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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6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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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藝), 그리고 만남] (12) 박춘성 화가와 김미윤 시인

자네 기억나는가, 마산 대동제의 낭만과 추억들이…

  • 기사입력 : 2014-04-28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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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춘성(오른쪽) 화가와 김미윤 시인이 대우백화점 지하 갤러리에서 마산 대동제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


    “마산 대동제를 창원과 진해로 확대하는 것은 물론 인근 김해·함안까지 참여폭을 넓혀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마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박춘성(75) 화가와 김미윤(67) 시인은 대동제와 아주 밀접한 인연을 가지고 있는 문화예술인이다.

    김 시인은 현재 대동제 대회장을 맡고 있고, 박 화가도 지난 2000년대 중반부터 5년간 대회장을 맡아 대동제 발전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두 예술가를 지난 23일 오후 대우백화점 지하 2층 대우갤러리에서 만났다.



    ◆마산 대동제 발전에 기여

    “마산 대동제는 지난 1988년 지역 예술인들이 즐겨 찾던 선술집인 고모령에서 젊은 예술인들이 1~2호 크기의 그림과 시화 등을 내걸고 술과 안주를 마련해 정월 대보름까지 원로 선배 예술인들에게 새해인사를 올린 것이 첫 출발이 되어 올해 27회 대동제를 열었죠.”

    김 시인은 대동제의 역사와 대동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설명했다.

    최운 화가와 황선하 시인 등 지금은 작고한 문화예술인들이 올림픽을 맞아 지역에서도 문화예술과 관련한 모임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있었고, 고모령에 어른들을 모셔 인사를 하고 시민들이 찾아오면 막걸리라도 대접하자는 의미에서 신년하례 형태로 시작했다고 한다.

    박 화가는 “고모령은 가난한 예술인들에게 막걸리 한잔으로 주린 배를 채워주는 넉넉한 인심과 낭만이 가득한 쉼터로 마산 대동제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추억의 명소다”고 회상했다. 김 시인은 “미협과 문협이 인연을 계속해 나갔던 끈이 대동제였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제1회 대동제는 고모령을 중심으로 부림시장 뒷골목에서 시작됐으며, 1992년 고모령이 서성동으로 옮기면서 행사 규모가 더 커졌다. 이후 운영난을 겪던 고모령이 1998년 문을 닫자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한 지역 예술인들은 창동갤러리와 대우백화점 등에서 행사를 하다 2000년부터 대우백화점 갤러리에서 계속 갖고 있다.

    “대동제의 틀은 잡혔지만 시민들과 함께 막걸리 한잔 하면서 낭만을 즐기던 때가 그립습니다.”

    초창기 때는 장소는 좁았지만 참여 작가도 많았고, 시민들이 막걸리를 마시고 술값을 더 내놓았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또 백일장이나 사생대회를 마치고 나면 반드시 ‘후렴잔치’를 했는데 고모령 등에서 사회를 보는 사람, 심사평을 하는 사람, 가요평을 하는 사람 등 어깨동무를 하고 정을 나누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선·후배간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화가나 문인이 앉을 만한 사랑방 역할을 하는 곳이 없어 아쉽다고 입을 모았다.

    김 시인은 “20회 대동제 때부터 5년간 박 선생님이 대회장을 맡았으며, 그때부터 종합예술발표회 형태로 발전해 국악, 음악도 참여했다”며 “예산 지원, 일하는 분들의 지도력도 필요하지만 희생정신 없이는 어렵다”고 적극적인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방송 취재하면서 끈끈한 인연

    두 예술가의 만남은 3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김 시인은 마산MBC PD, 박 화가는 마산고 미술교사로 있던 시절이었다. 마산문협과 마산미협 회원으로 시화전 등의 행사를 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특히 김 시인이 지역 문화예술인을 집중 조명하는 문화예술 방송프로그램을 맡아 박 화가의 작품세계 등을 취재하면서 더욱 끈끈한 정이 쌓였다.

    두 예술가는 갤러리를 둘러보며 서로에 대한 애정 어린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박 선생님은 후진들을 위해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30여년 전 미마회(마산지역 미술교사 모임)를 창립해 작품발표 기회를 계속해서 마련하고 있고, 경남구상작가회 창립멤버이며 무학화가회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는 등 선배로서, 원로로서 후진 양성에 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김 시인은 박 화가의 활동상을 꿰뚫고 있었다. 또 “40년간 미술교사를 하면서 지난 2002년 창원 명서중 교장을 끝으로 정년퇴직하셨죠.”

    박 화가도 이에 질세라 김 시인에 대해 많은 덕담을 했다.

    “김 시인은 언론계에서 문화예술 담당을 하면서 문화예술인들과 친밀하고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죠. 마산문협 회장, 마산예총 회장, 지금은 생활문화예술협회 회장도 하고, 가고파큰잔치 제전위원장, 경남문학관 관장을 맡고 있는 등 지역 문화예술 발전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김 시인의 이력을 설명했다.

    박 화가는 그러면서 “김 시인은 정말 머리가 좋은 분”이라고 덧붙였다.

    “문화예술 행사 때 항상 사회를 보면서 참석자들을 한 명도 빠뜨리지 않고 이름을 호명하는 등 작가들에 대한 애정이 깊은 분이다”며 “뒤를 이어받을 사람이 있어야 되는데…”라며 걱정을 하기도 했다.



