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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떠나는 경남산책 (88) 박서영 시인이 찾은 거제 서이말 등대

눈 감으면 펼쳐지는 막막한 밤바다
한줄기 빛으로 날 지켜주는 너

  • 기사입력 : 2014-03-11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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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이말 등대 가는 길
    거제시 일운면 지세포리에 있는 서이말 등대
    예구마을 돌담길
    서이말 등대에서 보이는 섬들
    예구마을 천주교 예구공소
    와현모래숲해변
     

    등대 앞 천주교 순례지 표시






    거제도 서이말 등대 앞에 쭈그리고 앉아 생각한다. 흰 등대가 봉인된 편지 같다. 바다에 점점이 떠있는 섬과 붉은 동백을 우표처럼 붙이고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그 편지엔 고독과 사랑에 대한 말들로 가득하리라. 등대는 출입금지 팻말과 함께 굳게 문이 닫혀 있다. 계단에 앉아 짙푸른 바다를 바라본다. 침묵만큼 긴 고백이 있을까. 등대는 말없이 불빛을 비춰 항해자의 길을 밝혀준다. 사랑도 그러할까. 침묵이 빛나는 불처럼 뜨겁다는 걸 안다. 우리는 뜨거움 속을 잠시 지나왔다. 항해를 떠나 차가운 바다, 차가운 달빛, 차가운 몸속으로 뜨거움이 지나가는 걸 느껴보자. 그것은 한때 우리를 빛나게 했던 것들,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반짝임들. 반짝임을 느꼈을 때도 무섭고, 반짝임이 사라지는 것을 느낄 때도 무섭다. 사랑이 두려운 이유다. 그러니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모르는 거지. 항해가 끝나면 고단한 잠에 빠져야 한다. 나는 망망대해를 항해하며 뭔가를 쓰려는 사람. 여전히 멀미가 심한 채로, 구토하고, 두리번거린다. 눈을 감으면 밤바다 위에 달과 별이 뜨고, 어디선가 세이렌의 노래가 들리는 듯하다. 세이렌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바다의 요정이다. 세이렌의 노래는 영혼을 매료시키는 힘이 있어 한 번 들으면 빠져나올 수 없다. 이 노래를 들은 뱃사람들은 깊은 잠에 빠져 죽거나 배가 난파되기도 한다. 그렇다. 이런 곳에서 눈을 감고 쭈그리고 앉았는데 세이렌의 노래가 들리지 않는다면 내 심장은 죽은 것이다. 떨림이 사라진 것이다. 아름답고 위험한 곳. 천 개의 사랑과 천 개의 이별이 매일 몸을 뒤섞는 곳. 치명적인 유혹들이 내 두 손을 물고 사라지는 곳. 글을 쓰는 자의 유형지는 그런 곳이다. 인생에서 누구나 세이렌의 유혹에 빠지는 순간이 있다. 스스로 세이렌이 되고 싶어지는 순간도 있다. 그 무엇이든 우리는 선택하게 되겠지. 모험을 즐겼던 그리스신화 속의 영웅 오디세우스도 세이렌의 유혹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의 몸을 배 기둥에 묶었다고 하질 않는가. 그 어떤 순간이 오든, 어디선가 등대 같은 사람이 따뜻한 음파와 빛으로 우리의 마음을 다독거려 준다면 좋겠지. 그렇다면 우리는 긴 울음을 잠시 멈출 수도 있겠지. 당신과 나 사이엔 긴 침묵이 있었다. 당신과 나 사이엔 생략이 있다. 여백이 있다. 울음이 있다. 나는 그 묵묵한 미소를 보며 어디를 향해 방향을 잡아야 할까. 우리가 보고 말하는 것엔 생략된 부분들이 있지. 어제의 추억에도. 오늘 읽은 신문기사에도, 우리가 모르는 생략된 부분들이 있을 거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생의 방향을 어디로 잡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그런 내 몸 속에 등대가 깜박이고 있다. 나는 등대를 지키는 사람처럼 앉아 고민한다. 내 몸의 불빛이 먼 곳을 비추는 생각을 해본다. 어떤 곳은 환하게, 어떤 곳은 캄캄하게! 이 세상에는 불을 켜야 할 곳과 불을 꺼야 할 곳이 있다. 센서가 고장나버린 심장이 제멋대로 켜졌다가 꺼져버린다. 어느 계절의 유형지를 지나왔기에 그렇게 된 것일까. 어딘가를 항해한 후 돌아왔기에 마음은 고단하고 입술은 점점 침묵에 익숙해지려고 할까. 밤의 항해에서 등대의 불빛을 만나면 가슴이 얼마나 저릿해질까. 많이 기다렸기에. 오래 헤맸기에.



