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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藝), 그리고 만남] (9) 화가 서홍원과 수필가 정목일

신문기자와 청년화가로 인연… 일흔에도 35년째 ‘예술친구’
藝 그리고 만남 ⑨ 수필가 정목일(前 경남신문 편집국장)과 화가 서홍원

  • 기사입력 : 2014-03-03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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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목일(뒤쪽) 수필가와 서홍원 화백이 창원시 의창구 봉곡동에 있는 서 화백의 작업실에서 만나 환하게 웃고 있다.


    겨울 끝자락에 묻어온 찬바람이 빗방울과 싸락눈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날, 창원대학교 인근 화실에서 두 예인을 만났다.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정목일 수필가와 창원대 예술대학 교수였던 서홍원 화백.

    정 이사장 역시 1975년 데뷔 이래 20여 권의 수필집을 낸 경남의 대표 문인이고, 서 화백은 닭 그림으로 유명한 홍익대 출신의 화가로 개인·초대전 등 300여 회의 경력을 가진 대가이다.

    큰 키에 코트 차림의 정목일 수필가와 작은 체구에 중절모를 쓴 서홍원 화백.

    경남과 충남 태생으로 출신지가 다른 데다 일생을 매진해온 분야도 달라 겉모습만큼이나 접점이 없을 것 같은데, 이미 35~36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겪어온 스스럼없는 벗이다.

    정 이사장이 수필가로 이름을 얻어가며 경남신문 문화부 기자로 활동할 당시, 서홍원 화백은 창원대학교의 전신인 마산대학 부임을 앞둔 청년 화가였다.

    “1980년대만 해도 한 시·도에 한 언론사만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도내 예술인들을 거의 다 만나고 다녔지요. 서 화백과 제가 만나게 된 것도 경남신문 덕분이라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예술인들끼리 친밀도가 지금과는 달랐어요. 당시 경남 문예의 중심이 마산 창동이어서 예술 전 분야, 장르를 초월해서 모임을 많이 가졌어요. 화랑 네댓 개에 시인들의 낭송회를 볼 수 있는 음악실, 행사 뒤풀이 장소였던 ‘고모령’ 등에서 많이 어울렸죠. 신문기자란 직업적 특성 때문에 예술인들끼리는 서로를 잘 몰라도 저는 거의 다 일면식이 있는 터라, 사회 볼 일이 있으면 모두 제 차지였어요. 어느새 경남 예술인의 성격, 애창곡까지 다 알게 되더라구요. 그 분위기 속에서 서 화백과 알게 모르게 우정을 쌓아온 셈이지요.”

    올해 고희를 맞은 동갑내기 두 예인의 첫 만남은 경남신문이 주선한 셈이다. 정 이사장의 회고는 일흔이라는 나이가 무색하도록 활기가 넘쳤다. 젊은 시절이 어렵지 않게 떠올려지는 느낌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다기를 꺼내고 찻잔을 놓는 서 화백의 모습과는 다분히 대조적이다.

    “젊어서부터 병고가 끊이지 않았어요. 대학 졸업 후에 관절염을 앓기 시작했는데 그 통증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어요. 하루하루 곡예하는 기분이랄까. 마디마디 부어서 절룩절룩거리며 다녔어요. 잘 고친다는 병원을 다 다녀봤는데 완치할 방법이 없다니까 더 절망적이었어요. 약으로 안 되니 종교에도 심취해보기도 했어요. 1982년 마산대학(현 창원대학교)에 부임하면서도 ‘얼마나 여기 있겠나’ 항상 그 생각을 했죠. 그런데 이상하게 마산 와서 더 악화되지 않더라구요. 통증이 올 때는 죽을 것 같았는데, 그런 게 없어지더라구요. 이제는 여기가 고향이나 다름없지요. 정 선생 말처럼 그 당시 마산의 활기가 아주 좋았어요. 마산 어시장 전체를 조망하느라 무학산을 오르내리며 몸도 많이 좋아졌구요.”

    “서 화백이 마산에 왔을 당시, 화단의 거장인 문신 화백이 귀향해서 경남 예술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돼 주었고 작곡가 조두남 선생과 노산 이은상 선생이 생존해 계셨기 때문에 미술, 음악, 문학 등 전 분야에서 예술도시로서 긍지가 상당했어요. 저는 저대로 지역 문화 홍보에 열을 올리며 뛰어다녔어요. 그때는 신문의 문화면이 예술인들을 알리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할 때였으니, 경남신문 문화부 기자로서의 자부심도 있었지요.”

    기자 출신다운 정 이사장의 말에 서 화백은 역시나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향 그윽한 차를 따른다. 화실 한쪽에 도열해 있는 화가의 작품에 눈길을 주던 수필가는 “병마의 고통을 겪었기에 지금의 서 화백이 있다”고 애정 어린 감상평을 던진다. ‘서홍원’ 하면 떠오르는 ‘닭’ 혹은 ‘봉황’이 구상과 추상을 막론하고 담겨 있는 화실 안 작품에서 불교적 색채가 진하게 느껴진다.

