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14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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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문학의 텃밭] 초등학생 이우걸이 어머니께 드린 건…

시대정신 가르쳐준 고향마을 덕봉서원
내 문학의 텃밭 (2) 이우걸 시조시인

  • 기사입력 : 2014-06-24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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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녕 부곡면 부곡리 덕암산에 있는 덕봉서원 앞에서 포즈를 취한 이우걸 시조시인. 그는 나라사랑의 정신과 당당한 시대정신을 갖게 한 덕봉서원을 ‘영혼의 성소’라 했다./사진= 김관수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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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봉서원 앞에 있는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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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 적 겨울이면 얼음 언 이곳 논에서 팽이를 치곤 했다.
    창녕군 부곡면 부곡리 156번지. 이곳이 내가 태어난 곳이다. 벽진 이씨 집성촌 마을에서 유학을 하시는 아버지와 한글을 해득하는 수준의 어머니 사이에서 8남매 중 일곱 번째로 나는 태어났다. 중농 정도의 가정경제, 대가족, 농사를 잘 짓지 못하시는 아버지, 벼·보리 농사가 우리 가정 형편을 좌우하는 주요 경작 작물이란 것으로 우리집을 소개할 수 있다.

    아버지는 경서를 읽으시고 시짓기를 좋아하시던 분이었다. 내가 문학에 관한 자질을 얼마간 타고났다면 아마도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그런 면에서 소질이 없었다고 단정 짓기 어렵다. 내가 시조를 쓰게 된 계기는 어머니 덕분이다. 해방되기 일 년 전에 아버지께서 일본에 징용가셨다. 6남매의 자식들, 농사일 등 젊은 어머니는 온통 근심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셨다. 그 근심을 쫓기 위해 하신 것이 담배 피우기와 무언가를 외우는 것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면 언제나 담배를 한 대 피우시고 그다음은 회심곡이나 불경, 한양가 등 여러 가사를 외우며 불안한 가슴을 안정시키곤 하셨다. 해방이 되자 아버지는 돌아오셨고 나와 동생은 해방 후에 태어났다. 그런데 앞서 얘기한 어머니의 가사나 시 외우기 습관은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까지 계속되어서 나는 초등학교 교과서는 물론이고, 중학교, 고등학교 등 형님들의 국어책에 실린 고시조나 현대시조까지 누런 비료포대종이에 붓글씨로 베껴서 어머니께 드렸다. 어머니는 그 시조들을 아침마다 외우시고 나서야 하루 일을 시작하셨다. 곁에서 그런 모습을 늘 지켜보며 자란 내가 시조를 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그렇다고 시조만 쓰려 했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나 중학교 때 백일장 대회에 학교 대표로 나갈 때는 언제나 자유시를 썼다. 시조백일장은 없었다. 그러니 시조 장르를 의식한 적도 없었고 산에 소를 먹이러 가거나 혼자 나무 의자에 앉아 있을 때 막연하게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을 뿐이었다. 선생님이 장래희망을 묻기에 시인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시인이 되려면 하루에 한 권씩 책을 읽어야 하는데 어렵지 않겠느냐고 했다. 실망스런 선생님의 결론이 가슴 아팠다. 그땐 책을 살 돈도, 책방도 근처엔 없었다. 가끔 ‘학원’을 읽고 투고하면 가작이 되어 내 이름이 실렸지만 형님들은 잡지사의 영업 차원의 호의라고 무시했다. 그런데 부곡중학교 운동장에는 가끔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행사가 펼쳐지곤 했다. 밀양에서 헌책장수가 문학 관련 헌책들을 운동장 한편에 진열해 놓고 헐값으로 파는 것이었다. 그때 내가 사 읽었던 책은 김소월의 ‘진달래꽃’, 노천명의 ‘사슴’, 한하운의 ‘나의 슬픈 반생기’, 김춘수의 ‘현대시 감상’, 신석정의 ‘어머니 아직은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등이었다. 이런 책들을 교과서와 참고서 사이에 끼워서 소중하게 읽고 끊임없이 습작했다.

