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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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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藝), 그리고 만남] (10) 김대환 화백과 오하룡 시인

우리에게 마산은 ‘예술의 고향’이자 ‘30년 인연의 끈’
닮은꼴 예술인..둘 다 일본서 태어나 마산에 정착

  • 기사입력 : 2014-03-24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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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대환(왼쪽) 화백과 오하룡 시인이 창원시 마산합포구 문신미술관에서 작품 세계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활짝 웃고 있다.
    마산 앞바다가 보이는 문신미술관에서 김대환(왼쪽) 화백과 오하룡 시인이 포즈를 취했다.


    교당 김대환(85) 화백 하면 떠오르는 것이 미인도다. 평생 어여쁜 미인들을 보아서인지 미수(88세)를 바라보는 나이라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맑은 홍안(紅顔)이다.

    19세 때 첫 작품을 출품했으니 화가로서 첫걸음을 뗀 지도 65년이란 세월을 훌쩍 넘었다. 지금은 지역 화단(畵壇)의 최고령 원로로서 붓과 씨름하고 있다. 오하룡(75) 시인은 지역의 척박한 출판업계에서 근 30년간 출판업을 이어오면서 문단(文壇)의 파수꾼 역할을 하고 있다. 또 1964년 잉여촌 동인으로 시작(詩作) 활동을 시작해 문단에 발을 디딘 지 5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오 시인은 희수(77세)를 바라보는 나이지만 시작활동을 하며 문단 행사에도 빠짐없이 참석하고 있다.


    ◆마산 지키며 창작활동

    김대환 화백과 오하룡 시인의 공통점은 출생지가 일본으로, 이후 마산에 정착해 지역을 지키면서 쉼없이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원로가 김 화백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자산동 자택에서 만났다.

    “교당 선생님, 몸이 불편하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어떠하신지요.” 오 시인은 교당을 보자마자 안부를 물었다. 김 화백은 최근 허리가 좋지 않아 바깥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다.

    “직업병이지요. 60년 넘게 엎드려 그림을 그려 왔는데, 허리가 버틸 수 없었을 겁니다. 요즘 계속해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나이 차가 10년 나는 그들의 인연은 ‘예향 마산’이 모태이다. 피를 나눈 형제는 아니지만 마산의 예술혼이 한 울타리로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척박하고 가난했지만 막걸리 한 잔의 낭만,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바탕으로 그들은 시대의 아픔을 넘어 창조적 열정을 꽃피울 수 있었다.

    “1980년대 초 마산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인 창동 뒷골목 고모령에 가면 항상 교당 선생님을 뵐 수 있었지요.”

    이 시기 마산 문화예술인들에게 ‘고모령’이라는 공간은 둘도 없는 쉼터였다. 이곳에 가면 장르를 초월해 문화예술인들을 즐겁게 만날 수 있었다.

    당시 단골로 화가는 최운, 문신, 김대환, 정상돌, 김영진, 남정현, 권영호, 박장호, 변상봉, 허청륭, 문인은 황선하, 정진업, 이광석, 박재호, 신상철, 서인숙, 오하룡, 정규화, 이선관, 사진은 남기섭, 강신율, 연극은 한하균, 이상용 등이었으며, 송인식 동서화랑 대표 등도 자주 드나들었다.

    두 예술인의 만남은 80년대 초에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오 시인이 마산문협 사무국장과 마산예총 간사를 맡으면서 다른 장르의 예술인들과 많은 교류를 해왔고, 약주를 즐겨하던 김 화백과의 친분도 두터워졌다.

    오 시인은 김 화백에 대해 “정직하고 순박하면서 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해 선후배 예술인들을 챙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김 화백은 “오 시인은 따뜻하고 정이 많은 문인으로 시집을 출간하면 항상 나에게 보내주곤 했다”며 옛 추억을 떠올렸다.

    마산 문화예술계는 1982년 마산에서 전국체전을 개최하면서 한 단계 발전했다. 체육계의 발전을 부러워만 하지 말고 문화예술계도 한발 더 나아가자는 목소리가 모여 전시회, 음악회, 낭송문학회 등이 활성화됐다.

    그즈음부터 고모령에 많은 예술인들이 모였고, 마산 대동제의 뿌리가 됐다.



    ◆실명의 아픔 창작으로 승화

    김 화백은 어릴 때부터 ‘천재 화가’라는 칭찬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태어나 제대로 된 미술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초등학교 시절 각종 미술대회에서 많은 상을 받아 주위를 놀라게 했다.

    “해방 후 마산에 정착했는데 1947년 6월 마산백화점(남성동 옛 한일은행)에서 열린 제1회 미술전에 첫 작품을 출품했었죠. 임호, 이림, 문신, 최운, 이수홍, 김종영 등 37명의 작가가 108점을 출품했는데, 그때 내가 열아홉 살로 가장 어렸습니다.”

    해방 후 마산에서는 처음 열렸던 전국 규모의 종합전시회로 서양화, 동양화, 조각을 전공하는 작가의 작품이 전시됐다.