    “음양오행사상, 윤회사상을 포함한 불교철학 등 동양철학에 심취한 적이 있었어요. 논어, 맹자, 주역도 읽어 보고. 항상 의문이 생기더군요.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하다 못해 한창 닭을 그릴 때는 닭볏의 생김새가 무척 신기해서 그것만 연구해 본 적도 있어요. 의문이 생기면 나름대로 답을 얻을 때까지 몰두하는 성격이라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퇴임 후에는 우리 민족적 정서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고 있어요. ‘천부경’, ‘환단고기’ 등 민족 종교와 관련된 서적도 읽고 있습니다.”

    올해 들어 수필집 ‘나의 한국美 산책’을 펴낸 정 이사장도 서 화백의 ‘공부론’에 동의했다.

    “예술이란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는 데 의미가 있어요. 그러자면 전통적인 것을 계승해야 한다는 측면과 독자적이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는 측면이 서로 부딪히게 됩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의 예술 세계는 세계 각국의 다양한 실험 방식을 받아들이다 보니 참신한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뿌리가 약한 이미지일 뿐 강렬한 예술적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서 화백의 말처럼 우리 민족의 미 의식과 정서를 바탕으로 새롭게 발전시켜 나가야 됩니다. 우리 것을 망각하고 새로운 창조가 있을 수는 없습니다. 뿌리 없이 자기 마음만으로 새로운 것을 개척하고 창조해낼 수는 없어요.”

    젊은 예술인들에게 주는 노장들의 안타까움과 바람이 뒤섞인 조언이 계속됐다.

    “한국적 정서와 철학을 현세대가 등한시하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민족적 정서를 앎으로써 새로운 창조의 바탕을 마련하게 되고 그것이 우리 문화를 이어가는 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거기다 우리 것을 너무 소홀히 합니다. 국제적 감각만 중시하거나 눈에 보이는 부분에만 치중하는 느낌입니다. 일례로 숭례문 복원에서 드러난 문제들 있잖아요?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속은 대수롭잖게 생각하다 생기는 문제들입니다. 작업하려고 먹을 갈다가도 ‘내가 뭣 하러 이걸 하고 있나’ 싶을 때가 있어요. 한국화에 필요한 화구들마저도 우리 것이 없어요. 중국, 일본 게 대부분입니다. 우리나라는 있던 기술마저도 못살리고 있어요. 서양화도 아니고 한국화를 하면서 외국 재료를 써야 하는 게 속상합니다. 전통과 맞물려 있는,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는 이면 세계에도 좀 더 신경을 써야 하지 않나 싶어요.”

    “요즘 한류(韓流) 얘기를 많이 하는데, 젊은 세대들이 즐기는 대중문화에 편향되어 있어요. 그건 우리 국부(國富)에 비해 미흡한 한류입니다. 본격적인 예술 한류도 이뤄져야 비로소 한류의 구색이 갖춰지는 것 아닐까요? 중국과 일본이 세계적으로 뚜렷한 자기 문화를 인정받고 있듯이 우리도 전통문화와 더불어 예술 전반에 대한 문화를 전 세계에 소개하고 가치를 높여야 합니다. 그러자면 우리 문화에 대한 자각과 진흥책도 필요하겠지요.”

    일주일에 이틀씩 서울 강연을 이어가고 있다는 정 이사장은 올해 말쯤 ‘나의 한국美 산책 2’를 출간할 계획이다. 그 넘치는 에너지에 서 화백이 “정 선생이 계속 건강해서 지금처럼 문학인생의 마무리를 잘하면 좋겠다”고 덕담을 건넨다.

    “문학하는 사람은 자기만의 글쓰기 목적, 즉 주제가 있어야 합니다. 주제 없이 하다 보면 시간 낭비, 시행 착오를 겪게 돼요. 인간은 한시적인 존재라 돈이고 명예고 다 사라지고 오로지 남는 것은 기록입니다. 그 기록이 화가에게는 그림이겠죠. 예술가들은 각자 영원 장치를 갖고 있다 할 수 있어요. 예술이란 영원히 남을 만큼 가치롭고 의미 있는 행위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허욕이며 사치일 뿐입니다. 각자의 체험을 통해 사회적 현상에 대해 발언하고 표현하는 것이 작가의 소명이라고 생각해요. ‘나의 한국美 산책’을 출간하게 된 이유도 오랜 시간 글을 쓰면서 과연 내가 하고 싶은 얘기가 무엇일까를 고민하다 얻어낸 답입니다.”

    정 이사장의 말에 동감을 표하던 서 화백이 마지막 한마디를 보탰다. “항상 모자람을 느껴요. 여전히 한국화 기본을 더 닦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부는 끝이 없는 것 아닙니까? 완성이라는 게 없어요. 숙련된 기술이 있다고 예술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사진 촬영을 마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두 예인. 같이 들를 데가 있다고 한다. 보슬보슬 눈도 비도 아닌 겨울 풍경 속에 동행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마치 한 폭의 한국화처럼 긴 여운을 남긴다.

    글= 황숙경 기자 hsk8808@knnews.co.kr

    사진= 성승건 기자 mkseong@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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