    밤에 배 위에 있다는 것은 광활한 우주를 떠도는 것과 같다. 나는 단 한 번 그런 경험을 했었다. 제주도에 갈 때였다. 밤새 배 위에서 우주를 활공했다. 그날의 막막함, 먹먹함, 두려움. 그리고 몇 번이나 바다를 내려보다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바다로도, 하늘로도 뛰어내릴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솟구친다는 말에는 뛰어내린다는 뜻도 숨어있다고 생각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서 경계라는 단어는 얼마나 괴로울까. 고민할까. 아무튼 세이렌의 유혹은 등대가 비추는 방향으로 가지 않고 다른 곳을 꿈꾸게 한다. 그래서 ‘세이렌’은 ‘사이렌’이 되어 위험을 알리고 스스로를 파멸시켜 버렸다. 등대여, 너는 우리가 궤도를 벗어나지 않도록 밤마다 깜박이겠지. 서이말 등대는 20초마다 깜박인다. 안개가 짙은 날은 음파 10마일을 발성하여 대한해협의 항로를 알려주는 남동해의 최대 등대라고 알려져 있다. 1944년에 처음으로 불을 밝혔지만 대한민국이 일본에서 해방되던 1945년 8월 15일 폭격으로 파괴된 아픔을 겪었다. 그 후 몇 번의 복구공사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처음 20마일을 비추던 불빛의 거리가 27마일로 늘어났다. 멀리 대마도가 잡힐 듯 아련하게 보인다. 거제 유일의 유인등대로 해금강을 끼고 해돋이와 해넘이를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지형이 쥐의 귀를 닮아 ‘서이말’이라는데, 그렇다면 나는 쥐의 귓불에 앉아 있는 건가. 누군가의 귀에 걸터앉아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 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 등대로 들어오는 길은 좁고 깊었다. 멧돼지 출현을 알리는 노란 표지판이 예뻐 그 옆에서 잠시 서성거렸지만 멧돼지를 만나지 못했다. 천주교 순례길을 지나쳐 전망 좋은 절벽에도 잠시 서 있다가 왔다. 서이말 등대 가는 길에서 만난 몇 개의 우연을 사랑하기로 하자. 갑자기 툭 떨어진 돌멩이, 까치의 시체를 뜯어먹다가 날아가 버린 까마귀 몇 마리, ‘삼촌 커피공장’이라는 간판을 따라갔는데 ‘삼촌커피공장’은 폐업했더라. 그 모든 것. 우연처럼 지나쳤는데 내 가슴에 남았다. 무엇보다, 내장이 다 파 먹혀서 바람이 불자 풀썩 몸을 뒤집던 까치 한 마리. 까치의 영혼은 가벼워져서 어디론가 갔겠지. 까마귀의 영혼은 무거워져서 가느다란 전선줄에 앉아 생각에 잠기겠지. 날개를 펼쳐 빈속을 드러낸 까치는 봉인된 편지가 다 찢어져 흩날리는 것 같았어. 이렇게 단단하게 봉인된 등대와 속을 다 내놓은 까치 사이엔 시간의 길이 있다. 누구나 처음엔 침묵을 사랑하지만 결국은 다 말하고 말지. 그러다가 까치처럼 가벼워져 어디론가 사라지는 거다. 끝내 영원한 침묵을 사랑하게 되는 거다.



    등대 입구엔 천주교 순례길에 대한 안내도가 있다. 천주교 순례길은 조선해양문화관이 있는 지세포에서 공곶이와 예구마을을 거쳐 서이말 등대까지의 구간을 말한다. 신유박해로 맺어진 거제도와 천주교의 인연은 병인박해를 지나면서 선교로 이어졌다. 복음의 씨앗이 처음으로 거제도에 떨어진 것은 병인박해 직전으로 리델 신부와 순교자 구한선 타대오가 거제도 전교를 위해 다녀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병인박해 중인 1868년경 윤사우가 거제도로 들어왔다. 그는 할머니의 입교로 가족 모두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 윤사우의 가족은 신앙생활이 비교적 자유로운 대마도로 피신할 목적으로 거제도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누리재고개에서 길은 서이말 등대와 와현모래숲해변으로 나뉜다. 등대를 나와 모래숲해변으로 내려갔다. 거제도에서는 보기 드물게 고운 모래해변이다. 와현모래숲해변을 지나 예구마을로 들어가보았다. 이곳 역시 천주교순례길에 속하는 곳이다. 지세포, 서이말등대, 와현모래숲해변, 예구마을, 그리고 공곶이로 이어진 길은 모두 순례의 길이다. 세이렌의 노래를 들으며 유혹에 빠졌던 순간도, 그리고 이후의 긴 고통도 순례의 길 위에서 있었던 일이다. 내가 여전히 세이렌의 노래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아직 순례의 길을 끝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태어나는 순간, 우리는 긴 순례의 길에 올라야 한다. 순례의 끝이 어딘지는 당신도 나도 잘 알고 있다.

    글·사진= 박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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