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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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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6) 설교양사(設校養士)- 학교를 세워 선비를 양성하다

  • 기사입력 : 2014-03-25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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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떤 국가든 간에 그 국가가 계속해서 존립하기 위해서는 각 분야의 인재가 필요하다. 서양에서는 플라톤의 아카데미를 대학의 기원으로 치나 동양에서는 지금부터 4000여 년 전 아득한 옛날 하(夏)나라 때부터 국가에서 설립한 대학이 있었다. 하나라에서는 교(校)라고 했고, 은(殷)나라에서는 서(序)라 하고, 주(周)나라에서는 상(庠)이라 했다. 또 하나라 은나라 주나라에서 모두 지방 학교는 학(學)이라고 했다. 지금 우리가 학교라고 할 때 많이 쓰는 ‘교(校)’ 자는 하나라 때 학교를 말하는데, 맹자(孟子)는 이 교(校)자를 ‘가르친다(敎)’의 뜻으로 풀이했다.

    서양 중세의 대학은 주로 조합(組合)에서 시작됐다. 12세기 말쯤에 하나의 길드로서 교수 조합과 학생 조합이 합쳐진 교육 길드에 해당되었다. 이 시기에 왜 대학이 필요하게 되었는가를 살펴보면, 가장 기본적인 원인은 경제적인 발전 때문이었다. 도시와 상업의 발달은 인간의 끝없는 지식 탐구의 욕구를 자극하게 된다. 즉 경제력이 향상됨으로써 사람들은 교육과 학문에 대한 필요성을 더욱더 절감하게 됐고, 한편으로는 인적 자원에 대한 사회적 수요도 늘어나 대학들의 전문인 양성이 필요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서기 372년 고구려(高句麗)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에 국학(國學)을 설치한 이래로 각 나라마다 국학, 태학(太學), 국자감(國子監)이 있었고, 조선시대 성균관(成均館)은 최고학부로서 인재양성의 기능을 다했다.

    우리 전통적인 교육은 윤리·도덕에 바탕을 둔 인문학적 가치, 인간다움과 같은 것이 가장 지배적이었고 또한 국가와의 관계가 아주 긴밀했다.

    고구려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당시의 국가 재정능력에 비해 국가에서 교육에 투자하는 재정이 엄청났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정말 교육을 중시한 민족이었다.

    조선시대 성균관의 학생이 되면, 학비는 물론이고 숙식까지 다 제공했다. 물론 병역도 면제해 줬다. 임금이 자주 행차해 학생들을 격려하고 서적 등 선물을 내리기도 했다.

    지방 향교 역시 학비가 없었고, 병역이 면제됐다. 그 운영경비도 모두 지방 관아에서 책임졌다. 또 국가에서 내려준 토지가 있어 향교 등의 경비로 충당했다.

    이런 성균관이나 향교의 교육제도를 물려받은 것이 국립대학이다. 오늘날의 국립대학이 옛날의 성균관이나 향교처럼 국가에서 경비를 전액 책임지고 학생들은 모두 학비 없이 학교에 다닐 수는 없지만, 그래도 국립대학의 등록금이 싸서 학생들의 부담을 들어줄 수 있다. 또 꼭 필요하면서도 상품성이 별로 없는 학문을 보호해 연구하게 하는 기능이 있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시장경제 논리로 모든 것을 재단해 국립대학의 등록금을 계속 인상해 사립대학과 격차가 적어지도록 만들고, 또 취업이 잘 안 되는 학교는 없애려는 움직임은 국가가 인재를 기르는 취지에 합당하지 않다. 국립대학의 존속가치를 사립대학과 꼭 같은 기준으로 판단하려고 한다.

    사립대학이야 설립자의 설립목적에 따라 운영방침이 바뀔 수도 있지만, 국립대학은 국가가 존립하는 데 꼭 필요로 하는 학문분야는 비록 시대적인 인기가 없다 해도 지속적으로 보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립대학에서 못 하거나 안 하는 분야를 하고 있는 국립대학의 기능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국가가 학교를 설치해서 인재를 양성한다는 본래의 취지를 잘 생각해야 할 것이다.

    *設: 베풀 설. *校: 학교 교.

    *養: 기를 양. *士: 선비 사.

    경상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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