    ◆젊은 작가 무뎌진 창작열정 걱정

    두 예술가는 갤러리 찻집에서 차를 한잔 하면서 최근 원로화가들의 잇단 별세에 아쉬움을 표했고 젊은 작가들의 무뎌진 창작열정을 걱정하기도 했다.

    박 화가는 “마산화단과 서단을 지켜온 1세대 중에 김대환 선생과 박장화 선생이 생존해 계시는데 최근에 권영호·변상봉·윤병석·최붕현 교수가 잇따라 작고해 가슴이 아프다”며 “마산 화단이 활기를 띠게 된 것은 경남대 미술교육과, 창원대 미술과가 생긴 이후 우수한 교수들이 정착하면서 많은 미술인구가 배출된 덕택이다”고 설명했다.

    그는 “1962년 한국미협 마산지부 설립 때 회원 11명이었는데 지금은 300여명이다”며 “그만큼 대학이 지역에 영향을 미치는 게 크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박 화가는 “미협의 식구가 많아져 잘 어울리지 못하고 선배가 후배 챙기는 것도 힘든 상황이라 끈끈한 정이 별로 없는 것 같다”며 “앞으로 선·후배 챙기고 존경하는 단체가 됐으면 좋겠다”는 충고도 했다.

    그러면서 젊은 작가들의 창작열정이 예전만 못해 아쉽다는 평가도 했다. 박 화가는 “선배 작가들은 생계보다는 예술적인 기질과 자존심으로 창작열정을 불태웠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걱정이 되기도 한다”고 했다.



    ◆옛 선배들 회상하며

    마산미협 지부장을 역임한 고 이수홍 화백과의 인연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박 화가는 “이수홍 선생님은 젊은 예술인들을 많이 챙겨줬는데, 제가 마산고 교사로 있을 때 중신까지도 해줘 결혼을 하게 됐고, 정진업 선생님이 주례를 섰는데 주례사가 한 편의 시로 되어 있어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 회상했다.

    김 시인은 “마산문협 창간호가 1968년에 나왔는데 표지화를 이수홍 선생님이 그렸다”며 “마산 미술을 이끌던 분이었는데 젊은 나이에 별세해 아쉬움이 크다”고 말했다.

    당시 마산예술계의 분위기도 이야깃거리가 됐다. “문협과 미협이 시화전, 백일장, 그림전 등을 하며 가장 잘 어울렸으며 술 한잔 기울이며 어른들은 품위를 지키면서 후배를 잘 챙겨주고 후배들은 어른들을 공경하는 것이 마산 예술계의 아름다운 전통이었죠.”

    또 배고픈 화가와 문인들을 많이 도와준 고 안윤봉 화가에 대한 추억담도 나왔다.

    김 시인은 “안 선생님은 경남신문 기획실장을 역임했으며, 음반수집가이기도 하고 1955년 창립된 미술단체 흑마회의 초대회장도 맡아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뒤를 돌봐 준 분이다”고 말했다.

    흑마회는 마산 최초의 미술단체로 향토문화의 대중화를 내걸고 다방 전시를 탈피해 저축은행(남성동파출소 근처)에서 한국 최초의 가두전시회를 열었다.

    박 화가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가두 전시회를 보러 갔었는데 고교 은사이며 화가의 길을 인도한 고 이림 선생님의 작품과 괴이한 풍경을 담은 고 김주석 선생님의 작품 ‘악마의 밤’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김 시인도 마산중앙중 시절 박홍석 미술선생님의 영향으로 미술반과 문예반을 왔다갔다 하면서 학창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시인이면서 미술평론가로서의 길을 가고 있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향토예술 발전을 위해

    향토예술계 발전을 위한 제언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박 화가는 “창작활동을 활발하게 할 수 있도록 작가들의 생활안정을 위한 대책이 있어야 한다”고 했고, 김 시인은 “예술이 갖는 자율성은 사회적 요건에 영향을 많이 받는데, 사회가 예술을 능동적으로 수용하는 분위기가 작가들의 창작열을 불태우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두 예술가는 “인간의 심성 속에는 진실과 아름다움을 사모하는 깊은 뿌리가 있는데, 그것을 찾아내기 위해서 예술인은 그 소명을 다해야 한다. 생활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예술인이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앞으로 어떻게 예술활동을 펼쳐 나갈지의 계획과 각오도 들어봤다.

    농어촌 마을의 고향풍경과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토속적인 모습을 그리고 있는 박 화가는 “애틋한 부부애와 소박하면서 짓궂은 동심,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가축들과의 아름다운 공존, 성실한 농부의 모습 등 정겨운 옛 풍경을 화폭에 담아 내년쯤에 개인전을 열 계획이다”고 말했다.

    김 시인은 “올해 하반기에 3번째 시집 발간을 준비하고 있으며, 올가을 유택렬 화백 15주기 추모제 때 유 화백의 작품세계와 작가정신을 담은 평론을 발표할 계획이며, 경남문학관 관장으로서의 소임을 빈틈없이 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글= 이종훈 기자 leejh@knnews.co.kr

    사진= 성승건 기자 mkseong@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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