    하지만 그는 그해 8월 사고로 왼쪽 눈을 다쳤고, 치료 시기를 놓쳐 눈을 잃고 만다. 그는 빛바랜 사진첩을 꺼내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집이 가난해 치료를 받을 상황이 아니었지요. 일본에 계시는 누님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가서 치료를 받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그때 일본인 선생으로부터 3개월 정도 미인도를 배웠는데, 그 시기가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유일한 시기였죠.”

    마산으로 돌아온 그는 부모님을 공양하고 생계를 위해 상업미술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강남극장 미술부장을 하면서 18년간 극장 간판을 그렸다.

    “당시 저는 상업미술을 하면서 돈을 벌었기 때문에 배고픈 화가들을 많이 도와줬죠. 해방과 전쟁 후 굶주리고 힘들었던 시절이었지만 그림 하나로 형님, 아우 하며 행복하게 지냈으며 문신, 최운 선배가 나의 미인도를 보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려보라고 해서 1971년 11월 18일 첫 개인전을 한성다방서 열었죠.”

    그리고 60년 넘게 미인도를 그리고 있다.

    오 시인은 “교당 선생의 미인도는 곱고 단아한 모습이 정갈한 한복과 어우러져 한국 여인의 아름다움이 짙게 서려 있다”며 “수줍은 듯이 웃음을 머금고 있는 입술과 오똑 솟아 있는 콧날뿐만 아니라 머리카락까지 한 올의 흐트러짐 없이 표현해 예술적 감각이 타고났다”고 작품을 평했다.



    ◆시인·출판인으로 열정적 활동

    오 시인은 1964년 잉여촌 동인으로 시작활동을 해 5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또 1985년 ‘도서출판 경남 출판사’를 시작해 출판인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서울에서 농업연구라는 잡지의 편집부원을 하고 편집장도 했는데, 사정이 생겨 마산으로 내려와 문협 일을 하다 보니 편집 경험으로 인해 문학잡지에 관여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익숙한 분야의 출판사를 하게 됐죠.”

    오 시인은 창원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초등학교와 고등공민학교 1학년을 이곳에서 보내고, 부산에서 중학과정을 마쳤다. 객지생활을 하면서도 창원에 어머니가 계셔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1977년 중순 마산에서 정착했다.

    “창원에 오면 어머니를 돕기 위해 농삿일도 했고, 지게를 지고 먼 산에 가서 나무를 해 나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내 첫 시집의 제목이 ‘모향(母鄕)’이며, 내 작품 사유의 바탕은 농촌입니다.”

    그는 ‘모향’을 비롯해 ‘잡초의 생각으로도’, ‘마산에 살며’, ‘창원별곡’, ‘내얼굴’ 등의 시집을 냈다. 초기에는 주로 농촌 정서를 모티프로 삼고 있고, 최근에는 삶을 성찰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다. 그의 시는 삶의 경험들이 녹아 있어 독자들과의 유대가 깊다.

    “유소년 시절을 농촌에서 보낸 데다 농촌 관련 잡지 일을 하다 보니 농촌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필연적인 일로, 거기다가 내가 살던 고장의 공단화로 이농 탈향을 동반한 이주민과 실향민이 발생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관찰자로서의 역할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죠.”



    ◆앞으로 계획은

    두 예술인과 함께 문신미술관으로 향했다. 오 시인은 거동이 불편한 김 화백을 부축해 문신의 작품이 전시된 야외전시장에서 옛 추억을 떠올리며 따뜻한 봄햇살을 즐겼다.

    “30년 전 처제 결혼 선물을 하려고 교당 선생께 작품을 부탁한 적도 있는데 기억이 나시는지요?”

    “그때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작품에 자신이 없어서 작품값을 많이 받지 못했었죠. 하하하~”

    두 예술인은 전시장을 거닐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오 시인은 교당의 건강을 걱정하며 앞으로 계속해서 그림을 그릴 것인지 물었다.

    김 화백은 “허리가 아파 3개월 전에 그림을 놓았는데, 나으면 다시 그림을 그릴 것이다”며 “이제는 엎드려서 작업을 해야 하는 세필화보다는 일필화로 전환해 작품활동을 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그는 또 “한국화는 우리의 고전미를 그대로 담고 있으며 민족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분야로, 우리 것을 소중히 하지 않으면 우리 민족의 뿌리는 정체성을 잃고 말 것이다”고 한국화가 홀대받는 현실을 지적하며 “미수를 바라보는 나이지만 아직도 붓을 잡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강조했다.

    오 시인은 올해 시집을 출간할 계획이다. 그는 “시집을 낸 지 10년이 됐는데, 작품을 준비 중이며 상반기 중에 출판을 하겠다”며 계획을 밝히고 “교당 선생님 그림을 활용한 시화전의 기회를 만들어 보도록 마산문협에 건의를 하겠다”고 말했다.

    마산만을 바라보며 손을 꼭 잡고 환담을 나누는 두 예술인의 모습이 문신의 조각품과 어우러져 눈부시다. 글= 이종훈 기자 leejh@knnews.co.kr 사진= 김승권 기자 sk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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