    그리고 방과 후나 방학 때는 주로 소를 먹이러 산에 갔다. 우리 뒷산은 덕암산이다. 그 덕암산의 정기를 받는 곳에 덕봉서원이 있다. 덕봉서원은 1702년 숙종 때 세워져서 고종 8년(1871년)에 철폐된 190년간 존속한 교육기관이다. 영산현으로 이주해온 우리 씨족들의 향학 열정이 결실을 본 교육기관이다. 대원군의 서원철폐정책으로 고종 8년 공식적인 기능은 끝났지만 어릴 때 천자문이나 명심보감을 가르치기 위해 청년들을 모으기도 했다. 여기에 10대, 11대, 12대 3대조의 위패를 모셔 두어서 명절이면 반드시 제례를 올렸다. 그래서 유·소년기에 나의 상상력을 길러주고 시대정신을 무언(無言)으로 가르쳐준 곳이 바로 고향이고, 그 정신의 정점에 있는 신성한 곳이 나에게는 덕봉서원이다.



    쳐라, 가혹한 매여 무지개가 보일 때까지

    나는 꼿꼿이 서서 너를 증언하리라

    무수한 고통을 건너

    피어나는 접시꽃 하나



    흔히 평자들이 나의 대표작으로 드는 ‘팽이’라는 작품이다. 군부독재의 갈등 속에서 청년기의 대학생인 내가 느꼈던 저항의식을 팽이라는 사물에 이입시켜 노래한 것이다. 우리는 어릴 때 얼음이 얼어있는 겨울논에서 팽이를 돌렸다. 팽이는 때려야 돈다. 그러나 내가 위 시조에서 노래하는 것은 어떤 폭압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강고한 자신의 선언이고 그 당시 젊은 청년들의 피 끓는 외침이었다.

    어릴 때 누나는 창녕에서 자랐고

    자라서 누나는 파주에서 살지만

    당신은 우리 누나를 욕하지 못한다.



    강도 산도 해도 달도 산 자의 인연일 뿐

    핏줄처럼 엉켜 붙은 잡초들을 후벼 파다가

    사변이 나던 이듬해 밤차를 타고 떠났다.



    이따금 엽서에다 누나는 소식을 쓴다

    성한 그, 다리로는 밟지 못할 고향땅에

    어머니 추우실까 봐 털옷도 짜 보낸다.



    ‘우리 누나’라는 작품이다. 6·25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서정시에서 1인칭은 대체로 작가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렇지 않다. 사실은 6·25 전후해서 학생들에게 글을 쓰게 했을 때 언제나 비슷한 작품을 쓰는 것을 보고 무언가 절실하게 느껴지게 쓸 수 없을까 하고 궁리하다 6·25 이후 양공주가 된 누나를 가진 동생이 우리 반 학생이었던 기억을 되살려 써 본 것이다. 부곡초등학교 같은 반으로 키도 크고 씩씩하고 명랑한 성격의 그 학생은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장난감을 가지고 와서 뽐내곤 했고 우리는 많이 부러워했던 적이 있었다.

    문학 청소년기의 깊은 고뇌와 새로움에 대한 갈망을 느끼고 그걸 채우기 위해 몸부림친 건 고등학교를 다니던 밀양에서였고, 나를 문인으로 훈련시키고 한 시인으로 이름을 걸게 해준 도시는 대학을 다니던 대구였다. 그러나 느낀 생각을 적고 다시 되새기면서 세상의 신비에 처음 눈 뜨게 해준 곳은 고향 창녕 부곡이다. 부곡의 모든 자연환경과 학교와 그 공간의 사건들이 나를 키웠겠지만, 특히 덕봉서원은 유림의 후손으로서의 긍지와 겨레와 나라를 향한 사랑의 정신이나 당당한 시대정신을 갖게 하는 내 영혼의 성소로 자리 잡고 있다. 고향에 갈 때면 자주 이곳에 와서 내 걸어온 생을 반추하며 마음을 다잡곤 한다.


    <이우걸 약력>
    △1946년 창녕 출생 △1973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지금은 누군가 와서’, ‘맹인’, ‘주민등록증’ 등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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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관수 약력>
    △1956년 고성 출생 △개인전 15회 △경남사진학술연구원 원장, 대구예술대 사진영상과 겸임교수, 경남국제사진페스티벌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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