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 거북선을 숨겨 두고 배에 굴이 달라붙지 않도록 민물로 채웠다는 말도 있어. 굴항 주변의 나무들은 팽나무들인데 한여름 짙은 나무그늘이 드리워진 작은 항구의 물빛은 짙고 깊지. 고여 있는 물에 비치는 그늘은 모두 깊은 것 같아. 시원하게 흘러가버리는 것보다는… 우리의 가슴에 고여 있는 것도 그렇겠지. 그러니 모두 다 흘러 보내 버리진 말아. 그게 고통이더라도. 너는 죽을 때까지 시를 쓸 거잖아. 안 그래?

    굴항을 바라보며 그녀가 말했다. 대방진 굴항, 사람의 몸으로 치자면 심장 같은 곳이다. 은신처.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일렁이고 수런거리는 곳. 누군가를 들어앉히고 또 내보내기도 하는 곳이다. 그래서 늘 아프고 외로운 곳. 그래서 달이나 태양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곳. 저 좁고 깊은 곳의 물빛은 이미 봄을 알아버린 것 같다. 내 심장에도 차가운 얼음 밑으로 봄이 달려오는 게 느껴진다. 꽃들이 그 작은 맨발들을 꼼지락거리며 걸어오는 게 느껴진다. 계절이 계절을 업고 소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건 두렵다. 하얗게 목련이 피어나 변덕스런 날씨에 얼어붙은 걸 본 적이 있다. 순백의 목련이 누렇게 얼어버린 채 허공에 매달려 있는 모습은 안쓰러웠다. 그러니, 봄이여! 오려면 추위를 버리고 와라. 일찍 깨어난 개구리든, 목련이든 추위에 떨지 않게.

    반쯤은 춥고 반쯤은 따스한 오늘 같은 날씨에 스웨터를 입고 나온 그녀는 예뻤다. 예전에도 그랬나 싶게 얼굴이 둥글고 적당히 살도 쪘다. 그녀의 집은 고향에서 자전거 가게를 했었다. 셋방살이를 하던 우리 집과는 달리 이층짜리 집에 살았던 그녀는 잘 웃던 문학소녀였다.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나와의 추억은 여전히 유효하다. 굴항을 걸으며 그녀는 뭔가 계속 말을 했다. 나는 듣는 쪽이라서 가끔 고개만 끄덕였다. 대방진 굴항은 고요했다. 배 두 척이 묶여 있고 이름을 알 수 없는 하얀 새가 날아와 빈 배에 앉았다. 자세히 보니 가늘고 긴 장식깃이 늘어져 있다. 마치 땋아 내린 머리카락 같다. 왜가리, 저어새, 쇠백로 등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독특한 새다. 그녀에게 새 이름을 물었더니 모르겠단다. 나는 그 새를 ‘모르는 새’라고 부르기로 했다.

    굴항을 끼고 둥글게 이어져 있는 마을은 지대가 높다. 마을로 올라가는 골목 입구에 ‘굴항 느티나무 안내판’이 있다. 굴항 느티나무는 수령이 745년이고 나무둘레만 해도 9m다. 거대한 쇳덩이가 느티나무를 떠받치고 있다. 우리는 그 쇳덩이 아래를 지나 마을을 올라야 했다. 걷다 보니 어부의 노란 고무장갑이 빨래집게에 걸려 있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사내가 골목을 오락가락한다. 파란 대문 앞에는 낡은 플라스틱 의자가 놓여 있다. 이러니 삼천포는 여전히 삼천포고, 그녀는 여전히 추억 속의 그녀다. 누추하고 낡은 게 아름답게 보이는 내 천성에도 문제가 많다. 마을에 서서 굴항을 내려다본다. 굴항 안내판에 따르면 돌로 둑을 쌓아 만든 현재 모습은 1820년경 완성된 것이라고 한다. 위에서 보니 더욱 독특한 모양새다. 거대한 귀 같다. 듣고 감춰야 할 것들이 저 거대한 귓바퀴를 타고 흘러가 가라앉아 있을 것 같다. 우리의 몸처럼, 가슴처럼, 심장처럼 어쩌라는 말도 없이 스며들어 있는 기억들. 그녀와 나 사이에도 그런 게 있을 것이다. 서로가 기억하는 게 조금씩 다르더라도, 꿈꾸는 게 조금씩 다르더라도 그녀가 잠시 앓았던 첫사랑과 내가 잠시 앓았던 첫사랑의 무늬들이 어른거리다가 사라졌다. 모든 게 삼천포라서 가능한 일이다. 삼천포에서는 누추한 기억도 아름답게 되돌아와 곁에 잠시 앉았다가 간다.

    글·사진= 박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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