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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비경 100선] (58) 고성 거류산성에서 바라본 풍경

저만치서 들려오는 산·들·바다의 노래

  • 기사입력 : 2014-04-24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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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성 거류산성에 올라서면 시원하게 펼쳐진 바다와 고성평야를 조망할 수 있다./김승권 기자/


    산과 다도해, 평야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고, 역사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고성의 진산 거류산을 찾았다.

    이번 탐방지는 거류산에 있는 경남도문화재인 거류산성. 고성군 거류면 감서리 봉림마을에서 거류산성 이정표를 따라 가면 임도를 타고 목적지 아래까지 차로도 갈 수 있다. 임도가 끝나는 지점에 소공원이 잘 조성돼 있다. 철쭉과 영산홍이 절정이다.

    10여분 산행하자 거류산 정상(해발 571m) 바로 밑 550m 지점에서 복원 중인 산성과 만난다. 탁 트인 산성에서 바라보면 동쪽은 당동만, 남쪽은 벽방산, 남서쪽은 자란만, 서쪽은 고성평야다. 산 너머 북쪽은 당항포다.

    당동만은 예부터 고기맛이 좋아 임금님 상에 올렸다는 곳이다. 통영 어의도·수도·지도가, 그 뒤로 거제 가조도와 거제도가 자리를 잡았다. 자란만은 다도해, 점점이 섬들이 포개져 있다. 드넓은 고성평야, 그 들녘 한쪽에 고성읍내가 자리하고 있다.

    복원한 성곽 위를 걸어본다. 옛 민초들이 쌓았던 성을 현대인들이 발굴, 복원하면서 그 목적이나 의미는 다르다. 1000여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민초들의 숨결을 더듬어본다.

    거류산성은 해발 550~375m에 쌓은 성이다. 누가 언제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다 성을 쌓았을까. 최근 거류산성에 대한 고고학적인 조사 성과가 발표되고 있지만, 결론은 고문헌에서 구체적인 사실을 찾을 수 없어 연혁을 파악하기 힘들다고 한다. 축조 시기에 대해 조사기관마다 차이가 있다. 소가야 시대 신라의 침탈에 대비해 왕의 피난처가 됐다고 하는가 하면, 신라보다는 왜구를 견제할 목적으로 고려 이후에 축조됐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축조수법에 근거해 통일신라 성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시굴 결과를 토대로 신라말~고려초에 축조된 성으로 보기도 한다.

    동사강목에는 928년 5월에 강주(지금의 진주)의 진경 등이 양곡을 고자군(고성군의 옛 이름)으로 운반하는데 견훤이 몰래 군사를 보내 강주를 습격하니, 진경 등이 돌아와 싸웠으나 패해 죽은 자가 300여명이나 되고 장군 유문은 견훤에게 항복했다는 대목이 있다.

    지난 2004년 거류산성 발굴조사 때 ‘租倉(조창)’으로 추정되는 글자가 새겨진 기왓장이 나와 이와 연관지어 진전된 해석이 나왔다. 조창을 산성에 설치한 이유는 전쟁과 같은 특수한 상황 속에서 만들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평화 시기에 운반의 어려움을 감내하면서 굳이 평지가 아닌 산성에 조창을 둘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에서 볼 때 928년 당시 진경 등이 고자군으로 운반한 양곡의 행선지는 거류산성의 조창일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당시 나말여초(羅末麗初)의 혼란기로 거류산성에 조창을 둘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 전개됐다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비교적 안전한 장소인 거류산성이었다고 보더라도 지나친 억측은 아닌 듯하다. 산성의 축조 역시 고성 출신의 호족인 유문과 관련지어 볼 수 있다. 하지만 학자들도 이와 관련한 명확한 단서가 없어 추정만 할 뿐이다.

    거류산성의 축조에 대한 직접적인 자료는 아니지만 ‘영남읍지’의 고성부 고적조에는 산성 자료가 나온다. ‘거류산상봉유석정 수심청랭 속전 선인정 정방유석 여와우형 이석격지 칙오음육률 일시구성 속전 선인소격종운(巨流山上峰有石井 水深淸冷 俗傳 仙人井 井傍有石 如臥牛形 以石擊之 則五音六律 一時俱成 俗傳 仙人所擊鐘云).’ 거류산의 상봉에는 석정이 있는데, 물이 깊고 청랭하며 민간에서는 선인정으로 불렀음을 알려주고 있다. 아울러 우물터가 선인이 종을 치던 곳이며, 우물 곁에는 돌로 때리면 오음육률이 다 이뤄지는 와우형의 돌이 있었음을 전하고 있다.

    발굴 조사에서 건물지와 우물터 2곳도 발견됐다. 발굴 전부터 지역 주민들은 성 안의 우물터로 알고 있었다.

    거류산성 길이는 총 1397m로 1272m는 잔존하고 있으며, 125m는 유실됐다. 현재 복원 가능한 성곽은 1272m 외에 건물지 3동과 우물 2곳이 성내에 남아 있으며, 성곽 내 면적은 8만9041㎡로 추정된다. 현재 폭 3.2m, 높이 3.3m, 길이 322m를 복원했다.

    거류산은 고성의 주산으로 등산로가 잘 정비돼 있다. 거류산성을 쌓은 옛 민초들을 상상하면서 산행한다면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거류산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먼 옛날, 여염집 규수가 부엌에서 밥을 짓다 밖을 나와보니 산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낙이 놀라서 “산이 걸어간다!”고 소리쳤고 산은 누가 보면 움직이지 못하니 그 자리에 서고 말았다. 그때 ‘걸어가던 산’이라는 뜻으로 ‘걸어산’으로 불렸고, 그 산이 오늘의 거류산이 됐다고 한다. 스위스 알프스의 마터호른(Materhorn)을 닮아서 ‘고성의 마터호른’으로도 불린다. 산 중턱에는 원효대사가 선덕여왕 1년에 창건한 절인 장의사가 있다. 주 등산로 초입에는 엄홍길전시관이 있다.

    이학수 기자 leehs@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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