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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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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포럼] ‘매천야록’을 읽는 저녁- 윤봉한(윤봉한치과의원 원장)

  • 기사입력 : 2014-06-24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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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달 한 권씩 책 읽는 모임을 하고 있다. 10년이 되었다. 함께 책 읽는 모임의 장점은 원하지 않는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반어법적인 표현이 아니다. 원하지 않아도 모인 사람들의 기호만큼 다양한 책을 읽어야 한다. 의외의 즐거움이 거기에 있다.

    지난달 모임의 책은 ‘매천야록’이었다. 무기력증에 빠져있던 4월 중순부터 구한말 나라가 망해가는 또 다른 힘든 시기의 기록인 ‘매천야록’을 손에 들고 근 한 달을 끙끙거리며 보내야 했다. 물론 ‘매천야록’은 곳곳에 해학이 가득 넘치는 책이다. 시기가 문제였다.

    모임의 실상은 책 한 권을 앞에 두고 두어 시간 잡담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매천야록’을 읽던 날은 분위기 탓인지 책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이 오히려 적었다. 하지만 정신 차려 보면 어느새 모두 다시 세월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사고가 사고에서 그치지 않고 의혹과 분노가 더해진 복합적인 사건의 양상으로 이어졌고, 그러다보니 구한말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 위정자들의 어제와 오늘이 ‘매천야록’을 통해 더욱 선명하게 겹쳐 보여서 그랬을 것이다.

    잡담 반이라곤 하지만 아무래도 뾰족한 주제가 정해져 있는 책 읽는 모임이라 자주 말이 부딪힌다. ‘매천야록’을 읽던 날도 그랬다. 어떤 이는 고종과 명성황후 그리고 대원군을 각각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하려 했고, 갑신정변의 개화파 또한 친일파와 애써 구분지어 안타까움을 표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또 옆길로 새서 세월호 참극을 우리 모두가 가진 물신적 욕망의 결과물로서 이해하며 함께 반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교훈을 강조하기도 하고, 그러자 또 다른 이는 그보다 리더의 중요성과 역할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결과가 나빴을 뿐이지 고종과 대신들도 나름 잘하려 했을 것이라는 사람도 있고, 박근혜정부가 다 책임을 질 일은 아니지 않느냐는 주장과 아니라며 반박하는 사람도 있었다.

    생각의 차이와 관계없이 ‘매천야록’을 앞에 두고 구한말과 현실이 자꾸 뒤엉켰다.

    그날 중등 교사 두 분이 공교롭게 모두 결석했다. 특히 30대 초반의 한 선생님은 몇 달 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읽기 모임 때 교사로서 자신의 무력감을 길게 토로한 바 있어 내심 걱정이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나치의 유태인 대량학살의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의 재판 기록을 다룬 책이다. 저자 한나 아렌트는 악마적 살인마가 너무나도 평범해서 그래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이질적인 모습인 현실을 ‘악의 평범성’이란 단어로 설명한 바 있다. 그 선생님은 이제 학생들의 생활기록부에 좋은 뜻으로 ‘규칙에 잘 따르며’라는 글을 쓸 수 없겠다며 혼란스럽다 했다.

    아렌트의 지적에 의하면 위로부터의 지시에 순종적인 인물이 아이히만이며 그런 비판 없는 순종적 태도가 악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었다.

    매천 황현은 현실 정치에 절망하여 벼슬을 단념하고 구례에 은거하던 중 한일합병 소식을 듣고 지식인으로서의 책임을 통감하는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한 인물이다.

    그가 살아서 한 일은 자신이 그토록 암담해하던 자신의 시대로부터 등 돌리지 않고 오히려 꼼꼼하게 기록을 남기는 것이었다. 다시 이 땅에서 살아갈 이들을 통해 길 찾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날은 우선 무엇을 어떻게 하기보다는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지금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매천야록’과 함께 모인 자리라는 생각이 드는 저녁이었다.

    윤봉한 윤봉한치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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