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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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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藝), 그리고 만남] (16) 도예가 최웅택과 서각가 김도형

‘전통의 길’ 빚고 깎는 두 남자

  • 기사입력 : 2014-05-26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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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원시 진해구 용원 산자락에 있는 최웅택 도예가의 작업실에서 만난 최웅택(왼쪽)과 전통서각을 하는 김도형 서각가.


    반죽을 붙여가며, 나무를 깎아가며 ‘형(形)’을 찾는 두 사람.

    형이 전부인 사람들이 있다.

    그 형은 온몸을 다해, 온 시간을 다해 이루는 것이다.

    제 몸과 생각을 놓은 길을 바탕으로 한 여정, 그러니까 그 사람의 내력은 형에 오롯이 담긴다.

    완성된 형을 가만히 쳐다본다.

    형을 만들어나가는 행위와 결과물. 만든 이가 어디에 가치를 두는지 짐작할 수 있다.

    웅천 찻사발을 만드는 도예가 최웅택(59)과 전통 서각을 하는 김도형(41) 서각가 이야기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봤다.

    ‘나와 추구하는 가치가 같구나!’

    경상도 남자 둘이서 오월 대낮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이유가 됐다.

    둘을 만난 곳은 창원시 진해구 용원 산자락에 있는 최웅택 도예가의 작업실에서였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노란 앵무새가 창문 너머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어지간히 궁금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산바람도 방바닥을 훑고 지나갔다.



    ◆자연스러운 선택

    웅천 두동 산자락에서 나온 400년 전 차편(찻사발의 파편)이 가득 놓인 방을 지나가야 손님을 맞는 방이 나온다. 언제나 조선 도공들의 길을 걷겠다는, 한국의 멋을 좇겠다는 하나의 의식 같은 걸까. 선조들이 지켜온 길을 걷겠다는 두 명이 방에 앉아 있었다.

    최 도예가의 길은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어릴 때 소를 데리고 꼴을 먹이러 산에 많이 올랐어요. 사발 파편들이 많이 널려 있었지요. 그때가 네댓 살이니 뭔 줄 전혀 몰랐어요. 그걸로 치기 놀이도 많이 했지요. 그러다 군대 가기 전에 시간이 남아 송아지를 사서 키웠는데, 그때 뒷산에 일본인들이 잔뜩 몰려 있는 걸 봤어요. 조선 도공들이 만든 웅천 찻사발 조각을 캐러 온 도굴꾼이더군요.”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옛이야기를 들었다. 일본에 끌려간 조선 도공들의 이야기였다. 그들이 끌려가지 않으려고 몸부림쳤던 슬프고 처절했던. “아재들한테 제사는 함 지내줬습니꺼?” 열여덟 그가 꺼낸 말이었다.

    그 이후로 친구와 함께 일본인 도굴꾼을 막으려 함정을 쳐놓고, 송아지를 팔아 조선 도공을 위한 첫 제사상 장을 보러 나섰다. 그게 벌써 40년도 더 된 일이다. 군대를 다녀온 후에도 예쁘게 보이는 찻사발은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혼자 차편을 스승 삼아 도예를 공부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가, 흙을 찾다 이제 포기한다는 인사를 하러 뒷산에 올랐을 때, 경북 영천에서 온 도굴꾼을 만나 삼백토의 위치를 알게 됐다.

    “뛸 듯이 기뻤지요. 조선 도공들이 제삿밥을 더 달라고 저한테 흙을 주신 건가 했지요. 어릴 때부터 뗄 수 없는 관계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웅천 찻사발을 그대로 만들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서각 장르 중에서도 전통 서각에 푹 빠진 김 서각가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5년 동안 자주 뵀는데 이렇게 제사 장보러 간 얘기까진 처음 듣네요. 하하, 저도 형님이랑 비슷한 것 같아요. 어떤 계기가 있었다기보단 자연스레 전통공예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어릴 때 아버지 손을 잡고 고궁과 한옥을 갔을 때 ‘멋지다. 예쁘다’고 느끼면서 한국 고유의 아름다움에 동경을 느낀 것 같아요. 석굴암, 불국사의 건축기술을 현대 기술이 재현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옛 기술에 대해 놀라기도 했고요. 그래서 나이에 걸맞지 않게 20대 중반부터 전통 서각의 매력에 사로잡혔죠. 가정보다도 서각에 더 매달렸던 것 같습니다.”



