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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칼럼] 들꽃이 주는 상념들- 김문주(아동문학가)

  • 기사입력 : 2014-02-28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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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들꽃의 생명은 소리 없이 예쁘다. 한 잎 연둣빛의 입맞춤으로 대지가 깨어난다. 잠들지 못하는 새벽에는 줄기 끝에 꽃 하나 매달아 놓는다. 봄은 그렇게 오고 시작된다. 봄은 생명의 계절이고 들꽃의 세상이다.

    나는 몇 년 전, 들꽃에 조예가 깊은 작가와 시인이 펴낸 책을 보고 나는 들꽃에 빠져들었다. 들이나 산으로 다니며 꽃을 찾아내고 이름을 알아내면 새로운 존재 하나를 가슴에 심은 듯 설레었다.

    그러던 늦은 가을날이었다. 가을이 되면 쑥부쟁이나 산국 같은 꽃들만 간혹 보이다가 산과 들은 조금씩 어두운 색을 내려놓는다. 낙엽이 쌓인 산길을 걷다가 홀로 핀 연보랏빛 꽃을 보았다. 쑥부쟁이였다. 꽃잎이 낙엽을 몇 개나 이고 서 있었다. 쑥부쟁이는 한 줄기에서 여러 갈래의 작은 가지가 나와서 묶음으로 피기 마련인데, 그 쑥부쟁이는 혼자 오독하니 서 있었다.

    다른 꽃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서 있는 꽃 한 송이. 꽃은 외로웠다. 남들이 권하는 길을 가지 않고 고집으로 살아온 내 모습 같았다.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고 했던가. 노력한 만큼 돈이 되지 못하는 일을 하는 건 어쩌면 아둔한 짓이다. 그저 그런 쑥부쟁이 같은 글이나 쓰면서, 혼자 버틸 수 있다고 우기고 있었다. 쪼그리고 앉아 꽃을 들여다보면서 울컥하는 마음을 밀어내기 위해 그 꽃의 모습을 정성스럽게 사진에 담았다. 내 삶의 외롭고 고집스러운 모습도 꽃 속에 담았다.

    작년 봄, 봄꽃을 보러 인근의 비음산에 올랐다. 도대체 꽃은 태초에 어디에서 왔을까. 어떤 진화의 이론도 이 다양한 꽃들의 필요성을 설명해 주지는 못할 것이다. 산길에 핀 들꽃들을 기분 좋게 느끼며 산을 오르다가, 눈길 벗어난 골짜기에서 참꽃마리를 보았다. 손톱보다 작은 크기인데 한 송이를 따서 머리핀에 붙이고 싶은 꽃이다. 하얀 잎 한가운데 박힌 노란 무늬는 봄처녀의 순정이다. 귀한 꽃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군락을 발견했으니 횡재였다.

    사진을 찍고 허리를 펼 무렵이었다. 저쪽 나무 아래서 하얀 꽃이 눈길을 당겼다. 다가가서 보니 참꽃마리 하나가 피어 있었다. 꽃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피어 있었다. 쪼그리고 앉아 바라보니 나무 그늘 속에서 흰 꽃의 존재가 선명하게 빛났다. 햇빛이 부족한 자리였지만 초록 위의 흰 꽃은 우아함이 있었다. 순간, 지난 가을 산길에서 보았던 그 쑥부쟁이가 떠올랐다. 무거운 낙엽을 이고 홀로 피는 것이 그 쑥부쟁이의 몫이었던 것이다. 늦은 감이 있었지만 그 꽃이 있어 낙엽으로 시들어가는 주위가 환했다.

    혼자인 참꽃마리는 자신이 뿌리내린 곳에서 다르게 피어난 존재였다. 혼자 된다고 가슴 아플 것은 없었다. 외로움도 안타까움도 나만의 생각이었다. 혼자 된 참꽃마리나 쑥부쟁이는 자연 속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 한 송이는 하필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더 빛난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꽃 자체로 보지 않고 내 감정에 비치는 대로 바라본 것이다.

    꽃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우리는 꽃이니 꽃 자체로 바라봐줘. 있어야 할 곳에 뿌리를 내린 어떤 꽃도 외로움을 모른단다. 외로운 것은 사람이야. 사람의 외로움이 외로운 꽃을 만드는 거지.’

    외롭다는 생각으로 나는 세상을 얼마나 재고 자르며 살았을까. 외로움 때문에 세상을 슬프게 보고 삐딱하게 보지 않았던가.

    혼자라고 해서 슬플 것도 없다. 내가 내린 뿌리에 힘을 주고 있는 그대로 세상을 바라보면 된다. 외로움도 외로움으로만 바라보고, 그것 때문에 아파하지 않는 것. 그것이 들꽃이 내게 가르쳐준 진짜 외로움이다.

    다가오는 봄에는 들꽃이 되어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나는 제대로 외로워진다.

    김문주 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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