    ◆20년 차 두 예술가 교류기

    “5년 전쯤이었던 것 같아요. 웅천조선도공 추모제에서 형님을 처음 만났어요. 말씀만 듣다가요. 그 이후로 일주일에 한 번꼴로 이곳을 찾고 있지요.”

    최 도예가는 김 서각가보다 18살이 더 많다. 옛날로 치면 아버지뻘인데도, 형님 동생으로 잘 지낸다.

    “김 선생은 젊은 친구인데도 한국미를 추구하려는 강한 의지가 보였어요. 말이 잘 통할 수밖에 없었죠. 많은 작가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제겐 아무래도 우리 것을 아끼는 후배들이 예뻐 보이니까요.”

    그때부터 최 도예가의 작업실에 자주 찾아와 때로는 밥을, 때로는 차와 술을 나누며 많은 이야기를 했다.

    한 달 전에는 5년간 쌓은 믿음에 방점을 찍었다. 최 도예가가 김 서각가와 함께 사발을 만들 흙을 캐러 간 것이다.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쓰는 재료를 낱낱이 알려주기 꺼려해요. 작품을 좌지우지하는 것이니까요. 도예가에게 흙은 정말 핵심이죠. 그런데 형님이 흙을 같이 캐러 가자고 하셨어요. 둘이서 배낭을 하나씩 메고 산에 올랐죠. 백토가 어딨는지 가르쳐 주시더라고요. 뭉클했습니다.”

    사발을 빚기 위해 반죽을 만들기 전 흙을 거르고 주무르는 과정인 수비지도 함께 했다. 김 서각가는 직접 작은 찻사발도 하나 만들어 봤다.

    “손재주가 있는 편이라 생각했는데 모양도 제대로 안 나오던 걸요. 얼마나 공을 들여야 하는 작업인지 조금이나마 알게 됐죠. 6월엔 1년에 서너 번밖에 때지 않는 가마에 불을 때고, 사발을 구울 건데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장인정신

    작업실 아래채에 있는 다실로 자리를 옮겼다.

    최 도예가가 가리키는 손 끝을 따라가니 걸려 있는 서각 작품이 보인다. ‘차(茶)’ 한 글자가 한자로 새겨져 있다. 느티나무로 작업한 작품. 바탕은 점점이 파 검게 채색했다. 양각으로 판 글씨는 맨들하니 부드럽다.

    “김 서각가 작품입니다. 멋지지요. 장인정신이 있어요. 제가 지키려고 하는 것은 조선 도공들이 웅천 찻사발을 만들 때의 방법을 그대로 재현하는 건데, 장인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에요. 김 서각가는 젊은데도 투철한 장인정신이 묻어나요. 서각가들이 글을 많이 받아 쓰는 데 비해 김 서각가는 오래 서예를 해서 글씨도 직접 쓰고, 판 작품도 많아요. 작품의 전반(全般)을 직접 구성해요. 그래서 좋아하지요.”

    “형님에 비하면 아직 한참 멀었지요. 저건 진주 고승의 글씨를 받아서 작업한 거예요. 이 해와 달이 직접 제가 쓰고 판 작품입니다.”

    김 서각가는 일일이 발로 물레를 돌려 찻사발을 만들어 내는 최 도예가의 노력을 이야기한다. 찻사발을 만드는 체험을 하고, 사발을 만드는 걸 지켜본 그는 최 도예가가 얼마나 노력을 기울여 사발을 만드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장인정신이 투철한 두 예술가가 만든 한 작품은 어떨까.

    최 도예가가 빚은 사발에, 좋은 글을 받아 김 서각가가 글자를 판 작품을 예정하고 있다고 했다.

    “제가 형님 도자의 가치를 떨어뜨리면 안 될 텐데요. 하하.” 웃음 사이로 서로에 대한 예술적 믿음이 단단하다.

    필요한 것만 남기고, 불필요한 것을 떨구는 사람들.

    하나의 더함과 뺌이 형을 결정하고, 그 형이 작품의 질을 정하기에 철저하다.

    작품을 대할 때와 사람을 대할 때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글= 이슬기 기자 good@knnews.co.kr

    사진= 전강용 기자 jky@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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